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주님의 성탄을 간절히 기다리오니 저희가 구원의 큰 기쁨을 누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이 축제를 맞이하게 하소서.
2024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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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3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스바 3,14-18ㄱ)
주님께서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 제 2독서
(필리 4,4-7)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3,10-18)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오늘 말씀 카드
(스바 3,17)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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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 3,14-18ㄱ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필리 4,4-7
오늘 제2독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4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루카 3,10-18
오늘 복음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2월 15일
정진호 베드로 신부
✚ 서봉구 형제 순교기념관 00:24
✚ 미사시작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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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중도, 세리들도, 군사들도 모두 세례자 요한에게 똑같이 묻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세례자 요한은 이 물음에 다른 답을 합니다. 군중에게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멈추고, 나누라고 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3,11).
세리들에게는 돈으로 저지르는 악을 멈추라고 말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3,13).
군사들에게는 폭력을 멈추고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3,14).
이러한 대답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웃에게 당연하게 저지르던 악행을 멈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준비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저지르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타협하던 크고 작은 죄악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고,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 3,14).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예수님의 성탄이 다만 해마다 돌아오는 ‘기념일’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세례자 요한의 권고를 마음에 새기며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화창한 하늘처럼 맘껏 기뻐하라
기뻐하라고 하는 주일입니다. 기뻐하라고 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오심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서들은 기뻐 소리치고 맘껏 기뻐하라고 재촉하는데 저의 기쁨은 화창한 하늘 같지 않고 구름 낀 하늘 같으며, 기뻐해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면서 선뜻 그리고 맘껏 기뻐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수난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늘 옆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수난을 실제로는 잘살지 못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기쁨 구조’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는 기쁨보다는 싫어하는 사람이 사라질 때 더 기쁜,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기쁨보다는 미워하는 사람과 떨어질 때 더 기쁜, 그런 우리의 ‘기쁨 구조’ 말입니다.
예를 들어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되는 기쁨과 주님께서 오시는 기쁨 가운데 우리는 어떤 것이 실제로 더 기쁩니까? 탄핵되는 기쁨이 더 짜릿하지 않습니까? 먹구름이 걷히는 것이 기쁩니까? 해가 뜨는 것이 더 기쁩니까?
그게 그거 같지만 우리는 해가 뜨고 화창한 하늘일 때는 기쁘지 않다가 먹구름이 걷힐 때 기뻐지거나 기뻐하지 않습니까? 늘 있는 것의 지루함이랄까 당연함 같은 것이 우리에게는 있지요.
그래서 늘 있는 것이 지루하지 않기 위해서는 있던 것이 사라지고 그로 인하여 고통에 시달리다가 다시 나타나야 합니다. 이는 엄마가 자신을 숨겼다가 ‘까꿍’하고 자신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기쁨도 그렇습니다. 늘 있는 기쁨은 지루하고 그래서 그것이 기쁨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기쁨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그리고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지루하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부재의 시간과 하느님 부재의 고통이 있어야만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갈망하고 기다리게 되고 기뻐하게 됩니다.
아무튼 하느님을 만난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느님을 만난 기쁨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기쁨을 누르거나 안에 가둬두지 말아야 하고 소리쳐야 합니다. 아니 우리의 기쁨은 가두거나 누를 수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그런데 기뻐 소리치는 것은 자기감정을 억누르거나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에 겨워 마구 표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의 확장이 목표인 복음의 선포이고 사랑의 실천입니다.
나만 행복하지 않고 모두 행복하게 해야겠다는 사랑으로 나만 주님의 오심으로 기쁘지 않고 모두 기쁘게 하려는 사랑으로 외치는 것이며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 외침은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맘껏 기뻐할 뿐 아니라 크게 소리쳐야 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오심으로 기쁜 사람이 해야 할 것은 기쁨 자체도 나눠줘야겠지만 기쁜 나머지 가진 것도 나눠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나눔을 실천하고 자선을 실천하는 것과 같이 기쁨에 넘치는 사람도 나눔과 자선을 실천합니다. 이것이 기뻐하라 주일이 자선 주일인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나눌 줄 모르고 인색한 사람은 아직 행복하지 않은 것이고, 아직 기쁘지 않거나 기쁨이 넘칠 정도로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넘친다는 것은 나를 채우고 넘치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겁니다.
