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당신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옵니다,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그들은 더욱더 힘차게 나아가리이다.
2022년 11월 25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묵시 20,1-4.11―21,2)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21,29-33)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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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기도
주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일깨우시어 저희가 거룩한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며 주님의 자비로 더욱 큰 은총을 받게 하소서.
복음
루카 21장 29-33절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29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30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31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만희 요셉 신부 강론
2022년 11월 25일 (금)
김만희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강론
2022년 11월 25일 (금)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나는 어떤 신앙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교회 공동체를 독자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학자의 의견입니다. 그런 이유로 마태오 복음(24,32-35 참조)과 마르코 복음(13,28-31 참조)의 병행 구절과 달리, 루카는 오늘 복음 속 비유에서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해석을 제시합니다.
독자가 무화과나무를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저자의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병행 구절에서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은 종말의 사건에 집중하는데, 루카 복음은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적용하여 서술합니다.
한편 마태오, 마르코, 루카, 곧 공관 복음서가 전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공통점도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등의 말씀입니다.
무화과나무에서 드러나는 현상과 징표를 보며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일들이 이루어질 때 종말 또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로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모두 그대로 실현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교훈은 ‘시대적 징표’를 읽을 수 있도록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고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려면 언제나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대적 징표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나는 어떤 신앙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라질 때 나타나시는
아시다시피 제가 하는 <여기 밥상>은 예약제 식탁이고, 제가 영적인 음식인 미사와 육적인 음식인 밥도 해드리는 이중 식탁입니다.
그제도 <여기 밥상>이 있었고, 식사하면서 유쾌한 대화도 나누고 유익한 대화도 나누었는데 한 자매님이 나이 먹는 것과 화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생각에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 화를 내지 않게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더 화를 내는 것 같다고 하시는데 제 느낌에 그것이 남 얘기를 하신다기보다는 자기도 늙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자기 미래를 걱정하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나이 먹을수록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더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나이 먹을수록 자기 한계와 약함을 잘 받아들이면 화를 덜 내게 되지만 그러지 못할 때 다시 말해서 전과 다른 나랄까 점점 쪼그라드는 나를 겸손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오히려 더 화를 내게 됩니다.
특히 젊었을 때 잘 나가던 사람, 힘도 있고 영향력도 있었던 사람일수록 그러지 않은 사람보다 약해진 자기, 쪼그라든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젊었을 때부터 별로 힘이 없고 영향력이 없으며,오히려 남의 신세만 지던 사람은 늘 그러했기에, 늙어서도 더 초라해질 것이 없고 자기의 약함을 분노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저처럼 인간적이든 영적이든 도움을 받기보다 도움을 주던 사람,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늘 가르치기만 하던 사람은 나이 먹어.오히려 도움을 받아야만 할 때 그런 자신에 대해 화가 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나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아무튼, 나이 먹으면 사라지는 것투성이입니다. 얼굴에서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손발에서 힘이 사라지고, 몸에서 건강이 사라지고, 머리에서 인지능력이 사라지고, 지혜와 여유마저 사라지면서 사랑도 쪼그라듭니다.
나뿐이 아닙니다. 나의 형제들과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쪼그라들고,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둘씩 내 옆에서 사라집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사라질 때 하느님만은 사라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한 신앙인이라면.모든 것이 사라질 때 오히려 나타나시는 하느님이 되고, 모든 것이 사라질 때 오히려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의 장례를 어떻게 미리 준비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은 마지막 심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설명하신 이 모든 일이 순차적으로 다 일어나게 된다는 뜻으로 자연의 변화를 예로 들었습니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넘으면 가을, 겨울로 간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조금 황당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2-33)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지금까지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더니 한 세대 안에서 다 일어난다고 하십니다. 저도 이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는데 지금까지 말씀하신 종말의 내용이 각자의 죽음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으로밖에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제가 부임한 본당은 연령대가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장례도 많이 납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여름에 부임하고 나서 스무 분 정도는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말씀드리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많이 돌아가셨는데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한 것은 한 분밖에 안 계셨습니다. 제가 부임한 이후 코로나가 있어도 성당에서 장례가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편의상 부모의 장례미사를 빈소에서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전 아무리 그래도 평생 다니던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하고 신자들에게 기도를 받고 가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인들도 그러한 생각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모습이 있을까요? 돌아가신 분들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리고 코로나의 영향도 크겠지만, 어쩌면 한 번도 자녀들에게 당신의 장례미사는 꼭 성당에서 하라고 자녀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리 장례미사가 번거롭기는 해도 부모가 남긴 유언을 자녀들은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냉담하는 자녀들도 성당에 나와 미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데 그 한마디 말씀을 안 하고 가신 것입니다.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무언가를 할 때 잘 되는 일이 있을까요? 시험공부를 안 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요? 연습을 전혀 안 하고 운동하면 잘 될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죽음이 쓸쓸하게 되는 이유는 준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서대로 오듯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순서대로 좋은 장례가 되게 하는 법은 무엇일까요?
몇 번 말씀을 드렸지만, 제가 본 가장 위대한 장례미사는 이태리 마체라타 교구의 톨렌티노 본당에서 한 장례미사입니다. 3개월 암 선고를 받고 3년을 사시며 돌아가신 한 자매님의 장례미사였습니다. 성당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장례미사는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3년 동안 자신의 장례미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장례식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의 지표가 됩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웃고 모든 이가 울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의 장례미사는 자녀들이 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가 없다면 자녀와 같은 사람들을 만들면 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게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힘만으로는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가 준 명령, 곧 생존의 명령을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편영화 ‘아바리야’(Avarya)는 이러한 내용입니다.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로봇과 함께 우주를 배회하는 한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지구가 멸망하자 이 노인은 자신의 로봇에게 자신이 살 지구와 가장 비슷한 행성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노인은 지쳐있습니다. 이제 지구와 같은 행성을 찾는 일을 멈추고 그만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총으로 자살합니다. 하지만 로봇은 그것까지도 계획해 놓았습니다. 주인이 죽으면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주인을 사이보그로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로봇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해야 해서 주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죽어도 계속 살려냅니다. 그렇게 영원히 우주를 떠도는 신세가 됩니다.
