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4년 8월 23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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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제 37,1-14)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온 이스라엘 집안인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겠다. - 오늘 복음
(마태 22,34-40)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오늘 말씀 카드
(에제 37,14)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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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 37,1-14
오늘 제1독서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온 이스라엘 집안인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겠다.
그 무렵
1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4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5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6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분부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9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12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
마태 22,34-40
오늘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8월 23일
유상준 베르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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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희망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온다.
심판을 선고하던 에제키엘이,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심판 선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자들이 막상 멸망하고 나니 절망에 빠지는데, 심판을 선고하였던 예언자는 오히려 희망을 선포합니다.
희망이라는 것, 쉽지 않은 덕목입니다. 문명이 발달하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전보다 더 간절히 희망을 이야기합니까?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요?
에제키엘에게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선포하는 희망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 에제키엘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아십니다”(에제 37,3).
다른 많은 사람이 그러하였듯이 에제키엘이 보기에도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은 하느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제키엘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합니다.
마른 뼈들에게 살아나리라고 예언하라는 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여기던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선포하라는 것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제키엘은 그 말씀을 믿고 선포합니다.
그가 부르심을 받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선고하라고 에제키엘을 보내시면서, 이스라엘이 완고하여 듣지 않으리라고 하시며 그들이 듣든 듣지 않든 선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2,5).
모두 절망하고 있을 때 희망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예언자이기 때문이고, 그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희망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런 사람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덕들에게 바친 인사”에서 지혜를 여왕 덕이라고 합니다.
“여왕이신 지혜여, 인사드립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다른 덕들은 그저 귀부인이라고 하고, 지혜를 덕들 가운데서 여왕이라고 하는지.
그것은 오늘 주님 말씀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계명이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잖습니까?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덕들에게 바친 인사”에서 지혜를 여왕 덕이라고 합니다.
“여왕이신 지혜여, 인사드립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다른 덕들은 그저 귀부인이라고 하고, 지혜를 덕들 가운데서 여왕이라고 하는지. 그것은 오늘 주님 말씀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계명이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잖습니까?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 저의 가난 역시에서 말씀드린 것이지만 저만 해도, 가난을 제일 중요시하는 우를 범했고 가난하지 않다는 이유로 형제들을 미워함으로써 가난 때문에 더 중요한 계명인 이웃 사랑을 놓치는 큰 잘못을 범했었지요.
그리고 실로 많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싸웁니다. 시비(是非)를 많이 가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비의 시(是) 자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옳다. 바르다’라는 뜻이 기본이지만 ‘옳다고 하다’라는 뜻과 ‘바르다고 인정하다’라는 어찌 보면 상반된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네가 옳다고 인정해주면 싸움이 되지 않을 텐데, 내가 옳다고 하기에 싸움이 되는 것이지요.
결국 의(義) 또는 정의(正義) 때문에 사랑을 놓치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옳기 위해서는 남이 한 것은 그른 것이 되어야 하고, 나의 주장이 옳기 위해서는 남의 주장이 틀렸다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이 경험하는 분쟁적인 공동체에는 같이 옳은 것을 찾아가는 사랑의 정의는 없고, 서로 자기가 옳다는 독선적 주장만 있으며, 같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랑의 긍정은 없고 서로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고집만 있을 뿐입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이 ‘자기(自己)’는 없고, 사랑을 사랑하는 참 ‘자아(自我)’ 있어야 하는데 그 반대이기에 하느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뒷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오늘 주님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말 안에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여기라는 뜻도 있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란 나와 하느님과 이웃이 하나가 되는 합일적이고 공존적인 나 또는 자아이어야 하는데
나만 있고 하느님도 이웃도 없는 분열적이고 공멸적인 자기(Ego)이기에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되지도 못하고 하느님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아무 사랑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너 없이 나 없습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독불장군(獨不將軍)은 홀로 장군인 사람은 없다는 뜻이지요. 훌륭한 병사들 없이 훌륭한 장군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러므로 네가 있기에 나도 있고, 너를 긍정하기에 나도 긍정 받는, 너를 사랑하기에 나도 사랑 받는 그런 사랑,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나를 포함하는 하느님의 모든 조물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연애와 사랑은 무엇이 다른가?
2010년 한 여성이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4개월 때였습니다. 다행히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제왕절개 시술이 가능해질 때까지 5개월간 집에서 남편의 보살핌 속에 누워있었고, 9개월이 되자 병원으로 옮겨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산모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의사들은 산모는 회복하기 어려우니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지키던 가족들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녀를 지키는 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 가오 친빠오였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시간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서툰 말투로 대화도 건네며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아기가 엄마의 병원 음식을 씹어 자기 입으로 엄마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 주는 것처럼 행동하던 2013년 5월, 아기가 작은 소리로 엄마를 부를 때 엄마가 눈을 떴습니다.
