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 드리세.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다스리신다. 알렐루야.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 부활의 신비를 거행하는 저희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2024년 4월 23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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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1,19-26)
그들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 오늘 복음
(요한 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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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한 10,22-30
오늘 복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23일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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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기원을 전하여 줍니다.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안티오키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파견합니다.
그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나자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성장하고 생활하셨지만(인성) 동시에 그리스도이신 하느님(신성)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밝히시도록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시며 무기력한 불통을 지적하십니다.
서로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통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으며, 견제와 위협만 되풀이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상대의 소리를 알아들어야 하고(어제 복음), 그 소리를 따라야 하며(오늘 복음), 그 따름으로 상대방의 진정성과 아름다움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듣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믿고 따르며, 그 관계성을 증언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때,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처럼 아무리 “분명히” 말한다 하여도 다시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며 똑같은 의심만 되풀이하게 됩니다.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니 아무리 말하여도 알아듣지 못하고, 의심을 붙잡고 있으니 믿음도 생겨날 리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문을 넓혀야.
뜬금없는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유대교 신자가 결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구약성서가 훌륭하고 그 성서가 얘기하는 하느님이 저의 신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해도 유대교 신자는 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이 되지 않겠다는 뜻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극단적인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의 유대인과 유대교는 글러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것은 이사야서가 얘기하듯 모든 민족을 당신께 모아들이기 위해서인데 잘못된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느님의 백성이고, 다른 족속은 하느님 백성이 아니기에 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드러난 것이 어제 사도행전의 얘기입니다. 베드로가 할례받지 않은 이들과 식사를 한 것을 두고 비난을 한 것 말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어제 이런 말씀들로 아주 적절한 대처를 하였지요.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올바른 유대교는 같은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엘닷과 메닷은 70인 장로가 아니고 그리고 만남의 장막 밖에 있었는데도, 다시 말해서 만남의 장막 안에 장로들과 같이 있지 않았는데도 주님의 영을 받았고 그래서 여호수아가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자 모세는 그것을 질투해서는 안 된다고 한 다음 차라리 모든 사람이 주님의 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제 베드로 사도도 같은 맥락으로 사람들의 말문을 막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의젓하고도 올바른 대처 덕분에 그리고 이 말은 들은 사람들의 동의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갇히지 않고 그리스도교가 될 수 있었는데 오늘 사도행전은 초대 공동체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되는 과정을 얘기합니다.
스테파노의 박해로 흩어진 이들이 안티오키아의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합니다.
이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사도들의 교회가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파견하고, 바르나바는 타르수스로 가 사울을 데리고 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데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라고 오늘 사도행전은 전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니다. 흩어져 안티오키아에 간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전히 유대교로 머물러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를 극복한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을 우리가 나만 또는 우리만 드나드는 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문을 열어야 하고 닫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교황님께서 동성 커풀을 비전례적으로 그러니까 사목적으로 축복하는 것을 허용하신 것 때문에 비판과 반대를 하거나 혼란을 겪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축복을 청하는 이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교회가 열려있어야 하고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결합이 정상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축복을 청하는데도 너희들은 비정상적이기에 축복해줄 수 없다고, 반대로 너희들은 축복 대신 저주받아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합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결합을 전례적으로 축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원하고 청하는 사람을 사목적으로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며 좋다고 축복하신 피조물을 누구도 축복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우리는 이해의 폭을 넓혀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상 살면서 누군가가 나와 일치한다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치하는 것일까요? 십자가를 목에 걸고 성경을 읽으면 일치하게 될까요? 물론 그것도 일치의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께 일치하는 방법을 알 때 사람들을 나와 일치하게 하는 방법도 알게 된다는 게 핵심입니다.