자녀가 우리에게 받는 명령은 그저 생존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그 본성상 누군가를 위해 죽는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로봇을 자녀로 보았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받은 명령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모에게는 지옥이 됩니다. 같은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을까요? 십계명의 네 번째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라는 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인데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지 않으면 사랑은 실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녀가 신앙을 잃으면 부모에게 효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부모에게 소홀히 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장례에 충실히 하려고 하지만 결국엔 본성이 드러나고 맙니다.
우리가 신앙을 잃어갈수록 노인들은 대접을 못 받습니다. 자녀가 마치 모기처럼 돈만 알고 자기 편안함만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최저이고 노인 빈곤율이 최고입니다. 그만큼 신앙교육이 안 되었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요행은 없습니다. 내가 효도를 받고 싶다면 자녀가 신앙인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집트에서 머물던 모세의 부모는 어떻게 효도를 받게 될까요? 자녀를 주님께 바침으로써 효도를 받게 됩니다. 모세가 그 생존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 자신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저는 저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매우 이기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는 부모님께 해야 할 의무를 최대한 다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비난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물론이요, 부모님과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지려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아버지 장례미사에 그렇게 많은 신자가 와서 기도해 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러한 장례를 치르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저를 사제가 되게 허락하신 때부터 예정된 것입니다.
자녀에게 효도 받고 싶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만드십시오. 이웃 사랑의 첫 번째 계명이 십계명에 나옵니다. 첫 번째 이웃이 부모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가졌다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무가 아닌 하느님께 대한 의무입니다. 왜 이러한 상황에서도 부모들은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보다 학원에 보낼까요? 부모의 마지막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마지막 때 부모의 영광은 자녀들의 신앙의 수준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자녀 명령 시스템을 신앙으로 바꿔주십시오. 아니면 육체적 자녀가 아니더라도 신앙의 새로운 자녀들을 탄생시키십시오. 이것이 미래 나의 장례를 준비하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현재에 충실해야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 바라는 우리입니다. 이를 위해 더 많이 생각하고 이것저것 따져보면서 후회를 줄여나갑니다. 그럼에도 후회스러운 일은 너무나 많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한 자매님께서 잘 아는 지인을 통해 좋은 투자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하며 “우리도 투자하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정보를 믿는 것은 어리석다면서 화를 내고 투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인의 말을 듣고 투자했던 다른 친구들 모두 큰 이익을 본 것입니다.
얼마 뒤, 남편이 지금 있는 아파트를 팔고 지방으로 내려가자고 합니다. 그 지방의 집값이 엄청나게 오를 것이라면서 빠르게 일 처리를 한 것입니다. 결과는 원래 살았던 집값은 많이 오르고, 이사 간 곳은 폭락했습니다.
계속된 후회 가득한 선택에 잠도 잘 오지 않고, 남편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선택한다는 것은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한 선택이 최악의 결과로 나타나더라도 그 대가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최악의 결과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최상의 결과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후회가 더 커져서 몸과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세상의 관점으로 행복해지는 길일까요? 어떤 분께서는 성당 다니는 날부터 일이 꼬인다면서 제게 세례받은 것 취소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의 눈으로는 최악의 결과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오는 날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사실 이 말씀을 들으면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이 무섭게 느껴지면서 절망에 빠질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상징적입니다. 그것은 그 무서운 일들을 예언하시면서 위협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산고 후 산모의 기쁨처럼 그 고통 후에 하느님 나라가 동녘에 떠오르는 해처럼 나타나는 기쁨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희망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을 통해 하신 말씀처럼,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가 잎이 돋자마자 여름이 가까이 올 줄 알게 되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후회를 줄이는 선택,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과거에 매여 있으면서, 더 큰 후회 속에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현재에 충실해야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후회를 줄이면서 기쁨의 삶을 살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매일 아침 눈뜨며 생각하자. ‘오늘 아침 일어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운인가?’ 나는 살아있고, 소중한 인생을 가졌으니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타인에게 나의 마음을 확장시켜 나가기 위해 모든 기운을 쏟을 것이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 타인을 이롭게 할 것이다.
- 달라이 라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지나가는 것과 가까이 오는 것이 있습니다. 가까이 오신 하느님의 나라는 다름 아닌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삶! 전체이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을 일으킵니다. 마음이 없으면 나무에 잎이 돋고 잎이 떨어진 줄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마음의 징표는 마음의 이끄심입니다. 그동안 하느님의 나라를 알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의 삶을 다시 만납니다. 예수님의 삶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우리는 말씀에서 멀어집니다. 다시 말씀을 부여잡습니다. 지나가고 일어나는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을 껴안는 말씀의 인격이 되게 하십니다.
요란하거나 요란스럽지 않은 내면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 내면이 가까이 오신 하느님의 나라와 함께할 수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하느님의 나라와 함께 합니다. 다시 말씀을 펴서 읽고 다시 진심어린 기도를 드리고 다시 사랑의 마음을 나눕니다. 마음이 알려주는 가장 아름다운 신비는 가까이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말씀의 마음을 나눕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가까이 오신 하느님의 나라에 봉헌합니다. 지나가는 것들과 가까이 오신 하느님의 나라를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청하며 하느님께 모든 마음의 움직임을 기꺼이 내어드립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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