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2025년 1월 23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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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히브 7,25―8,6)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한 번에 다 이루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3,7-12)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오늘 말씀 카드
(히브 7,25)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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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 7,25―8,6
오늘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한 번에 다 이루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25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8,1
지금 하는 말의 요점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대사제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2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3
모든 대사제는 예물과 제물을 바치도록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사제도 무엇인가 바칠 것이 있어야 합니다.
4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5
모세가 성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지시를 받은 대로, 그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 하느님께서 “자,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6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마르 3,7-12
오늘 복음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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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25년 1월 23일
최봉용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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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열광하는 군중이 아닌, 당신을 뒤따를 제자들을 바라시는 주님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그동안의 예수님의 구마와 치유 기적, 용서의 이야기를 요약해서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십니다. 그러자 가까이 갈릴래아 지역을 비롯하여 사방에서 큰 무리가 몰려옵니다. 남쪽으로는 유다와 이두매아 지역에서, 동쪽으로는 요르단 건너편에서, 그리고 북쪽으로는 티로와 시돈 근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무리를 지어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열광적으로 구하는 것은 치유이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앎)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봅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하고 소리 질렀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침묵하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특징인 ‘메시아 비밀’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다만 인지(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과 추종의 앎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열광하는 군중이 아닌, 당신을 뒤따를 제자들을 바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도 사제?
언젠가 한 번 얘기 드린 적이 있는데 무술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실은 이제 그 세계를 청산하고 세례받고 싶다며 찾아오신 분입니다.
얘기 중에 정신이 맑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욕심이 들어오게 되면 점을 칠 수가 없어서 욕심을 끊임없이 비워내는 수양을 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무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신무 곧 신내림을 받은 무당은 단골을 위해 굿을 할 때 먼저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을 해야 접신을 할 수 있고 접신(接神)의 표시로 작두까지 탈 수 있다고 합니다.
무당도 보통 때는 한 인간이고 가정이 있으며 그래서 욕망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비워내지 못하고 그래서 접신을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요.
사실 무당이 작두 타기 전에 강렬한 음악과 격렬한 춤을 추며 굿을 하는 것도 그런 음악과 춤을 통해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아무리 무술인이고 무당일지라도 이러해야 마땅한데 그런데 이번에 우리나라를 뒤집어놓은 사람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고, 무술을 자기들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삼았고 그래서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술인뿐 아니라 목사라는 인간도 한몫하고 있는데 다 자기들 욕망을 실현한다는 면에서 한통속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실 목사라고 할 수도 없는 욕망의 개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우리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우리의 대사제는 욕망의 개들과 당연히 다르십니다. 욕망의 개들은 우리를 자기들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삼음으로써 공멸케 하지만 우리 대사제는 당신을 통해 우릴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심으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신다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휩쓸리지 않는다는, 또는 욕망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런 우리의 대사제를 대신한다고 하는 저를 성찰하고 반성합니다. 나도 욕망의 개는 아닌지. 나는 진정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인도자이고 중개자인지.
사람들을 내 욕망의 도구로 삼지 않더라도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지 않고 내게로 오게 하는 사람은 아닌지.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여러분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주님의 왕직과 예언직과 사제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저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신에 대해 자문하고 반성해야겠습니다.
나도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요 인도자라는 인식이 있는지. 거룩하고 순결한 인도자이고 욕망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 중개자인지.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왜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실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이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요?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왜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실까요?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 말씀하실까요?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그것은 주 야훼께서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하심이었습니다.
대체 왜 이처럼 당신의 신원을 알리지 못하게 할까요?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곧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알고 바라고 믿고 있는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곧 자신이 온전히 비워지고서야, 자신을 온전히 사랑으로 내어주신 그분을 보고서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휘장’이 찢어지듯 찢어진 그분의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3,12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소서.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바다와 같은 주님: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은총을 주시면서도 군중과 거리를 두십니다. 군중들이 당신을 밀치는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으시려고 배를 한 척 마련하신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순종’을 배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은총을 받는 이가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면 은총이 독이 됩니다. 질서를 알게 하는 차원에서 은총을 받는 이에게 휘둘리면 안 됩니다.
