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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2/23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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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나 용맹한 하느님이라 불리리니,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으리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강생하실 날이 가까웠으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이 되신 말씀 저희와 함께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부당한 종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2024년 12월 23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2월 23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2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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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말라 3,1-4.23-24
오늘 제1독서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민족들의 임금님,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흙으로 빚으신 사람을 구원하소서.

 

 

루카 1,57-66
오늘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2월 23일
김도연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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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자녀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큰 유산은 없다.

루카 복음서는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게 된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1,66). 

어쩌면 아기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이 하느님께서 그를 보살펴 주고 계신 일로 받아들일 만큼 대단한 일인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 장면을 보면,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1,63)이라고 쓴 것은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1,13)라는 주님의 천사의 말에 온전히 순종한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이 믿음 안에서 자랄 것입니다. 그 아기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부모에게 물려받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법도 그분을 사랑하는 법도 배울 것입니다. ‘거룩한 침묵’과 ‘온전히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무르는 시간’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도 배울 것입니다(12월 19일 ‘오늘의 묵상’ 참고). 

실제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거룩한 침묵과 온전히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장소인 ‘광야’에서 지냅니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도록 태어난 아기, 세례자 요한을 보살폈던 주님의 손길은 이미 그의 부모 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길’이 자녀를 특별하게 돌볼 수 있게 협력하는 부모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자녀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큰 유산은 없습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비록 고달픈 인생이 될지라도

오늘 복음은 독서 말라키 예언서의 예언 곧 ‘보라, 그가 온다.’라는 예언대로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는 얘기이고,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지어주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 얘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즈카르야는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합니다. 곧 아기의 이름을 하느님의 지시대로 지어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식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결과 즈카르야는 막혔던 말문이 열리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생각해보면 즈카르야의 일생은 오늘을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어찌 보면 즈카르야는 자기 뜻대로 된 것이 없는 일생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낳기 위해 그는 일생 자식 없이 불행하게 살아왔고, 겨우 애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자기 자녀가 아닌 주님의 자녀입니다.

이런 일생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래도 말년에 아들을 낳았으니 해피엔드라 하고, 해피엔드이니 행복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으로 보면 죽 쒀서 개 준 꼴이 됐으니 결코 행복하였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인생이란 본래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 신앙인이라면 즈카르야의 일생은 잘 되고 행복한 일생이었으며 우리도 이것을 본받아야겠지요.

내 자식이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고, 더 나아가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께서 쓰고자 하시는 대로 되길 바라야 하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불과 잿물처럼 쓰고자 하십니다. 남을 단련하고 정련하는 역할입니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이런 인생 너무도 고달픈 인생입니다. 나를 단련하고 정련하는 것만도 고달픈데 남까지 단련하고 정련해야 하니. 그렇잖습니까?

불과 잿물을 누가 좋아합니까? 이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 또 누가 좋아합니까? 그래도 세례자 요한과 즈카르야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면서 좋아서 되고, 좋아서 하는, 그런 사람이 우리가 아니고, 그런 인생이 우리 인생이 아님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복음의 기쁨] 273항 )

그리고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66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만이 오로지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것’ 아닌 은총의 다른 통로는 없다.

