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2024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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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열왕 19,9ㄱ.11-16)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 오늘 복음
(마태 5,27-32)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 오늘 말씀 카드
(필리 2,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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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왕 19,9ㄱ.11-16
오늘 제1독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그 무렵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9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주님께서
11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4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임금으로 세우고,
16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마태 5,27-32
오늘 복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6월 14일
최성우 세례자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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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함께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예언자의 사명에 충실하였지만,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서슬이 퍼런 권력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당당하게 옳은 소리를 외쳤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은 도망자가 되어 무기력하게 호렙산 동굴에 홀로 서 있을 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주님께서는 ‘산을 할퀴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 속에도, ‘온 땅을 뒤흔드는 지진’ 속에도 계시지 않으시며,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나타나십니다.
세상을 뒤흔드는 바람, 지진, 불은 엘리야 예언자의 역동적인 활동을 상징하는 듯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역동적인 상황에서 엘리야에게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으셨고, 그 모든 것이 지난 뒤 조용히 침묵 가운데 오셨습니다.
교회가 정의와 평화, 인권, 공동선, 환경, 생명 등의 문제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일 때, 엘리야와 같이 무기력한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목소리를 내어도 세상은 바뀌기는커녕 듣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소리를 외친 대가는 거센 비난과 싸늘한 비웃음, 대중이나 권력의 압박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묻게 됩니다.
교회가 행한 일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그 일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셨는가?
그러한 실망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는 침묵 안에서 조용히 당신 계획을 준비하십니다. 당신의 뜻을 이룰 새로운 임금과 새로운 예언자를 세우시며 구원사를 끌고 가십니다. 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가 반드시 내 손으로, 그리고 지금 내 세대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계획을 거두지 않으시고, 그 계획은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선의를 가지고 하느님의 일을 이어 가는 사람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고, 그들을 통하여 그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는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도 하느님 체험을 원할까?
오늘 열왕기는 그 유명한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의 하느님 체험에 앞선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르멜산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1:450으로 목숨을 건 싸움을 하였고, 이때 엘리야는 그들을 다 쳐 죽였는데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그는 왕비 이제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래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와 동굴에 숨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지냈는지 모르지만, 그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동굴 속에는 그만 있으라는 말씀이고 나와서 산 위로 오르라는 말씀이며,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동굴은 엘리야가 택한 피신처였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그에게 피신처는 주님이어야 했는데, 이제벨에게 쫓겨 두려움에 싸인 그는 겨우 동굴을 피신처 삼았던 것입니다.
이 모습은 요즘 모든 사람이 두렵고 자기 가족마저 두려워 자기 방에 콕 박혀있는 은둔형 외톨이 모습인데 대 예언자라는 엘리야가 어떻게 이렇게 초라합니까?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제벨에게 쫓기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까? 있어야 할 주님 앞에 있지 않은 것입니까?
주님을 보지 않고 이제벨을 본 것이고, 주님 앞에 있지 않고 두려움 가운데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을 보지 않고 주님 앞에 있지 않으면 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풍랑을 만나서 주님만 보고 물 위를 걸었을 때는 아무 두려움이 없었고, 그래서 아무런 문제 없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는데 잠깐 시선을 놓친 순간 그 두려운 물을 보는 순간 물속에 빠진 것과 같은 거지요.
그러니 신앙인에게 두려움은 하느님을 보지 않아 생기는 두려움이고, 힘없는 자기를 보고 자기를 둘러싼 두려운 것들을 보기에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대 예언자 엘리야도 이러니 우리는 더 그리고 수시로 이럽니다. 잠깐 하느님을 놓치는 순간 사람들이 다 두렵고 두려움에 숨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거기서 나와 당신 앞에 서라고 주님 말씀하시는데 그러나 여전히 동굴 밖은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로 두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다 지나고 난 뒤에야 가까스로 나온 엘리야에게 주님께서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던지시는 질문이지요.
이에 우리는 ‘무엇을 하긴요?’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요!’ 이렇게밖에 대답 못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임금을 세우고 예언자를 세워라.”
두려워 도망치던 길에서 돌아서라는 말씀이고, 사명을 수행하러 가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임금들을 세우고 같이 일할 동료와 후계자들을 세우라는 명령입니다. “가서 무너져가는 내 집을 고쳐라.”라고 프란치스코가 받은 명령과 같습니다.
구세력이 두려운 사람은 도망치고 숨을 것입니다. 구세력이 싫고 미운 사람은 그것을 때려 부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 안에 신세력을 형성할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엄청난 사명을 수행하려면 하느님 체험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하느님 체험은 좋지만 엄청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하느님을 체험해야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원할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 마음까지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순결해져야 한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구약은 실천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면 실천할 수도 없고, 실천하더라도 위선적으로 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의 줄거리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후반 런던입니다. 바질 홀워드(Basil Hallward)는 나이 든 화가입니다. 그는 도리안 그레이(Dorian Gray)의 인상적인 초상화를 그려보고 싶습니다. 도리안은 젊고 아름답고 돈도 많습니다. 그것을 오래 남겨놓고 싶은 것입니다.
