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2025년 2월 16일 연중 제6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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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6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예레 17,5-8)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제 2독서
(1코린 15,12.16-20)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17.20-2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6,20)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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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 17,5-8
오늘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1코린 15,12.16-20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루카 6,17.20-26
오늘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17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2월 16일
양정진 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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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참행복
오늘 복음은 이른바 평지 설교의 시작입니다. 이 본문에서 대조되는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은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습니다.
전반부의 행복 선언은 마태오 복음서 5장의 참행복 선언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을 향하여 직접 이인칭으로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불행 선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불행 선언에 근거하여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유함과 즐거움은 바랄 것이 못 되고 오직 내세에만 희망을 두라는 식의 해석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난과 슬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불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됩니다.
‘사목 헌장’은 “사회 질서와 그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여야 한다.”(26항)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선포하는 구원은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전인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아우릅니다.
행복과 불행의 궁극적인 기준은 바로 하느님 나라, 사람의 아들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오직 영원한 행복이신 하느님께만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합니다. 지금 배부르고 부유하고 웃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지 않기에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도 자기들이 가진 것을 나누면서 하느님을 찾는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현세에서 끝나는 가치들을 하느님 자리에 둘 때 참행복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오늘은 연중 제6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인 <예레미아서>에서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
이를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이처럼, 축복과 행복의 길은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행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삶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세속정신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행복선언은 현실을 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현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는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의 방향전환을 요청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축복은 첫 번째 축복, 곧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약함과 죄스러움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인정하는 이들입니다. 생명도, 건강도, 힘도, 돈도, 그 어떤 선이든 모두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행복해 하고, 감사하고, 나누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마지막 것,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에 대해서만 잠깐 머물러 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해주고 호의적으로 말해주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 하고,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비위맞추며 눈치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하늘을 보고 있지 않는 까닭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단순히 공동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단지 인간적인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손도손 재미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도, 그저 열심히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 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20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다 내려놓고
당신만을 차지할 것입니다.
굶주릴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도
마음을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쁠 것입니다.
진정 저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배척받고 모욕 받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은 사랑해서 고생하는 것
오늘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 선언은 좀처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니 말이 됩니까? 아무리 봐도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고픈 게 행복하다면 음식은 왜 먹어야 할까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러면 도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느냐면, 예수님의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라는 말씀대로 박해받고 모욕과 중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말씀은 ‘사랑’을 개입시키면 아주 잘 이해가 됩니다. 사랑하면 가난해지고, 굶주리게 되고,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해서 고생하는 게 행복’이란 뜻입니다. 100세를 넘기고도 활발한 활동을 하신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가 내린 행복론의 결론입니다.
‘어린 왕자’는 작은 자신의 별에 꽃이 한 송이 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어린 왕자는 그것을 위해서 가난해집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그 꽃을 보호하기 위해 쏟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이려고 배고파지고, 그것의 짜증을 다 받아내며 슬프고 겸손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꽃이 피어있는 자기 별을 떠납니다. 여행하던 중에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기 별에서 혼자 왕 노릇을 하는 사람,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손뼉 쳐 주기를 바라는 허풍쟁이, 세상 고통을 잊으려 온종일 술만 마시는 술꾼, 돈만 아는 사업가, 의미 없이 혼자 사는 별에서 일만 하는 가로등 켜는 사람, 지식을 뽐내는 지리학자 등입니다. 이들은 부자이고 배부르고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외로워 보입니다.
지구에 내려온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와 사막여우를 만나 우정을 싹틔웁니다. 사막여우는 관계를 위해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깊어질 때 그 노력이 무색할 정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별에 있는 자기를 괴롭혔던, 그 사랑스러운 꽃 한 송이를 다시 기억합니다. 어린 왕자는 비록 가난해지고, 배고프고, 멸시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참 행복은 그것을 쏟을 수 있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존재함임을 깨닫고 다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안다면 참행복은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난해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지위를 내려놓으시고 한 인간으로서 사시기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안젤로라는 의사 선생님은 학생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힘들어했습니다. 성령 안수 기도를 받는 중에 가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뚫어진 손과 찔린 가시관이 곧 자신 때문에 가난해진 예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은 저의 배를 불리시는 분이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싶었고 하느님이 저를 사랑하심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은 어쩔 수 없이 양식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배를 채워야 할 젖을 아기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 양식을 먹으며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이런 행복을 추구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셨고, 그 행복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배불리려면 배고파져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수많은 배를 곯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행복임을 알았기에 행복하셨습니다.