중국 장롱샹 씨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에 기사화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야 3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제 머리맡에서 미소 짓는 아기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됐고요.”
의사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는 음식을 겨우 삼킬 수만 있었고 씹지 않은 것들은 소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이것을 알고 음식을 씹어 엄마의 입속에 넣어주었을까요?
[출처: ‘왓칭 2: 시야를 무한히 넓히려면’, 김상운, 정신세계사]
정말 대단한 아기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아기의 사랑은 정말 순수할까요? 아기가 무슨 정신으로, 어디서 배워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요? 아기는 엄마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 것입니다. 나중에 엄마가 다 나아서 아이에게 사랑을 퍼부어 줄 때 아기는 자신이 투자한 것에 비해 돌아오는 게 작다고 불평을 할 것입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 아픈 여자를 위해 비를 맞으며 마지막 잎새를 벽에 그려 넣은 나이 든 화가는 정말 사랑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요?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평생 그림을 그려왔지만, 누구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자 그렇게라도 한 여자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무 사랑 자체를 이기적인 것으로 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것을 ‘연애’라고 하겠습니다. 연애는 사랑이 시작되기 이전의 단계입니다. 많은 이들은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연애는 모기 두 마리가 하는 거지만, 사랑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가 하는 것입니다.
둘이 모르는 사이였을 때는 오히려 싸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이 서로 연애하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지금까지 투자한 것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원하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둘 다 똑같이 그렇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서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이렇게 좋아하게 만드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네가 나를 좋아하는 감정으로 행복하다면 이제 나도 행복하게 해 줘야지!’
결국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한 것입니다. 연애는 투자입니다. 투자는 내가 투자한 것보다 더 벌어야 만족합니다. 그러나 서로 연애하게 된 이상 이전보다 더 열심히 투자가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서로 서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투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다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의 사랑이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이것으로 이미 이웃에게 합당한 보상이 오지 않더라도 서운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웃 사랑은 기필코 하느님 사랑과 연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에 투옥되었던 동안 가족이 있는 다른 수감자와 교환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친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예를 생각해보십시오. 성 막시밀리안의 사랑은 개인적 이익이나 감정적 감정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에 상대가 반응이 없어도, 오히려 나는 빵을 주는데 그 사람이 칼을 주더라도 나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보상이나 인정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진실합니다. 그러면 언제 연애에서 사랑이 될까요? 하느님께서 상대를 사랑하라고 하신 명령을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그 사람은 이제 연애에서 사랑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느리고 힘없어 보이는 나무늘보는 멸종 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개체 수가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나무늘보는 한 시간 내내 움직여도 200여 미터밖에 못 가는데, 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기에 숫자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느리다는 것은 야생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천적을 만나도 재빠르게 도망갈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멸종 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개체 수가 줄어들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퓨마와 독수리 같은 동물은 뛰어난 동체 시력을 가지고 있어 재빠르거나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은 쉽게 알아보지만,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동물은 오히려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약점인 줄 알았던 느린 움직임이 야생에서 살아남는 데 큰 이점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무늘보는 나무와 구분하기 어려운 보호색을 갖추고 있어 다른 동물들이 알아보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무늘보는 빨라지려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럴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살아남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부족함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비결이 아닐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 속도에 맞춰서 우리도 ‘빨리 빨리’를 외치면서 행동합니다. 그래서 빠른 결과를 원하고, 자기 모습도 빠르게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족한 자기 모습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느리게 움직이는 이 나무늘보도 지그시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언제일까요? 바로 똥 눌 때입니다.
우리도 행복의 순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할 때는 바로 사랑할 때가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셨고, 당신 삶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말하는 율법 교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든 삶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실천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바람을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늘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속도에 지쳐 사랑을 포기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느님의 속도를 바라보십시오. 빠르기보다 천천히 그 속도를 바라보면서 사랑의 삶, 행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그대의 하늘이 맑게 개기를, 그대의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기쁨과 행복의 순간에 그대 위에 축복이 넘치기를!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 외면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으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은 자연스레 이웃 사랑으로 피어납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 속해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 안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잘 살다 간다는 것은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숨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사랑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사랑으로 아름다워집니다. 하느님의 목숨으로 사랑을 얻은 우리들입니다.
이웃 사랑을 잃으면 하느님 사랑도 잃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있는 십자가는 온 삶에 사랑을 새겨놓고 있습니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되찾는 사랑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반가운 이웃들과 기쁘게 먼저 인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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