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
주님,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2024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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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4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미카 5,1-4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 제 2독서
(히브 10,5-10)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39-45)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오늘 말씀 카드
(히브 10,9)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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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미카 5,1-4ㄱ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히브 10,5-10
오늘 제2독서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형제 여러분,
5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보소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9-45
오늘 복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2월 22일
김다솔 야고보 신부
✚ 서봉구 형제순교기념관 소개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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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절망스러운 상황일수록 성모님의 본보기 배우기
오늘 복음의 첫 문장(루카 1,39)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무렵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산악 지방에 있는 유다의 한 고을로 갔다.’ 태중에 계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시면서 성모님께서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사벳에게 ‘서둘러’ 가십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다녀간 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명하셨지만, 오해와 근거 없이 떠도는 이야기들로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께서는 ‘일어나셨습니다.’ 시선을 아래로, 문제가 있는 쪽으로 향하신 게 아니라, 위로, 하느님께서 계신 쪽으로 향하십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지 생각하십니다”(프란치스코, 대림 제4주일 삼종 기도, 2021.12.19.). 출산을 앞둔 엘리사벳을 도우시려고 임신하신 몸으로 약 15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서둘러’ 가십니다.
‘일어나다’, ‘서둘러 가다’. 성모님의 이 행동으로 태중에 있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행복 선언을 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이 행복 선언은 많은 오해와 어려움 속에 계시던 성모님의 입에서 ‘마니피캇’(마리아의 노래)이라는 하느님을 향한 기쁨의 찬미가가 터져 나오게 합니다(1,46-55 참조).
절망스러운 상황일수록 성모님의 본보기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오히려 이웃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는 신앙인이 됩시다. 우리는 이때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마태 25,40)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며, 그분께서 마련하신 특별한 은총과 위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원치 않는 것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성탄이 가까이 오면 전례는 주님의 오심을 직접적으로 준비하고 맞이한 인물들에 대해 얘기합니다.
주님 오실 길을 앞서 닦아야 할 세례자 요한의 부모에 관한 얘기와 주님의 부모가 될 요셉과 마리아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대림 4주일의 전례는 그중에서도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상봉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두 분은 친척 간인데 하나는 늙은이이고 하나는 애송이를 갓 벗어난 아가씨입니다. 너무나 대조되는 두 분의 공통점은 애를 낳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고 그런데 지금 애를 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분의 상봉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할망구가 뒤늦게 임신하여 벌써 여섯 달이 되었고 처녀 마리아가 찾아왔을 땐 이미 배가 많이 불러 배를 내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마리아의 문안을 받는 엘리사벳이 인간적으론 많이 부끄러웠을 겁니다. 늙은이가 주책바가지이지 애를 배고 있으니 말입니다.
옛날에는 많이 있었던 일이지만 어머니가 며느리와 같이 애를 낳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그때 시어머니는 너무 부끄러워 애를 제대로 건사치 않아 며느리가 도련님 젖까지 먹이곤 하였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때 우리는 뭐가 잘 못 돼서, 또는 내가 무엇을 잘 못 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어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하고 생명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렇게 봐야 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인간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임신을 한 분들이고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임신을 한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 분의 임신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에 의한 임신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인간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바치는 성모송을 기쁨에 넘쳐 부르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이라고 성모를 칭송합니다.
그러나 이런 칭송은 성모 마리아께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벳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분이고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도 그렇게 믿고 받아들인 분들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싫고 두렵지만 하느님 때문에 받아들이면 성령이 임하고 그 성령으로 마리아처럼 주님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의 뜻은 믿고 행할 때 실현된다.
대림 제4주일입니다. 성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오실 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며, <복음>에서는 ‘오시는 분’이 어떻게 오시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오실 분’에 대한 네 가지 정보를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분은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미카 5,1)에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오신다는 사실이요, 둘째는 “해산하는 여인의 아기”(미카 5,2)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셋째는 “목자로 나서리라.”(미카 5,3)는 것, 곧 그분께서 백성을 인도하고 먹여주고 보호해주고 안전하게 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넷째는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 5,4)는 것, 곧 그분께서는 평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평화이신 당신을 건네 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시는 분’이 짐승의 피로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놓으실 ‘대제사장’으로 오실 것이요, 그것은 ‘당신의 뜻’이며 바로 그 뜻을 이루러 왔다(히브 10,7)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2독서>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라는 말씀의 실현을 보여줍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문장에 다 같이 들어있는 말은 “이루다”는 단어인데, 앞 문장에서는 능동형으로, 뒤 문장에서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오시는 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안에서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며, 우리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이 당신의 뜻에 따라 일하시도록 수락하고 승복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주인이 되시어 일하시도록 허용해드리는 일이요,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극치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고 이해하고 명확하게 알고서 응답하려 합니다. 마치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알기만 한다면 그것에 응답할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마음이 불신에 가려졌거나, 그 뜻을 알아야 하는 자신을 앞세우거나, 자신이 그 뜻을 이루고 싶어서 “하느님의 뜻”의 불확실성을 탓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뜻”은 본질적으로 계시되어 있지만, 동시에 신비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한 뜻’(마태11,26;루카10,21)을 지니신 주님의 사랑과 호의에 의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마더 데레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영성 안내자로 살아가고 있는 존 캐버너가 자신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캘커타에 봉사활동 하러 갔을 때에, 수녀님께서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존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 되물었습니다.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존이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느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은 우리가 이끌려가게 될 곳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 목적지를 알려주거나 지도를 마련해 주지도 않으면서 “떠나라”라고 하셨고, 그는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지만 신뢰로 믿음의 길을 갔었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믿음의 길은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의 동행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선한 뜻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 모범을 보여주었던 샤를르 푸고의 기도를 함께 드려 봅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제 영혼을 바칩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알고 이해하기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행할 때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밝혀주고 있는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뜻이나 바람을 이루어진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45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저를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가장 완전한 자존감 : 낳음
엘리사벳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을 믿으신 것을 축복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단순히 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내적 자존감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낳으실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이것이 행복의 원인입니다. 결국 자존감의 하락은 ‘나는 누구도 낳을 수 없는 존재야!’로 측정되고 자존감의 상승은 ‘나는 누구도 낳을 수 있는 존재야!’로 귀결됩니다.
