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땅끝까지 전하여라. 보라, 우리 구세주 오시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로이 들어주시고 저희를 찾아오시는 성자의 은총으로 저희 마음의 어둠을 비추어 주소서.
2024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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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민수 24,2-7.15-17)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는다. - 오늘 복음
(마태 21,23-27)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 오늘 말씀 카드
(시편 25,4)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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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 24,2-7.15-17
오늘 제1독서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는다.
그 무렵
2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4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5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6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7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그들의 임금은 아각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왕국은 위세를 떨치리라.”
15
그러고 나서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16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여 주시고 당신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마태 21,23-27
오늘 복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2월 16일
조기영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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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만일 신앙생활이 메말라 가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 체험이 사라지고 있다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의논합니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마태 21,25-26). 이
들의 마음 안에는 ‘다른 이들에게 받게 되는 평가’와 ‘체면’에 대한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르겠소”(21,27).
하느님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면 하느님 앞에서 진실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죄를 고백하면 신부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생각 때문에 용서를 청해야 할 때 “모르겠소.”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하느님을 찾아야 할 순간에도, 그분의 말씀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도, 한사코 “모르겠소.”라고 대답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1,27).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모르겠소.”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다.
만일 신앙생활이 메말라 가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 체험이 사라지고 있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의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처럼 다른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적인 식별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발상(發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선한 발상이라는 말도 있고,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도 있듯 어떤 생각이 생겨나온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엇이 있다면 생겨나온 것입니다. 발생(發生)이나 발출(發出)과 같은 뜻입니다.
관건은 자가발생이냐 아니냐입니다. 자체 발광처럼 자체적으로 생겨난 것도 있고, 자체적으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고 외부에서 오는 것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요한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사람인지 세속적인 사람인지 물으시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우리도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이 돼야겠지요.
가장 근본적으로는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온 것인지, 일상적으로는 지금 떠오른 생각이 어디서 온 것인지, 내가 지금 판단하고 있는데 이 판단은 어디서 온 것인지, 내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어디서 온 것인지, 심지어 지금 나의 사랑은 어디서 온 것인지 물어야 하고, 하느님에게서 온 건지 내게서 온 건지 묻는 사람이 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물은 다음에는 그것들이 영적인지 세속적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겠지요. 앞에서 심지어 사랑조차도 어디서 온 것인지 물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의 사랑도 어디서 온 사랑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일 중요시하고 제일 소유하고 싶은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에서 비롯된 소유하려는 사랑은 당연히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지요.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에서 굴리에모 아빠스는 성령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 안에 부어 주신 사랑의 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반면에 최고선이시고 궁극선이신 당신이 지니신 사랑은 선 자체이신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태초에 만물이 창조될 때부터 물위에서 즉 인간 자녀들의 출렁이는 마음 위에서 휘돌고 계시면서, 모든 이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모든 것을 당신께로 이끄시며, 그들에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시며 해로운 것들을 멀리하시고 유익한 것을 대주시며 우리를 하느님과 하느님을 우리와 일치시키십니다.
아무튼 우리는 나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일을 할 때도 심지어 사랑할 때도 늘 영적인 식별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사랑에서 왔는지. 그것이 하느님 사랑을 지향하는지, 공동선을 지향하고 이웃 사랑을 지향하는지 식별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기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 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1,23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타인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하기보다
가려진 제 위선의 무게임을
재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을
올려놓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일상의 거룩함이 기적보다 큰 증거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관한 논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이 만약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그가 증언한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할 것이고, 땅(사람)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하늘에서 보낸 사람으로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 같아서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그대로 나도 너희를 대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몰랐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똑똑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거룩함을 못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기적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하시는 예수님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알아보지 않으려 한 것으로 자기 양심을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정치인과 언론이 처음엔 윤석열 정권을 적극적으로 동조하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가 전에는 없었을까요? 일반 국민도 그가 말하고 토론하는 것 안에서 그 사람이 정상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치 빠른 기자들과 정치인들이 그것을 못 알아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일상의 삶은 마지막 큰 사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거짓말을 하는 이는 결국 다른 거짓말로 자신을 다시 끌어올릴 것입니다. 아랫글은 이에 관하여 한 유튜브 구독자가 어떤 동영상에 올린 댓글입니다.