김희아 씨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희아 씨는 모반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지고 친구들에게 괴물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이 지우개가 되게 해 달라며 자기 얼굴이 까지도록 문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자신보다 더 슬피 우시는 예수님을. 그분이 나의 처지를 위해 울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우리를 덮어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믿게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순교자들은 이 세상의 지위를 버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멸시를 선택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부터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린아이에게 햄스터를 한 마리 선물해 줍니다. 그 햄스터는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정성을 다해 먹지를 주고 아프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햄스터의 평균 수명은 2~3년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이때 아이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는 “또 햄스터 키울 거니?”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절대 안 키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2년 지나면 또 키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아이가 햄스터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해 주어도 햄스터가 곧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열심히 행복하게 살게 해 줍니다.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만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행복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추적 60’분이란 프로그램에서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한 사제의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탄 한 학생이 건널목을 건너는 신부님을 치어 사망하게 했습니다. 교구에서는 신부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그 학생을 용서했을 것이라며 학생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신부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찾아낸 물건이라고는 낡은 라디오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통장에도 적은 돈이 있었지만, 그것은 안 받으려던 강의료를 억지로 받아서 나중에 학생들에게 한꺼번에 선물하려고 모아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당신을 위한 재산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매스컴에 보도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사제의 그런 가난한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왜일까요? 느닷없이 준비도 못 하고 돌아가셨는데도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베풀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행복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섭니다. 사랑해서 고생하는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 사랑 없이 편한 삶을 선택할 것인지.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
요즘은 많은 이가 현금보다 신용카드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현금의 가치는 없어진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현금도 그 가치는 변함없습니다. 여기에 만 원짜리 지폐가 있습니다. 이 지폐가 매우 더럽다면 어떨까요? 또 구겨져 있다면? 만 원의 가치가 아니라 9천 원의 가치가 될까요? 구겨지고 찢어지고 또 더러워도 똑같이 만 원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스스로 포기하고 좌절한다면, 구겨지고 찢어지고 또 더럽다면서 만 원 지폐를 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기 가치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만 원이 만 원인 것처럼, 나의 가치도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그 가치를 알아야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 원이 구천 원이라고 단정하지 않아야 만 원으로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자기 가치를 이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가치가 쓸모없을 리가 없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강조하신 것을 보면 ‘사랑’에 의해 나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해야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다 보면 자기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행복 선언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 또 사람의 아들 때문에 모욕과 중상을 당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불행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남에게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 의지하느냐, 세상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기준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모욕과 중상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과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니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래서 하늘 나라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과 사람들의 인정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잊게 됩니다. 하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가치는 하느님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기 가치를 부정하는 삶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자기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특히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 소크라테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참된 행복입니다. 우리 삶 안에 계신 하느님의 참된 행복을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알아주십니다.
우리의 불행을 아파하시며 우리의 불행을 행복으로 되돌려놓으시는 하느님의 행복입니다. 우리에게는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십니다.
울고 있는 우리의 슬픔 속에서도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시며 행복한 삶을 우리 삶 안에서 당신과 함께 시작하십니다. 행복하게 살아갈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모든 불행은 우리가 하느님을 떠난 교만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우리가 겪는 가난도 굶주림도 울음도 추방과 모욕과 중상도 행복의 여정일 수 있습니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참된 행복입니다. 불행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 참된 행복을 체험하는 행복한 주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우리 삶으로 기쁘게 받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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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8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18 |
25/02/17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17 |
25/02/15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2.15 |
25/02/14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14 |
25/02/13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13 |
25/02/12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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