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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2/17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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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2025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2월 17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2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4,1-15.25)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 오늘 복음
    (마르 8,11-13)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오늘 말씀 카드
    (창세 4,9)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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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 4,1-15.25
오늘 제1독서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마르 8,11-13
오늘 복음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2월 17일
박민준 가브리엘 신부

 

✚ 미사시작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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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인류의 첫 가정이 제2세대로 넘어오면서 죄의 모습은 더 복잡해지고 심각해집니다. 창세기의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과 아벨을 차별하셨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카인이 “옳게 행동하지 않[았음]”(창세 4,7)을 암시할 뿐입니다.

창세기에서 주어진 첫 질문 “너 어디 있느냐?”(3,9)는 이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9)라는 물음으로 발전합니다. 하느님의 물음이 보여 주는 발전 과정은 자신에게서 형제에게로 건너가는 자아의 확장을 암시합니다.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아우를 죽인 것을 부인하고 오히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 하고 되묻습니다. 아우와 ‘상관없음’을 선언하고 형제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서 폭력으로 억울하게 고통받고 존재를 부정당하면서 사라진 수많은 아벨들의 피가 울부짖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교회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예표되었고 구약에서 오묘하게 준비되었으며, “‘의인 아벨부터 마지막 뽑힌 사람까지’ 아담 이래의 모든 의인이 보편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모이게 될 것”(2항)이라고 말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는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시면서도 죄인의 하소연을 들어주시고, 폭력으로 아우를 죽인 그를 또 다른 폭력에서 지키시고자 표를 찍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 끝납니다. 우리는 각자가 형제자매를 ‘지키는 사람’임을 기억하면서 서로 돌보고 책임지는 사랑을 하며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는

“그때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들은 그리 좋은 말들이 아닙니다. ‘논쟁’, ‘시험’, ‘요구 이런 표현들인데 바리사이들이 흔히 하는 짓입니다.

이 대신 그러니까 논쟁 대신 담화 또는 나눔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험하지 않고 믿으면 얼마나 좋고, 믿지 못하더라도 시험 대신 알려고 애쓰고 질문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리사이들을 볼 때 더 안타까운 것은 표징을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랬다면 주님도 그들을 버려두고 떠나지 않고 표징을 보여주셨을지도 모르지요.

사실 우리가 겸손하고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주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표징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요청하지 않을 것이고, 감히 요청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하늘에서 표징이 너무도 필요할 때 표징을 주시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아주 겸손하게 청을 드릴 수 있는데 그것이 기도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내친김에 이런 묵상과 성찰도 합니다. 하느님께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에게도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면 얼마나 좋을까? 겸손은 사랑을 낳고 사랑을 초대합니다

겸손한 요청은 사랑의 응답을 부릅니다. 아기의 요청이 언제나 엄마의 사랑스러운 응답을 부르듯 겸손한 사람의 요청은 사람의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응답하게 합니다.

그리고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는 사람에게 갈등과 싸움이 없는 것은 덤입니다. ‘구’를 ‘청’으로 하나만 바꾸면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특히 바로 앞 장면에서는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그들이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이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그렇게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눈에는 모두 것이 기적이요, 신비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이 갈파한 대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대로, 그 무엇도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혹 우리가 그 사랑을 피해가고 거부해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8,12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된 
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제 마음을 열게 하소서.

도처에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도처에 흐르는 
당신의 사랑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 아니면 표징

제가 이번 주에 휴가이기 때문에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복음 묵상은 없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휴가 잘 다녀와서 주일에 뵙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마르 8,11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미 무수히 많은 기적과 치유, 죄인들을 품어주신 사랑으로 충분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더 확실한 것”을 원하고, “나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될 만한 기적”을 요구하는 마음속에는, 사실 “주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 불신”과 “자기 이기심”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요구에 탄식하시며, 곧장 다른 곳으로 떠나십니다(마르 8,13 참조). 이는, 이미 베풀어진 사랑을 외면하고 ‘더 큰 이득’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에서 멀어진다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불신과 이기심이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사례를 역사와 이야기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중엽, 오스트리아 빈의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 산모들의 산욕열을 막기 위해 “손을 씻자”고 호소했지만, 권위와 이익을 중시하던 동료 의사들에게 무시당한 채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부족해 보이고, 가난해 보이는” 제멜바이스의 호소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귀를 닫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 주어진 도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만 표징을 요구하는 태도가 낳은 파멸적 결과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미녀와 야수’ 이야기에서는 왕자가 겉모습만 보고 늙은 여인을 멸시했다가 야수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한 사람의 지극한 사랑이 이익과 편의를 좇는 태도 앞에서 외면당하고,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런 예들은 모두 “이미 드러난 사랑과 선의를 깎아내리고, 자신이 원하는 이익과 눈에 확 띄는 기적만을 고집하면” 스스로를 구할 길이 막힌다는 교훈을 전해줍니다.