달리 말하면 아직 만족하지 못한 것이고 만족하고 남지 못한 겁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오심으로 너무 기쁜 사람은 감사해야 합니다.
진정 주님 안에서 기쁜 사람은 아무 걱정이 없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마음에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서간의 말씀으로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림 제3주일, 오늘을 우리는 “기쁨주일”이라 부릅니다. 대림초에는 핑크색 초에 불이 밝혀지고, 사제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장미 빛 분홍색 제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전례도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복음 환호송, 독서 등 전례 전체가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라’는 말로 메아리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스바니아 예언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 부분은 바빌론 유배의 아픈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예언자는 유배생활의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이야기하고 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니,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리라.”(스바 3,15.17)
이처럼, 그들이 유배의 고통 중에서도 축제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삶 안에 함께 계시며 새롭게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제2독서>는 필리피 서간으로, 사도 바오로는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신자들에게 기쁨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 4,4)
사도 바오로의 기쁨 역시 스바니아처럼, 오로지 함께 계시는 구세주 주님께만 희망을 두신 까닭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원천이 그리스도께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자신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과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향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자가 곧 기쁨의 전달자가 되고, 바로 그가 곧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도 세리도 군사들도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12.14)
이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인 삶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곧 구체적인 “자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반면, ‘불’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변화되는 힘을 상징합니다. 마치 불이 자기에게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변화시키듯이, 성령께서는 당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용서와 더불어 말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용서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용서받고 새 생명을 입은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꽉 차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몸으로 행실로 드러났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자선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생활과 하느님 말씀묵상과 성사거행과 공동체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무엇에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한가운데 그렇게 함께 계시며,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 자비는 늘 저희와 함께 있지만, 저희는 자신의 어둠 속에 갇혀 그 자비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건네주려고 저희를 찾아 헤매건만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헤매기가 일수입니다. 딴 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꼴입니다. 주님이 한 발짝 다가오면, 오히려 두 발짝 멀리 도망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를 목말라하면서도 실상은 자비에게로 달려가지는 않는 꼴입니다. 하느님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안식과 위로를 찾는다면, 그것은 허상을 쫓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는 우리의 거부로 상처 입게 될 것입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오늘,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 자비의 기쁨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3,10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쫓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물의 세례를 받지 않고 불의 세례를 받으면 벌어지는 일
어떤 사람이 그릇 빚는 노인의 숙달된 솜씨와 작업대 위에 얹혀있는 갓 빚은 옹기들에 대하여 감탄하면서 감상했습니다. 모두가 근사하고 멋있는 모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옹기장이의 그 모든 수고가 헛되이 끝나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옹기들이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 일부 그릇들이 금이 가고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왜 어떤 것들은 금이 가고 깨어지는지 알기 위해 옹기장이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습니다.
“같은 흙을 사용하면서 당신이 어느 것은 잘 빚고 어느 것은 못 빚었습니까? 아니면 어느 것에다가는 더 수고를 기울이고, 어느 것에는 수고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릇 만드는 과정에서 어느 것에는 어떤 재료가 부족했습니까?”
옹기장이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옹기가 손상되는 이유는 그 그릇들이 불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물의 세례와 성령의 불의 세례를 말합니다. 물의 세례란 무엇일까요? 그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와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올바른 삶을 일일이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물의 세례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께 파견된 자에게 순종하려는 의지’.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불의 세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루르드에서 성모님은 베르나데트를 당신 대리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베르나데트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면 그들이 베르나데트가 손으로 파서 솟아 나오는 기적수의 효과를 볼 수 있었을까요? 믿음이 없어서 그 물을 마셔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의 능력을 믿지 않고 교회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성체성사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교회를 믿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밀떡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오게 될 것임을 믿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성체성사를 하더라도 효과가 없습니다. 효과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가리옷 유다처럼 그 불을 감당할 수 없어 몸이 터져버릴 수 있습니다.