한서진은 ‘SKY 캐슬’에서 사회적 압박과 개인적인 불안에 압도된 부모의 전형을 보여주며, 강예서에게 특히나 약한 어머니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도축장 옆에서 부산물을 팔며 등록금 내서 학교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딸 둘만 낳아 시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한 부잣집 가문 며느립니다. 그녀에게 공부 잘하는 예서는 그녀 자신이 그 가문에서 인정받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과도한 성공 욕구와 건강한 경계를 세우지 못하는 태도는 예서가 특권 의식과 공감 부족을 키우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이렇게 서진은 예서의 인격 형성보다 외형과 사회적 인정을 우선시합니다. 서진은 예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는 너를 위해 모든 걸 다 했다. 넌 꼭 성공해야 해.” 이는 성공이 행복과 가치의 기준이라고 믿는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며, 그녀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불안감을 예서에게 투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서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그녀의 잘못을 덮어주는 서진의 태도는 결과가 도덕성보다 중요하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서는 이를 내면화하고 어머니의 죄책감과 욕망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며,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악화됩니다. 서진이 예서의 이기적인 행동에 도전하거나 도덕적 지침을 제공하지 못한 것은 예서가 윤리적이지 않은 행동을 정당화하고, 성공이 모든 잘못을 용서받게 한다고 믿게 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서진이 예서의 왜곡된 가치관 형성에 자신의 책임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나타납니다. 강예서는 엄마의 유전자가 자신의 몸속에 있다는 것을 한탄합니다. 그러자 한서진은 고백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니? 널 행복하게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들어버렸구나.” 이 고백은 어머니로서의 그녀의 약점—방임과 잘못된 우선순위—이 예서의 특권 의식과 도덕적 실명을 부채질했음을 강조합니다.
이 사례는 부모와 교육자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경계를 설정하고, 자녀의 성취보다 인격을 우선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하더라도 관계가 깨지고 자녀의 성격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겸손을 가르쳤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녀의 꿈에 이용당한 엄마는 그 많은 고생에도 자신을 원망하는 딸만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자녀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부모란 자녀가 부모를 존중할 수 없게 키운 부모입니다. 자녀가 나빠지는 이유는 불안과 교만 때문입니다. 불안은 다정함으로, 교만은 단호함으로 꺾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정하며 동시에 단호할 수 있을까요?
유튜브에 ‘전 세계 화제가 된 리트리버의 새끼 훈육법’이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8주 된 강아지들이 한 방에 모여있습니다. 잠시 후, 어미견 로잘리가 들어옵니다. 강아지들은 어미를 향해 달려듭니다.
하지만 어미는 오늘 아이들에게 ‘배려하는 것’을 가르쳐줄 참입니다. 젖을 떼야 할 때인 것입니다. 어미는 으르렁대며 단호하게 아이들을 떼어냅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겁을 먹습니다. 이제 어미는 새끼들을 다시 핥아줍니다. 그리고 훈육은 끝났습니다. 이것을 보면 느껴지는 것은 ‘다정하지만, 단호하다.’입니다.
자연 안에서 이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바다’일 것입니다. 바다는 다정합니다. 해변에서 놀도록 얕은 파도를 보내주고, 배가 고프면 맛보라고 맛있는 물고기도 줍니다. 그러나 물고기를 새끼까지 깡그리 잡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바다 생태계가 파괴되면 지구 온도 조절이 안 돼서 인간도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바다는 단호할 때도 있습니다. 커다란 파도와 해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만듭니다.
무한한 보물을 가지고 언제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만, 인간에 의해 휘둘리지 않기 위해 단호할 땐 단호해집니다. 인간은 바다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고 그래서 바닷사람들은 바다에 나가기 전 각자가 믿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바다는 우리에게 말하는듯합니다.
“어, 와서 놀아! 얼마든지 내어줄게. 근데 까불면 죽는다~!”