반면, 외적인 표징보다도 “나를 위해 희생하고 사랑해 주는 마음”을 깨닫고 겸손히 받아들이는 이들은 놀라운 구원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실제 사례로, 닉 부이치치는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는 상태로 태어나 절망과 좌절 속에서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왜 하느님은 내 팔다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시는가?” 하는 원망에 시달렸지만, 어느 날 요한 복음 9장의 태생 소경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참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새 팔, 새 다리를 자라나게 해 주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고 받아들인 뒤, 더 이상 표징을 강요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장애를 통해 세상에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큰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닉 부이치치는 강연과 선교 활동을 통해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받은 사랑”을 바라본 결과, 절망에서 벗어나 오히려 다른 이들을 살리는 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주교에게서 은그릇과 은촛대를 훔쳐 달아났지만, 경찰에게 붙잡혀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주교는 장 발장을 비난하거나 처벌하기보다 오히려 더 많은 은촛대까지 내주며 “나는 당신을 믿는다”고 말해줍니다. 장 발장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돈이나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자신을 사람으로 여기고 사랑해 주는 손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 그는 도망치듯 살던 지난 삶을 청산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길로 나아갑니다. “사랑”이라는 표징은 이미 자신 곁에 있었는데, 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식은, 사랑의 표징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않는 이에게 “더 이상 너희에게 줄 표징이 없다”라는 선언입니다. 이미 내 곁에 주어진 사랑을 외면한 채, ‘그보다 더 큰 이익’을 요구하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닉 부이치치나 장 발장처럼, 그 희생과 사랑을 발견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구원과 성장의 길이 열립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짧은 이야기 하나가 이를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하느님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곧 작은 배가 오고, 또 큰 배가 오고, 마지막엔 헬리콥터까지 왔는데도, 그 사람은 “나는 하느님의 더 크고 놀라운 기적을 기다린다”고 말하며 모두 거절했습니다. 

끝내 익사한 뒤에 그는 하느님께 “왜 저를 구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항의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미 작은 배도, 큰 배도, 헬리콥터도 보냈는데 네가 다 물리치지 않았느냐?”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겸손히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사랑과 구원의 손길도 놓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선한 사람은 “나에게 베풀어진 희생과 사랑”을 먼저 바라보고, 악한 사람은 오직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만을 바라보다가 정작 자기 자신을 살려 줄 손길을 외면하게 됩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이기심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와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충분히 알아보고,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나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건네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구원의 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세차장에서 일하는 소년이 열심히 차를 닦으며 광을 내고 있었습니다. 차 주인이 나타나자, 소년은 “진짜 좋은 차를 타시네요. 선생님 차가 맞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차 주인은 “내 형이 선물로 내게 주었단다.”라고 대답하자, 소년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좋을까?”
 
차 주인은 이 아이가 차를 사주는 형이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저도 그런 형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기가 받지 못함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받으려고만 하면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욕심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줄 것에 집중하면 그런 마음은 금세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받으려고만 할 때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지만, 주려고 할 때는 스스로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에 대해 반성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받는 것에만 집중하는 욕심의 마음을 통해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주는 것에 집중할 때 가능합니다. 그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삶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지금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계속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받는 것만을 요구했던 그들이 과연 예수님을 알아봤을까요? 놀라운 표징을 직접 보고, 주님의 놀라운 말씀을 가까이서 들었음에도 믿지 못합니다. 주님을 통해서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만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받을 것만을 요구하다가는 나의 변화 대신에 욕심과 이기심만을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너무 오래 걸리니깐, 한 번 만에 잘 되려고 하지 말고. 가치 있는 일은 빨리 되는 게 아니니까 더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 황가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표징을 요구하다 사라지는 은총의 순간들입니다. 못난 우리들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표징을 먹고 자라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는 일상이라는 현존 속에서 자라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심장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욕심과 무례가 일상이라는 표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심어린 반성과 감사가 표징을 만들어냅니다.

감사에서 더 깊어지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늘 하루가 새롭게 펼쳐집니다. 삶의 표징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영원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표징의 완성은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과 일상을 벗어난 표징은 욕심이며 예수님과의 만남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함께하시는 일상이라는 표징이 보이고 자아가 무너지면 교만과 집착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으로 마음을 닦는 살아있는 감사의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감사도 진정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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