전에 하루도 빠짐없이 뽀뽀하고 자려는 의지로 80년 결혼생활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은 부부의 사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의지 없이 결혼이라는 불의 세례는 오히려 두 사람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에 먼저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1943년, 미시시피의 한 감옥에서 클로드 뉴먼이라는 청년이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죄목은 매복하여 한 남성을 총으로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형을 앞두고 그는 다른 죄수의 목에 걸려 있는 메달을 보게 되었습니다. 클로드는 그 메달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 죄수는 화를 내며 메달을 땅바닥에 던지며 말했습니다.
“가져가라.”
그 메달은 기적의 메달이었고, 클로드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는 누구를 상징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메달을 집어 기 목에 걸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손목을 누군가가 건드리는 것 같은 느낌에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그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빛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두려움에 떨던 클로드를 진정시키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어머니로 모시고, 내가 너의 어머니가 되길 원한다면, 가톨릭 신부를 부르도록 하여라.”
클로드는 자신이 유령을 본 것으로 생각하며 곧바로 가톨릭 신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튿날 교정 사목 신부인 로버트 오리어리가 클로드를 만나러 왔습니다. 오리어리는 문맹이었던 클로드가 이미 성모님께 배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성모님께 서약했던 내용까지 알고 있음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클로드는 세례를 받고 사형당했지만, 기쁘게 주님 곁으로 갔고 이후 기적과 같은 일들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는 클로드를 사제에게 보내 당신에 대해 더 알게 하시고 교회를 통해 성사에 참여하며 당신께 나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현대의 세례자는 가톨릭교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은 본당신부라서 외부 강의를 나가지 않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강의 청탁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돈이 없어서 강사료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오시는 분들 생각해서 강의해 주십시오.”
갈까요? 안 갈까요? 당연히 갑니다. 제가 필요하다는데 당연히 가야 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가고, 또 즐겁게 강의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소품을 준비하거나, 선물 같은 것은 준비하지 않습니다(무조건 나눠주기에는 제가 그렇게 부자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희가 신부님 강사료로 ***원 잡았습니다. 강의해 주시겠습니까?”
강사료 액수가 상당히 컸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갖가지 배려를 해 주십니다. 갈까요? 안 갈까요? 역시 당연히 갑니다. 이 강의를 위한 준비를 아주 열심히 합니다. 이런 강의를 해달라면서 부탁하면 어떤 부탁이든 다 맞춰줍니다. 또 어떻게 하면 강의 듣는 분에게 도움이 될지 오랫동안 준비합니다. 완전히 다른 강의를 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돈 때문일까요?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강의했다고 저에게 특별한 이득이 있지 않습니다. 강사료는 강의 때 나눠드리는 선물값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어려운 곳이나 필요한 곳에 모두 보냅니다. 특별히 돈 쓸데도 없고, 가지고 있어 봐야 욕심만 커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경우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를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인정한다고 생각하니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상대가 인정하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고 있다는 것만 해도 우리를 사랑하고 인정하신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하시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면서 배려해 주시는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고 있나요?
벌써 대림초의 불이 세 개나 켜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든 이를 위한 정확한 규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고자 한다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며, 아무에게도 빼앗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면서 겸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 인정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그 인정에 보답하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끊임없이 요구만 하면서, 주님의 인정과 사랑에 반대되는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우리는 우리가 행복해지려고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 에이브러햄 링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다면 어디로 오시겠습니까? 추위에 떨고있는 불쌍하고 불안한 이웃들의 마음에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삶이란 올바른 실천을 일컫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마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시대 이 땅에 필요한 것은 연민의 마음입니다. 연민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 바로 자선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은 생명을 향한 연민과 올바른 사랑의 마음을 지니게 합니다. 올바른 자선의 실천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주춧돌이 됩니다.
예수님의 체온과 목소리는 좀 더 가까이 오시는 자선에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나눔의 옷은 우리를 더 부끄럽지 않게 합니다. 우리의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살 줄 아는 사람은 기꺼이 나눔을 실천합니다.
모든 생명이 돌아가야 할 마음과 실천은 연민과 자선입니다. 자선의 기쁨이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입니다. 기쁨으로 마음을 나누는 행복한 자선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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