어느 날 파우스티나 성녀는 어떤 영혼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즉시 주님께 9일 기도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미사 시간에 양쪽 다리에 고행용 쇠사슬을 착용하고 기도와 함께 고행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고해성사 때가 되어 영적 지도자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보러 갔습니다. 영적 지도자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고행을 말하려고 했고 영적 지도자도 그것을 당연히 허락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 신부님은 허락도 없이 그런 고행을 하는 것에 매우 놀라고 건강 때문이라도 그런 고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행하는 대신 예수님께서 왜 당신을 낮추셔서 세례를 받으셨는지 묵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녀에게는 하느님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은 고행이 아니라 즐거움이었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자기 생각을 바꾸고 고해신부님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희생 같지도 않은 것으로 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수녀님은 고해신부의 말에 순종하여 고행용 쇠사슬을 풀고 묵상하기 위해 성당에 앉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은총을 주라고 청한 그 영혼에 그 은총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네가 스스로 선택한 고행 때문에 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가 나의 대리자에게 완전히 순명했기 때문에, 네가 전구하고 자비를 청한 그 영혼에 은총을 주었다. 네가 너 자신의 의지를 접을 때에 나의 은총이 네 안에서 군림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예수님은 파우스티나에게 노트 한쪽 페이지에 엑스 표를 하고 그 위에 “오늘부터 나 자신의 뜻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쓰게 하시고, 그 뒷면에는 “오늘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고 모든 것에 있어 나는 하느님의 의지를 행한다.”라고 쓰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더 많이 포기하는 이에게 더 주십니다. 자녀가 스스로 나가서 돈을 벌어오겠다고 나간다면 부모가 주는 것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부모에게만 의지할 수 있는 자녀가 된다면 부모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랬더니 입이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은총은 순종을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제는 즈카르야도 파우스티나 성녀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자신의 뜻을 접는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인데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저는 논문을 쓰면서 이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학생의 생각이 교수님의 생각과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논문은 교수님이 통과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 교수님이 바꾸라고 하는 것은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공부를 하여 머리가 커질 대로 커진 저로서는 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박사 논문 첫째 장을 제출하고는 교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걱정하여 음식을 먹고 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꾸라면 다 바꾸어주겠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는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포기하는 만큼 은총이 찾아왔습니다. 

신학생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수 신부님이 가르치는 것은 거의 이단 교리에 가까웠습니다. 동기와 저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정통 교리를 써야 할 것인지, 교수가 가르친 것을 써야 하는지. 그 친구는 자신의 소신대로 썼고 아주 낮은 점수를 받았고 저는 교수가 가르친 것을 잘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저에겐 후한 점수를 주셨습니다. 물론 그 친구의 용기가 대단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수를 받으려고 하면서 그 점수를 주는 대상을 무시해서는 안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르투르다 성녀는 예수님께서 자신 기도를 너무 잘 들어주셔서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했다.”

내 뜻을 많이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그 은총을 받기 위해 그분의 뜻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분과 그분이 파견한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려는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겸손 안에서만 하느님의 일이 완성된다.

미사 때 강론하면서 또 외부에 나가 강의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말하기가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사제로 25년 이상을 살았으니, 이제는 능숙할 때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여전히 어렵고 준비할 것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어느 신부가 요즘 젊은 신부들의 강론이 형편없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 내용도 부족하고 어디선가 짜깁기 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이 신부의 말을 들으면서 곧바로 든 생각은 ‘자기는 강론을 잘한다고 생각하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신부에 대한 신자들의 강론에 대한 평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냥 평범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기는 제대로 하고 있고, 다른 신부가 강론을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만이 가득합니다. 운전자의 90%는 자기 운전 솜씨가 평균보다 낫다고 믿으며, 대학교수의 94%가 자기 강의 실력이 평균보다 높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의 90%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하는 것 역시 스스로 과대 포장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기 부족함을 볼 수 있어야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라는 생각만 있으면, 안 좋은 결과에 남 탓, 환경 탓만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을 기억한다면 먼저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겸손 안에서만 하느님의 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탄생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일을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되고 말지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에서 혀가 풀리고 말을 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관습대로 아기 이름을 정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뜻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일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겸손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나만을 높이고, 주님을 오히려 낮추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만사에 너그러움이 따르면 그 복이 저절로 두터워진다.

- 공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희망의 연대가 다시 시작 될 것입니다. 절박한 기도의 삶이 되는 탄생이 있습니다. 우리 곁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기억해야 할 탄생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하는 탄생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탄생이 먼저 길을 냅니다. 탄생의 길은 기쁨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우리의 거처에서 일어나고 만들어지는 탄생의 멋진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못하실 것이 없으십니다. 

실낱같은 희망도 저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돌아보면 언제나 그 뒤엔 하느님이 계십니다. 애타게 찾아야 할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마음 위에 마음을 얹힙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탄생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창조의 심장 창조의 말씀을 믿습니다. 온 삶을 던져 하느님을 향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탄생의 얼을 다시 만나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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