그림을 본 헨리 워튼 경은 쾌락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냉소적인 귀족입니다. 그는 도리안에게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전에 즐기라고 충고합니다. 도리안은 헨리의 말을 듣고 앞으로 잃어갈 자기 아름다움을 미리 아까워합니다. 그리고 초상화를 질투합니다. 초상화는 늙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상화와 자기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초상화는 늙어가는데 도리안은 초상화처럼 그대로 젊음을 유지합니다. 도리안은 자기 아름다움을 통해 타락하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 와중에 그를 좋아했던 여인이 자살합니다. 그래도 도리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다만 런던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도리안은 자기의 비밀을 알고 초상화를 지닌 화가 바질을 다시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 비밀을 감추기 위해 바질을 살해합니다. 초상화까지 없애기 위해 칼을 댔더니 초상화가 원래 그대로 젊어지고 도리안은 그 초상화의 나이 든 추한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가 찌른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도리안은 외모에 집착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추해지는 그림은 없애고 싶어 합니다. 이는 육체에 반대되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외모에 치중하면 마음이 죽고 마음에 치중하면 육체가 죽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5-6)
“성령의 관심사”로 번역하기보다는 “영의 관심사”로 번역했어야 옳습니다. 영이나 성령이나 다 마음에 관계됩니다. 마음 안에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믿음을 넣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믿음이 어떻게 마음까지 정결하게 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면의 정결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얻어집니다. 만약 내가 욕망하던 여인이 나의 누이동생임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혹은 ‘엽기적인 그녀’에게서처럼 성전환자라면? 아마 올라오던 욕망이 바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영화 ‘더 몽크’(2011)는 매튜 그레고리 루이스(Matthew Gregory Lewis)의 1796년 고딕 소설을 원작으로 도미니크 몰(Dominik Moll)이 감독한 프랑스 영화입니다. 주인공 암브로시오는 어렸을 때 수도원에 버려져 처음부터 수도원에서 자라며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금씩 성적인 욕망에 눈을 뜨고 결국엔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여인을 범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자기 여동생임이 밝혀집니다. 그러자 그는 곧 회개하고 동생을 위해 기도하고 지옥에 가는 것을 택합니다.
욕망은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개라고 믿는데 두 발로 서고 싶다는 생각이 생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자녀라고 하십니다. 그 정체성만 가지면 우리는 모두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성적인 욕망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정결함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전 세계 수억 명이 가장 좋아하는 여가 활동은 무엇일까요? 단연 일등은 텔레비전 시청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하루 평균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2021년 통계를 보면 3시간이 넘습니다. 1년 중에서 한 달 이상인 45일을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면 긴장이 풀어진다고 합니다. 화면에 집중할수록 사고 활동이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긴장이 풀어진다고 해서 내적 안정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떤 생각도 들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텔레비전 생각과 이미지를 내 안에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채널을 계속 돌립니다. 무의식적이 되고 수동적이며 내적 에너지가 고갈됩니다.
요즘에는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스마트폰과 동영상 서비스인 OTT(Over The Top)의 이용 시간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입니다. 이는 분명 재미와 흥미를 주지만, 역시 내적 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주는 내적 성장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길이고 주님 안에서 일치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의 모습과 일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남들처럼 해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굳이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남들처럼 살아야 할까요?
참 행복을 찾아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처럼 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남들처럼이 아닌 나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참 행복을 향해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죄의 시작은 행동에서일까요? 아니면 마음에서일까요? 당연히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에서 죄를 품고 나서 이를 행동으로 저지르는 잘못된 행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저지르는 죄를 경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면서 오른눈이 죄짓게 하거든 빼어 던져 버리라고, 오른손이 죄짓게 하거든 잘라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마음부터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세상이 주는 가짜 위로와 평화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위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 예언자에게 주님께서는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 서는 사람은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만 가능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오늘의 명언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하느님께 숨길 수 없는 우리들 모든 모습입니다. 두 눈도 두 손도 쾌락과 본능에 묶여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능을 정화하는 참된 사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삶의 본질인 사람의 도리를 어긋난 본능이 마구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음욕과 욕정으로만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서로를 가두는 감옥과 족쇄는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길이 아닌 길을 걷지 않으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약속은 지켜내려는 충실함을 통해 자라납니다. 더 이상 약속의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마음에 품고 있던 것들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어두움 속에서 도리어 빛나는 십자가의 절제이며 맑은 사랑입니다.
욕정의 두 눈과 두 손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지만 연민의 두 손과 두 손은 사람을 살려냅니다. 짐승의 길과 사람의 길은 분명코 다릅니다. 더 좋은 삶의 도리와 사명을 일깨워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과 가야 할 길 사이에서 십자가를 건네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업고 가며 사랑은 사랑으로 온전하며 충분합니다. 지나가는 우리의 길이 더 아름답고 좋은 길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마음은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는 하루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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