제가 만났던 한 자매는 7년간 아이를 갖지 못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소화가 하도 안 되어 매일 선식만을 먹어야 했습니다. 아기를 갖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김상운 방송인이 쓴 책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한 여인은 아기를 낳은 후 누군가 아기를 훔쳐 갈까 두려워 아파트 자물쇠를 바꾸고 창문에 창살을 치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어머니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존감이 없으면 자녀도 낳거나 키울 수 없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행복과 자존감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복권에 당첨되거나 장애를 입는 극단적인 사건이 있더라도, 몇 달 후 사람들은 본래의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외부 조건보다 내면의 믿음과 자존감이 행복의 근본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자존감과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복의 예가 여러 번 나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사라와 사무엘기 상권 1장에서 한나입니다. 이들처럼 누군가를 ‘낳을 수 있다’라는 믿음은 가장 강력한 자존감을 형성합니다. 루카 복음 1장에서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를 축복하며 “제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루카 1,43)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모두 자녀를 낳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했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자존감을 잃은 것과 상반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잃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극심한 고난 속에서 자라며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10년간의 고된 노동에 지쳐 탈출하여 자신을 거두어주었던 집을 찾았습니다. 동네는 알았지만, 정확한 집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나환자가 사는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보기에 너무나 무서운 나환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는 친절하게도 집을 찾아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였고 극단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환자들에게로 가시며 “저들도 사는데 넌 왜 못 사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자존감이 되었습니다. 이 자존감이 ‘나도 살 수 있고, 나도 결혼할 수 있고, 나도 자녀를 낳아 키울 수 있다!’라는 자존감을 준 것이고 이 자존감이 없었다면 저희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존감을 얻는 시간이 바로 ‘기도’입니다. 특별히 묵상기도입니다. 아무리 내 주위에 좋은 모범이 있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나에게 이해되지 않으면 힘이 되지 못합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이러한 자존감 회복의 강력한 사례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죄와 아픔을 마주하며 스스로를 용서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는 자신이 한 여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임을 느끼며 자존감을 회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자 주인공 또한 어머니에 대한 깊은 상처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새로운 신뢰와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는 자신이 또한 한 남자를 변화시킬 힘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람을 낳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갖게 한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새로운 생명을 낳는 기쁨은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가장 큰 축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완전한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수난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결국엔 행복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행복을 주는 믿음은 무엇을 낳을 수 있느냐는 믿음에 달렸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나요?
강원도 춘천의 한 거리에서 맥주 2,000병을 싣고 가던 트럭의 적재함이 열리면서 순식간에 길이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쏟아지며 깨진 맥주병 때문에 자칫 2차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이 상황은 소동이 일어난 지 30분 만에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해결의 시작은 사고를 우연히 지켜보던 시민들의 자발적인 청소였고, 인근 가게 주인까지 빗자루를 들고 나와 동참했습니다. 이렇게 30분 동안의 청소가 모든 상황을 종결했습니다. 이를 기사화한 2022년 6월 30일 자 중앙일보 기사는 이렇게 마지막 문장을 남겼습니다.
“사태 수습을 도운 시민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각자 갈 길을 떠났다.”
이것이 함께 사는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 이익이 먼저라고 생각하면서 사랑 실천에 무관심으로 대응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이 세상이 더 각박한 세상이 되어가면서 힘든 세상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우리 모두 이 사랑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기 갈 길을 떠나야 합니다. 보상을 세상이 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분명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임신한 두 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 모두 임신으로 인해 큰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했다는 사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어려움과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상태에서 두 분이 만납니다.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는 ‘아인카림’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계셨던 나자렛에서 150km나 떨어진 먼 고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먼 거리까지 찾아온 성모님에게 엘리사벳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도 엘리사벳에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큰 힘이 되면서, 지금의 어려움이 피해야 할 일이 아닌 오히려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이었음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인정받으려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혼자서는 하느님의 일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 힘이 되어 주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와 함께 이루어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대림초의 모든 불을 밝히는 대림 제4주일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나요?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주님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사람은 자기가 늘 불행하다고 자탄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행복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이다.
- 도스토옙스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겨울의 여정 안에 우리의 성탄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행복이 절실히 필요한 요즘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의 삶 앞에 임박한 하느님의 성탄입니다. 성탄의 길은 마리아의 길입니다.
마리아의 길은 말씀의 길입니다. 말씀의 길은 정신의 길입니다. 정신의 길은 뜻을 따르는 뜻의 길입니다. 뜻의 길은 행복의 길입니다.
행복의 길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함께하는 협력의 길입니다. 협력의 길은 진심어린 기도의 길입니다. 기도의 길은 참된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의 길은 사람이 되는 성탄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말씀으로 희망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성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성탄은 말씀과 함께 이루어지고야 말 구원의 뜨거운 시작입니다. 그 시작을 간절히 기다리는 뜻깊은 대림 제4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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