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를 고난에서 빼내 주소서. 비참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주님, 신자들이 파스카 축제를 정성껏 준비하며 엄숙히 시작한 육신의 재계로 영혼의 참된 쇄신을 이루게 하소서.
2025년 3월 14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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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제 18,21-28)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 오늘 복음
(마태 5,20ㄴ-26)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 오늘 말씀 카드
(마태 5,24)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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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 18,21-28
오늘 제1독서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2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23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마태 5,20ㄴ-26
오늘 복음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14일
김광두 고스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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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미사에 다녀와서는 온종일 온갖 걱정과 근심에 싸여 있다면 어떠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마태 5,17-20 참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더 의로워야 한다는 것은 율법을 단순히 지키는 것을 넘어 더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여 완성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5,21)라는 율법 조문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본디 율법이 지키고자 하였던 가치가 무엇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다만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육체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으니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또는 멍청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까닭 없이 심하게 모욕하는 것도 분명히 일종의 살인이 될 수 있는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여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율법까지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교회도 신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을 근거로 주일 미사는 빠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 말 그대로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에만 몰두하고, 미사에 다녀와서는 온종일 온갖 걱정과 근심에 싸여 있다면 어떠할까요?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계명의 본뜻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주일 미사를 드리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새롭게 일주일을 시작할 수 있는 영적 위로와 힘을 얻어 가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사랑 때문에 (Propter amorem Dei)
오늘 에제키엘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관해 얘기합니다. 아무리 악인이어도 죽는 것을 바라지도 기뻐하지도 않고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서 살게 되기를 바라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악인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요즘 제겐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라고 이름을 대지 않겠지만 그들은 높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을 불안케 하고 불행하게 하는 자들이고, 그들만 없으면 많은 이가 행복할 것이고 적어도 불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회개하고 살게 되기를 바라지 죽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데 니네베인들이 회개하여 살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요나처럼 저도 그들이 회개해 살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고 죽게 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고 다만 내 앞에서 사라져 없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데 그의 죄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악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압도적이기에 그 죄와 악이 아무리 커도 죽게 되기를 바라지 않고 살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의 악보다 크지 않으면 우리는 미워하기 마련이고, 우리의 사랑이 그의 악보다 너무나도 작으면 도리어 악에 압도되어 악에서 그를 빼내지 못하고 악과 함께 그마저 없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 제자라면 우리 의가 바리사이의 의를 능가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바리사이의 의는 단죄하는 의에 불과하고 죄인을 용서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죽이기는 해도 살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또 바리사이의 의는 율법의 의를 지키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율법의 의는 단죄하는 의일 뿐 아니라 최소한의 사랑입니다.
최소한의 사랑은, 누굴 사랑한다면 적어도 이런 죄, 곧 살인과 같은 큰 죄만은 짓지 말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최대한의 사랑은 남에게는 성내거나 욕하는 그런 작은 죄조차도 짓지 않을 뿐 아니라 내게는 원수가 될 정도로 너무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하느님 사랑 때문에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이런 사랑을 하려고 할 때 가능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이런 사랑을 하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고, 인간적인 힘으로는 이런 사랑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데 하느님께서 이런 사랑하기를 원하시니 하려는 마음도 먹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에 그 힘으로 할 수도 있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웃에게 원한을 품게 하는 죄를 짓고 화해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 예물 드리러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갈 때는 반드시 화해하고 난 뒤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에게 갈 때 동생 돈 떼어먹고 그 돈으로 부모에게 갈비 사서 가지고 가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가기 전에 해야 할 화해는 내가 죄지은 사람과의 화해만이 아니라 내게 죄지은 사람과의 화해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내게 너무 큰 죄를 지어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도, 다시 말해서 그가 용서를 청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느님께 가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자주 얘기하듯 하느님 사랑 때문에(Propter amorem Dei) 하기 싫은 사랑도 하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못 할 사랑도 하는 우리가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얼른 화해하기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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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5,24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원망을 품은 이의
아픈 마음을 보게 하시고
제 불찰을 먼저 살피게 하소서.
