주님, 당신 얼굴을 찾으라 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따르라고 명하셨으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2025년 3월 16일 사순 제2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3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15,5-12.17-18)
하느님께서는 충성스러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 - 제 2독서
(필리 3,17―4,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9,28ㄴ-36)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9,35)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창세 15,5-12.17-18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충성스러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5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7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8
아브람이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9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잘라,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11
맹금들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아냈다.
12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18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필리 3,17―4,1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빛나는 구름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루카 9,28ㄴ-36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16일
홍성원 미카엘 신부
✚ 서울 예수성심성당 소개 00:38
✚ 미사시작 01:51
✚ 강론시작 16:14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가회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가회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06: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생중계 없음 - 남양성모성지 온라인 매일미사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남양성모성지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생중계 없음 / 화 11:00 / 수 11:00 / 목 11:00 / 금 11:00 / 토 11:00 - 원당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원당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원당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10: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10:00 - 초당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초당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초당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0:30 / 월 06:30 / 화 19:30 / 수 10:00 / 목 19:30 / 금 10:00 / 토 10:00 - 팔로티회 온라인 매일미사
팔로티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을 말합니다. 이 떠나심은 ‘영광’을 위한 ‘넘어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고난을 겪고, 예루살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9,22 참조). 영광 가운데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는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영광 가운데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만 자신이 본 그 영광이 계속되기만을 바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사명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함께 있었던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수난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두고 떠났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포기하시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사명의 신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희망을 보는 사람 희망을 주는 사람
지난주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가셔서 악령의 유혹을 받으신 주님께서 오늘 사순 제2주일에는 산으로 가시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고, 그 모습을 뽑힌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십니다.
왜 이러신 것일까?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순시기 전례적인 의미로 볼 때 이 사건은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것과 해골산에서 돌아가신 것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산으로 오르셨다가 다시 내려오신 다음 다시 골고타로 오르시어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은 뽑힌 제자들 뿐 아니라 우리도 따라야 할 주님의 발자취이고,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봉헌 생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크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여정은 <A Patre, ad Patrem> 곧 성부께로부터 오셔서 성부께로 돌아가시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작게 보면 그 중간에 광야-타볼산-해골산의 여정이 있고 그래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는 이 여정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성부께 갈 수 있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모습은 해골산에 오를 제자들을 위해 미리 일부러 보여주신 것이고,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모될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차 이렇게 될 희망을 가지고 당신의 십자가 길을 따르라는 뜻으로 주님께서는 뽑힌 제자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시고, 바오로 사도는 하늘 시민인 우리에게도 권고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필리피서에서 십자가를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늘 시민을 대비시키며 자신과 필리피 신자들은 하늘 시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늘 시민이 될 것인가? 자문케 하고 선택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답과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우리의 대답과 선택은 너무도 자명하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원수들이 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겠고 상상할 수도 없겠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십자가의 원수들이 될 수 있고, 반대로 하늘 시민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선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 생래적으로 고통을 거부합니다. 인간이란 아니 모든 피조물은 고통을 거부하게끔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꽃길을 가면서 고통스럽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것도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산을 오릅니까?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아, 좋다! 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는 그런 산을 오르지 않고 하느님의 산을, 하늘 시민이 되기 위해 오르며, 그래서 고통을 감수하고 더욱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오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이런 목적이 없으면 곧 하늘 시민이 되려는 목적이 없으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목적은 있는데 희망이 없어도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십자가만 보고 주님을 보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주님은 목적지시고 길잡이시고 동반자이시기에 희망을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산 위에서 변모하신 것은 이런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고, 뽑힌 제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신 것도 그들이 희망을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보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그 희망을 주는 사람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말씀 안에 머물기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이처럼, 아브람의 믿음 위에 계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에게 줄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시편을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시 27,7-8.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멸망이 오고, 믿는 이들에게는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필리 3,21)이라고 하면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 4,1)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면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합니다.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려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고 전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산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듯이, 중대한 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곧 죽임을 당하시기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시간이 임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시던 중에 변모를 이루시는데,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루카 9,30). 이 표현은 ‘이 두 사람’에 대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곧 <루카> 24장 4절의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에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표하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애굽을 통해 약속된 땅으로 인도했듯이, 엘리야가 불붙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듯이, 그들이 예표한 바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될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며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요, 예언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 다음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날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루카 9,31). 이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과 그를 위한 수난과 죽음을 알려주심과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부활 무덤 안에 나타난 “두 남자”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들은 당황하는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6-7)
결국,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1코린 15,3.4)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습니다.”(루카 9,34). 그리고 그 속에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우리는 이와 유사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서도 들었습니다. 곧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마르 1,12;마태3,17)라는 말씀입니다. 이 둘은 예수님의 신원을 아버지께서 직접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그 신원을 제자들에게 밝혀주시는 장면이고, 후자는 예수님께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후자는 <2사무엘>(7,14)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이어받은 <시편>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2,4)이라는 표현과 <이사야>에 나오는 “내 마음에 드는 이”(42,1)라는 표현이 합쳐진 것입니다. 이는 메시아 “왕”과 “주님의 종”이라는 두 예언적 인물을 합쳐줍니다.