“그냥 일반인이 봐도 참모한테 반말에 욕, 일반시민한테도 반말, 손에 왕자 적고 토론, 기차 좌석에 구두 신은 채로 발 올린 거 등등. 그냥 봐도 딱 토론 수준만 봐도 ‘저놈이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하겠네’ 생각하고 당선되었을 때 친구들한테 ‘야 우리나라 경제 정치는 망했다.’라고 했는데 언론인이나 정치인처럼 눈치 빠른 놈들이 모른다고? 천만에 다 알고 있었지. 그냥 저놈 대통령 만들고 지들 빼먹을 거 생각한 게 맞지.”(@jjaryno77)
그래서 일상에서 풍기는 것으로 그 사람을 못 알아본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잘못된 의도로 눈이 먼 것일 뿐입니다. 기적을 요구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거짓말 시키는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말 바꾸기를 할 뿐 언제든 자기 생존을 위해 또 거짓말로 현실을 왜곡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기적보다 우리 작은 일상이 신앙의 증거입니다. 이 증거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기적만 청한다면 이는 그저 믿기를 원치 않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990년대 알제리의 작은 마을 티브히린, 이곳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지역 무슬림 공동체와 함께 조용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수도자들은 시편을 노래하며 기도했고, 낮에는 밭을 일구고, 의사를 겸한 뤽 수사가 주민들을 치료하며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뤽 수사는 환자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단순히 환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이들의 삶은 기적 없이도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를 휩쓸던 내전과 이슬람 극단주의의 폭력은 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이 마을에 찾아와 수도자들에게 협박을 가한 날, 크리스티앙 수도원장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극단주의자들을 설득하여 마을을 떠나게 했지만, 그 위협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위험 속에서도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떠날지, 남아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갈등했습니다. 한 수도자는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잃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일까요?”
크리스티앙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떠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와 공동체 회의를 통해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선택은 단순히 고집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수도자들은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장면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부르심을 회상하며 침묵 속에서 와인과 빵을 나누었습니다. 뤽 수사는 눈물을 머금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 순간이 하느님의 평화로 가득 찬 순간임을 믿습니다.”
1996년 3월, 수도자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두 달 후, 그들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잘린 머리만이 남겨졌습니다. 영화는 수도자들이 눈 덮인 산속으로 호위되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들의 침묵은 말보다 강렬하게 그들의 믿음과 평화를 증거합니다.
수도자들이 떠난 후, 그들과 함께했던 마을 주민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주민들은 이들을 “우리의 형제들이자 하느님의 사람들”로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을 자신들의 삶에 새겼습니다. 한 주민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룩한 삶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강력한 증거임을 보여줍니다. 수도자들의 기적 없는 단순한 삶, 그리고 사랑과 희생의 선택은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증거하며, 그들의 피로 물든 땅은 새로운 화해와 평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수도자들을 순교자로 공식 인정했으며, 다른 알제리 순교자들과 함께 알제리 오랑에서 시복되었습니다. 이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과 신앙이 그리스도교적 삶의 모범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일상의 삶으로 그 일을 시킨 누군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 안에 뱀이 있고 사탄의 노예임을 증거하는 것이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은 그 일을 시킨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기적이 아닌 일상의 작은 표양으로 표현되어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 주인을 버리기 싫어서 보지 못하는 척하는 것뿐입니다. 마지막 때에 증거가 없었다고 하지 맙시다. 모든 사람이 증거가 없어도 믿을 수 있다면 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세상에서 가장 비싼 피자 가격은 얼마일까요? 보통 2~3만 원 정도니까, 아무리 비싸도 10만 원은 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격인 피자가 있습니다. 2010년 5월 22일에 프로그래머 라스줄로 핸예츠가 1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산 것입니다. 이것이 비트코인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상거래였습니다. 2024년 12월 현재, 1비트코인은 1억 4천5백만 원입니다. 그렇다면 프로그래머 핸예츠가 샀던 피자의 가격은 1조 원이 넘습니다. 피자 한 판에 7천억 원이 넘는다고 하니 정말 비싼 피자가 아닐까요?
비트코인의 가치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미래의 일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인지를 조금만 미래로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추억이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렸을 때는 그 시간을 소중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주님의 가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것들을 더 윗자리에 놓고 있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주님이 먼저일까요? 지금 당장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자기에게 어떤 가치가 가장 필요한 가치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권한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즉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소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철부지들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입니다.
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권한, 자격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권한과 자격만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권한, 자격이 아닌, 이 세상 안에서의 권한과 자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라는 질문에, “모르겠소.”라고 답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믿지 않았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하늘에서 온 사람으로 믿고 있었던 군중들의 질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만을 따지게 되면, 당연히 주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가치가 자기에게 어떤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묵상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가치를 알고 이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마음속에 스스로가 정해놓은 것뿐이다.
- 나폴레온 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기다림은 기다리는 사람의 몫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가 기다리는 분을 더 잘 알게 되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세례를 분명 사랑하십니다.
세례를 통해 세례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근원을 묻는다는 것은 사랑을 묻는 체험입니다. 마음을 바로 세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례로 더 분명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결국 세례와 믿음은 하나라는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깨닫습니다.
세례를 묻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물음을 던지는 일입니다. 세례와 함께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의 근원을 지금 그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십니다.
가장 좋은 맑은 선물인 세례로 성탄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사랑하고 따르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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