시비를 따지기보다
이기려 하기보다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거짓말의 결과
먼저 시간이 좀 부족할 것 같아서, 죄송스럽지만, 내일 토요일 복음 묵상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요즘 한국 자살률이 더 증가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하루에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특히 연예인들의 자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연예인들은 대중의 관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 주요 요인이 한국 교육에서 감정의 아픔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에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힘든 감정을 치유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원인을 외적인 것에서 찾게 만드는 문화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란 겉으로 보이는 의로움입니다. 무화과 잎으로 자기 몸을 가리며 자신들이 의롭다 스스로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이들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면서 자신들이 의롭다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겉으로 화를 내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요, 속으로 음란한 마음을 품는 것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속은 보이지 않는다고 겉으로만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았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버리라는 뜻입니다. 이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함’입니다. 거짓을 모르는 솔직함, 이것이 자기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자기 안에 있는 욕망 때문이고 그 욕망을 자아내는 자아 때문임을 보게 합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는 진왕(秦王) 영정(嬴政)이었습니다. 훗날 역사에서 그를 진시황(秦始皇)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기원전 221년에 전국 시대를 평정하고 천하를 손에 넣으면서 “분열된 중국을 하나로 묶어 세상을 다스린다.”라는 큰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업을 성취한 뒤에도 진시황은 더 큰 욕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로 죽지 않는 존재, 곧 불사(不死)가 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권세가 영원하기를 바랐고, 늙고 죽는 일은 “하찮은 범인(凡人)이나 겪는 것”이라고 여기며 “왕 중의 왕인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시황본기」에는 “혹자가 ‘바닷가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머물며 불사약을 지닌다.’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진시황이 연금술사나 방사(方士)를 불러들이며 “과연 누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줄 것인가?” 하고 재물을 아끼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불사의 꿈이 좌절될 때마다 진시황은 자신을 비판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던 이들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대표적입니다. 이는 유학 경전을 비롯한 책들을 불태우고, 황제의 뜻을 거스르거나 비판하던 학자 수백 명을 생매장한 일로, 절대 권위와 영생의 꿈을 위협하는 자들을 제거하려 했던 극단적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시황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편집증적이 되어 곳곳에서 암살자의 위협을 감지하고, 행차 동선을 비밀스럽게 바꾸며 미신과 처방에 의존했습니다. 연금술사들이 조제한 수은(머큐리) 함유 물질을 약으로 먹었다는 설도 있는데,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되어 병을 키웠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기원전 210년, 전국을 순행하던 중 병을 얻어 쓰러져 당시 나이 약 마흔아홉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늙음과 죽음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교만이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의 씨앗이었는데,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는 부끄럽고 두려워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사실 그 근본 원인은 ‘뱀’에게 있었으나, 자신이 부끄러운 이유가 외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 때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행복하지 않은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아 헤매다가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영원한 행복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 안에 진정한 고통의 원인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밖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방법이 ‘거짓말’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은 애벌레가 참 행복을 찾아 나아가는 내용입니다. 이 책에서 애벌레 기둥의 맨 위까지 오른 것들은 그곳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것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숨기려고 합니다. 그들을 자신들 불안의 원인을 자신들의 행복이 경쟁에 이겨 제일 높은 자리에 앉게 한 자기 안의 적에 두지 않고 외부의 평가에 둡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히 그 불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반대 사례입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가톨릭 신부였던 브렌난 매닝은 한때 알코올 중독과 세속적 인정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사제로 보이려 했지만, 실제로는 중독으로 인해 내적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며 매닝은 깊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정직하지 않은 삶임을 통렬히 깨닫게 됩니다. 이 순간 그는 마치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한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너의 완벽함이나 성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
매닝은 이 순간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솔직한 자기 고백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참된 자유와 내적 평화를 경험했고, 『아바의 자녀』와 같은 책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삶을 “불완전한 걸인으로서 하느님의 사랑 앞에 정직하게 서는 삶”이라고 묘사하며,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매닝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완벽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 연약하고 상처 입은 걸인 같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내면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정확히 아픈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그 병을 고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피가 탁해져서 피부에 뭐가 나는데 피부약만 바르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솔직하게 참 행복을 찾는 이들은 성인이 됩니다. 깨끗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이런 자기 모습을 벌거벗고 솔직하게 주님께 보여드리는 시간입니다. 자기 고통의 원인과 자아를 발견하는 광야의 시간을 가톨릭적 ‘명상’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명상을 하며 자아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임을 발견하지 못하면 겉돌고 맙니다. 광야의 예수가 곧 명상의 시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1991년, 운전학원에 등록하고 운전면허 따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군대 가기 위해 휴학을 했는데, 입대 영장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의 군 생활은 30개월이라 휴학 후 6개월 이내에 입대하지 못하면 동기들보다 한 해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특기병은 좀 더 일찍 입대할 수 있다는 말에 운전학원에 등록한 것입니다.
필기시험을 쉽게 통과하고 운전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가르쳐주는 강사는 전혀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반말과 욕을 섞어 이야기했고, 약간의 실수에도 가차 없이 화를 냈습니다. 이렇게 욕을 먹어가며 학원에 다녀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꾹 참았던 것은 면허를 획득해야 군대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이야기한다면, 그때 면허를 따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갑작스럽게 입대 영장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면허를 따야 하는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학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군대에 가는데, 가기 전에 그렇게 욕먹으면서 지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강사를 더 이상 보기 싫었습니다. 반말과 욕을 하는 그 강사가 너무나 미웠기 때문입니다.
그 후 10년이 지나 신부가 되고 나서야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만약 1991년에 계속했다면 훨씬 쉽게 면허를 취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움의 감정 때문에, 또 자존심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계속되지 않습니까? 자존심 때문에, 또 미움 등의 부정적 감정을 내세워서 후회할 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의로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의로움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이 의로움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구원받기 싫으면 말아라.”라고 외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사랑의 의로움을 보여 주셨습니다.
진정한 의로움을 간직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같은 사람에게도 사랑으로 다가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느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는 것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
- 월리 페이머스 아모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복음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모든 사랑은 감사로 드러납니다.
화해를 통해 공동체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맨 먼저 화해를 실행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질수록 화해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화해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제모습을 만나는 사순입니다. 서로의 가시에 찔리며 진심으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화해는 자기정화를 동반합니다. 마음을 기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삶 속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만납니다.
내려놓아야 행복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는 나눔이 진정한 화해입니다. 그래서 화해는 잘지내는 조화로움이며 깨어있는 감사입니다.
부활을 준비하는 이 사순시가 우리 마음의 독기와 독소를 없애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화해는 일그러진 마음이 아닌 쪼개어서 나누어지는 맑은 마음 맑은 실천입니다. 맑은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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