세바시 1814회 ‘우울증과의 위험한 동거 7년, 기적적인 탈출 스토리’에서 『소중한 사람을 위해 우울증을 공부합시다』라는 책을 쓴 최의종 씨가 강연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 있는 최의종 씨에게 아내가 전화했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깜짝 놀라서 달려가 봤더니 몸이 아프기는 아픈데 어떻게 아픈지 정확히는 모르겠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우울증이었습니다. 두 아이이면서도 자살 충동을 끊임없이 느끼는 이 자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집은 지옥처럼 변했습니다. 아이들도 오랫동안 빨래를 못 한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최의종 씨도 아내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해 주었는데 뭐가 부족해서 우울증에 걸렸냐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운동하고 음식을 먹으라고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내는 나아지지 않고 남편과의 사이는 더 벌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도 거의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아내가 죽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갔는데 그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겉이 멀쩡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자신도 아내에게 그런 모습일 수 있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부터 최의종 씨는 우울증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범을 보입니다. 먼저 쉬운 운동부터 아내가 보는 앞에서 합니다. 집이 헬스장이 되어갑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위해 하는 그런 행동들에 미안해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러니 입맛도 좋아지고 7년이 지난 지금은 수영을 자신보다 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우울증을 함께 극복한 부모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일치의 핵심이 있습니다. 남편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나도 우울증 환자가 되어서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도 할 수 있다고 믿고 남편을 따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치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우리가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는 그분이 아버지께 가시기 위해 하신 일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최의종 씨는 이미 우울증을 극복한 이들의 책을 공부해서 그것을 따라 했습니다. 따라 하는 것을 아내에게 보여줬습니다. 이것이 아내가 자신에게 일치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둘이 일치할 수 없습니다.
어제는 ‘하.사.시.’를 함께 전하고 있는 카타리나란 자매가 드디어 하.사.시. 10권을 다 읽은 것을 알았습니다. 벌써 다시 2권째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톡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답글이 왔습니다.
“읽은 날은 죄를 덜 짓고…. 못 읽는 날은 죄를 더 짓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안 먹으면 배가 고프듯이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면 기도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냈습니다.
“기도의 효과를 느끼고 있으면… 기도하고 있는 것임.”
그러니 장문의 글이 왔습니다.
“이거는 확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제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주님께서 죄많은 저를 늘 도와주고 계심을요…. 그래서 미사 중에 주책맞게 자주 웁니다….^^
내게 해를 끼친 이웃을 위해 미움을 기도로 올리니 화해로 결실을 맺게 해주시는 주님의 기적을 보면서 또 감사로 기도합니다…. 요즘은 기도의 힘이 너무 큰 것을 알기에 죄인인 제가 그 기도라는 것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고 즐겁고 기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 전 요셉 신부님 덕분이에요!!^^”
제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카타리나 자매가 저와 더 일치함을 느끼게 되어서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일치한 것이지만. 저는 제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모범을 보여주었고 그 자매는 그것을 따라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또 누군가가 저와 일치하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법을 모를 때는 누군가를 나와 일치하게 하는 법을 알 수가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치는 비난이나 강제로 시키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와 진정으로 일치하는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내가 그리스도께 일치하는 모범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순시기에 정말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외부 강의도 많았고, 특히 본당에서 성삼일을 보내면서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활 대축일 성야 미사를 끝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딱 일주일만 아프고 싶다.’
놀라운 것은 다음 날부터 아픈 것입니다. 우선 고개를 돌리기 힘들 정도로 목이 너무 아팠습니다. 아파서 좀 쉬어야겠다 싶었지만, 계속 일정이 있어서 쉴 수 없었습니다. 아픈 목을 부여잡고 억지로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괜찮겠지’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 금요일부터는 목감기가 찾아왔습니다. 말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몸 곳곳에 찰과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일주일만 아프고 싶다는 말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파도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더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자.”
우리 신앙인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주님께 하는 헛된 맹세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께서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내게 필요한 대로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당신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을 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양이 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주님의 양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주님을 이끄는 것이 아닌, 주님이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뜻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주님을 뜻을 먼저 찾고 실천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때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격이 주어집니다.
오늘의 명언
모두를 믿지 말고 가치 있는 이를 믿어라. 모두를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고 가치 있는 이를 신뢰하는 것은 분별력의 표시이다.
- 데모크리토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를 붙잡지 않습니다. 하나를 볼 수 없다면 우리는 다른 하나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나가 하나를 내놓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를 지향하며 하나로 완성됩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완성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몸과 마음이 따로 나누어질 수 없듯이 믿음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우리는 잊고 삽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한 분이신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모든 구원의 시작은 하나에서 시작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향하는 하나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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