그리고 전자는 <이사야서>의 “내가 선택한 아들”(42,1)이라는 표현은 “고통 받는 주님의 종”(53장)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뒤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 대한 유혹의 말, 곧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라는 말로 다시 반복됩니다. 따라서 이는 예수님을 인류구속을 위해 죽게 될 “종”임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주시며,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가르쳐주십니다. 곧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시며, 그들이 아드님처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흔히 말하기를 ‘은혜로운 회개의 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지금, 나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라면,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혹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을 듣지 못해서 일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선물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우리는 진정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들은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 까닭에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이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9,35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
말씀 아래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말씀이 제게서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에 응답하는 일,
바로 그 일을 제가 하게 하소서.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변모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오늘 말씀의 그늘 아래에서
비천한 제 몸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타볼산에 오르는 법
우리는 모두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뵈옵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딱 맡기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표징’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 얼굴을 뵈옵자고 하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하십니다.
저도 사제가 되라고 불러주실 때, “그럼 먼저 당신 얼굴을 보여주세요~!”라고 청했습니다. 그게 정말 성모님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성모상에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셔도 저는 “내가 술을 마셔서 헛것을 봤지!”라고 생각해버렸습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마음은 순종하고 싶지 않은데 그 핑계를 하느님께 대는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하느님 탓만 하는 것입니다. 복권은 사지 않고 복권에 당첨되면 믿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나를 타볼산 꼭대기까지 데려다줄 이를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시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김흥순 자매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장이 유착된 상태여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다 게워내며 걷지도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명한 병원엔 다 다녀봤지만 수술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진단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2~3년, 길면 5년은 더 살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수술이 두려워서인지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설득하자 자매는 자신들을 위해 고생하는 수녀들 인생이 참 딱하다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은 딱한 수녀 말 한 번만 들어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대세를 받고 수술도 받아보겠다고 했습니다.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는 “나는 무조건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설 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인자한 모습으로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의사가 자신을 분명히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그렇게 수술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수술받을 때 자기 발 쪽에 서 계셨던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수술실에는 모두 청색 가운을 입게 되어 있어서 흰색 가운 입은 의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매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였습니다. 두 달 후 교리를 받고 정식 세례를 받았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을 때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짐을 느꼈고 걷지도 못했던 그 자매는 기쁨에 취해 병실을 두 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에 들어선 자매는 감실 쪽을 보더니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저를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기적적으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으며 퇴원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수녀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잘 사신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이영숙 베드로 수녀는 예수님과 같이 말을 듣기만 하면 타볼산에 오를 수 있게 하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였습니다. 파견된 자의 특징은 사랑을 위해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파견된 자는 마치 아이에게 엄마와 같습니다. 엄마를 믿지 못하면 아빠는 자동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엄마를 파견한 아빠의 사랑은 더더욱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하느님 신성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고생은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명과 힘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는 이들은 반드시 주님의 얼굴을 뵐 수밖에 없습니다. 별을 따라오다 보면 구유의 메시아를 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읽게 된 것이, 그 책을 쓴 ‘마리아 발토르타’란 분을 보면서였습니다. ‘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는 분이 살아생전에 영광도 보지 못했는데 수만 페이지에 해당하는 광대한 예수님의 생애를 썼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사도들의 삶에 저도 순종하였고 그렇게 “다 주시는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예수님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고생하는 새로운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말을 듣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분명 타볼산에 있게 될 것이고 그 가운데서 모세의 말씀도 듣고 엘리야의 은총도 받으며 밝게 빛나는 하느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별을 존중하고 공경하지 않는다면 구유의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부님! 이런 책도 읽으세요?”
가톨릭 신부이니 종교 서적만 읽는 줄 아셨나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다양한 책을 읽습니다. 시, 소설, 에세이, 철학, 정치사회, 종교, 예술, 과학, 역사 등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면 책을 사서 읽습니다. 요즘에는 아이들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어린이, 청소년 책도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만큼 저의 시야를 넓혀준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이 세상이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전에는 저와 맞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읽으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있었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는 지인이 중병에 걸려 오랜 시간 병상에 있었습니다. 사실 이분은 열려 있는 분이었습니다. 비난보다는 새로운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변하셨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셨고, 사람들에게 화를 낼 때가 많아졌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면서 마음이 닫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 대해 궁금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열린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다양한 활동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활동에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넘쳐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모습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을 테니 여기에서 지내자고 말합니다. 워낙 힘든 전교 여행 중이었으니 이런 제안을 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닫힌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이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가질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 안에 갇혀 사는 닫힌 마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내 뒤틀리고 초라한 손은 축복이었다
- 모데카이 브라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잃어버린 하느님의 얼굴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주일입니다. 짐승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로 살아야 하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빚으신 얼굴을 우리의 교만과 욕심으로 우리는 못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삶이 빛나야 우리의 얼굴 또한 빛날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사랑으로 느껴집니다. 얼굴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며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순시기는 우리가 사람의 얼굴을 다시 찾고 사람의 얼굴로 살아야 할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선택하심을 믿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달라져야 얼굴도 달라집니다. 기도 없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버려야 할 교만이며 거짓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할 때 더욱 빛납니다.
우리의 얼굴이 달라져야 우리의 길도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변모의 주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3/18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8 |
---|---|
25/03/17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7 |
25/03/15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3.15 |
25/03/14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4 |
25/03/13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3 |
25/03/12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2 |
25/03/11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