하느님도 우리 안에서 이와 같으십니다. 무한한 바다와 같은 사랑을 지니셨지만, 동시에 인간과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이는 인간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바다에 빠지면 살 수 없는 것처럼, 바다를 무시하지 않게 해야 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많은 은총을 주시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런 교만이 생기면 손해는 인간이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과 거리를 두시는 것입니다.
‘이빨 보이던 댕댕이가 한순간 얌전해진 까닭’이라는 유튜브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발 닦는 것을 싫어하는 댕댕이는 주인이 발을 닦아줄 때 으르렁거립니다. 주인은 몇 번을 참아주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립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조용해지고 심지어 웃는 표정까지 짓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개에게 계속 은혜만 주면 그 은혜가 개를 망칠 뿐입니다. 다정함과 함께 단호함은 꼭 필요합니다.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이것이 은총을 주는 이의 자세입니다. 사제가 그래야 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그래야 합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자기 안에 바다를 품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며 다정하지 않을 수 없고 단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이웃을 대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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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귀찮고 힘들어도 하자!
“어휴~ 귀찮아!!”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청소, 설거지…. 또 있습니다. 몸이 피곤한데 어디를 가야 하고, 원하지 않는 만남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못할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냥 귀찮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 귀찮음을 그냥 인정하고 하지 않으면 후회도 같이 오기도 합니다.
귀찮다고 청소하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됩니다. 귀찮다고 친구의 약속을 뒤로 미룬다면 친구와의 간격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기도를 귀찮다고 하지 않으면 어떨까요? 주님과의 간격이 멀어지면서 후회하게 됩니다. 따라서 귀찮다는 생각이 들 때, 하나의 단어를 포함해 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말이지요.
“어휴~ 귀찮아!!”, “하자!!”
“어휴~ 귀찮아!!”라는 말 다음에 “하지 말자.”, “그만두자.”라는 말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좋아하는 일만 한다고 과연 행복할까요? 자기 삶 안에 좋아하는 일보다 싫은 일이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하기 싫은 일, 귀찮은 일에 “하자”라는 말을 붙여서 행동할 때, 자기의 변화와 함께 좋아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 않을 때는 그냥 하기 싫은 일, 귀찮은 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어휴~ 귀찮아!! 하자!!”라는 말로 하느님의 뜻에 함께할 가능성은 훨씬 커집니다. 하느님과의 간격이 좁아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또 더러운 영을 쫓아낸다는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 전역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몰려듭니다. 그만큼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구원을 보게 되었고,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끝까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기 생명까지도 내어놓습니다. 하지만 함께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또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도 그러했습니다. 병의 치유를 위해, 자기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단순히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기 위해 그 자리를 왔던 사람은 믿음이 없기에 진정으로 주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옆에 주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때로는 귀찮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한다면, 가장 커다란 선물인 구원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또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알아야 주님과 제대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귀찮고 힘들어도 우리는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자!!”라고 말이지요.
오늘의 명언
감사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인생에서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에 집중하는 법을 배운다
- 에이미 밴더빌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사람들의 뜻과 하느님의 뜻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가시는 구원의 길입니다. 말을 앞세워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중들 위에 군림하길 결코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삶의 건강성은 떠벌리는 수많은 말들이 아니라 내적으로 깨어나는 건강성의 회복입니다.
공허한 구호나 말들은 사라지지만 깨어나는 우리의 믿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공허한 말들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할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자극적인 기적에만 우리가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참 뜻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용기있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실천할 수 있는 기도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본래의 뜻을 가리는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절대절명의 보편적 사명을 우리의 혀(舌)가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혀도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함께 머물러야 삶이 보이고 겸손해집니다.
마음의 무게가 믿음이며 믿음의 무게가 우리의 실천입니다. 우리의 말이 마음을 앞질러 가지 않는 것이 신앙의 놀라운 기적입니다. 무의미하며 무가치한 말들을 경계하는 기도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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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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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5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25 |
25/01/24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24 |
25/01/22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22 |
25/01/21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21 |
25/01/20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20 |
25/01/19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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