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주 하느님, 당신이 하신 일 크고도 놀랍사옵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소리쳐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강들은 손뼉 치고, 산들도 함께 환호하여라.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신다.
2022년 11월 23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묵시 15,1-4)
그들은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21,12-19)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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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기도
주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일깨우시어 저희가 거룩한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며 주님의 자비로 더욱 큰 은총을 받게 하소서.
복음
루카 21장 12-19절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주형 세례자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11월 23일 (수)
이주형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11월 23일 (수)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랑하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박해 상황을 예고하십니다.
신앙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박해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임금으로서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 고난을 겪으셨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종말이 닥치기 전 박해를 겪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증언”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낱말은 인상적입니다. 여기에는 증언의 최고 단계이며 완성인 ‘순교’라는 뜻까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소 증인들에게 힘이 되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증언의 순간에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예수님께서 친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이에게 그분께서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증언하는 삶이 ‘장밋빛 인생’일 수만은 없겠지만, 그분께서 늘 지켜 주실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오늘날 외적 물리적 박해를 경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 파묻혀 살다 보니 내적 영적 박해에 노출되어 있음을 직감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율법 정신과 당신 자신의 목숨마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증인이 되는 길입니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이 사랑의 실천을 일상에서 내 것으로 내면화하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제자의 운명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를 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제자의 운명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곧 제자라면 박해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제자라면 그때 그것을 증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면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을 사람들이 박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자가 아닌 사람은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아닌 셈입니다. 제자가 아닌 사람이나 제자여도 참 제자가 아닌 사람은 박해를 받게 되면 베드로 사도가 배반할 때처럼 나는 그 양반 제자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자가 아닌 사람이나 참 제자가 아닌 사람은 주님의 제자답게 박해받을 짓이랄까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박해받을 짓만 골라 하셨습니다. 우선 약자 편에 늘 서셨습니다. 이것은 권력자의 눈에 거슬리는 겁니다. 권력자들이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약자 편에 서실 뿐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염두(念頭), 이 말이 새삼스럽습니다. 염두란 생각의 첫 자리라는 뜻입니다.
생각의 첫 자리엔 늘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는,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다 비판하셨고 그래서 박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라면 주님처럼 박해받을 짓만 골라 할 것이고, 반대로 제자가 아니라면 박해받을 짓은 절대 하지 않고 오늘 주님 말씀처럼 박해를 증언의 기회로 삼지도 않습니다.
기회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두 부류가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는 사람과 기회를 잡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기회라면 그것을 놓치는 사람이 실패하는 사람이고, 잡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흔히 얘기하지만 요는 그것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잡고, 기회라고 생각지 않는 사람이 놓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해를 누가 기회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제자들만 기회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박해를 기회로 생각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든 그리고 무엇이든 기회로 생각할 것이며, 주님을 증언하고 자기의 사랑을 증거 할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아무튼, 제자의 운명은 박해를 피할 수 없고,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박해를 주님을 증언할 기회로 삼아야 함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 세상에서 희망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내게 하는 반대 받는 표적인 우리를 이 세상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끝까지 참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참아나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은 참아내는 힘은 무엇일까요? 제가 힘들었을 때를 생각하니 대학에 다니며 저와 동년배들이 TV에서 잘나가는 것을 볼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도 돈을 벌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단돈 500원이 없어서 학교 구내식당에서 파는 점심을 굶고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휘재 씨 같은 경우는 “그래, 결심했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말도 안 되게 웃기고 또 말도 안 되게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같은 나이의 처지로서 어떤 벽을 느꼈습니다. 언젠가 노력하면 무엇이든 다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런 사람처럼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짓눌렀습니다. 이러한 절망감이 저를 힘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희망’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세상에서는 희망할수록 희망의 힘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56회에 일찍 성공을 거둔 후 실패를 맛보고 오랫동안 ‘자발적 외톨이’로 살아온 태사자 김형준 씨가 나왔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사실 우리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어느 정도 실패하기에 우리가 실패했을 때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형준 씨는 공부를 상당히 잘해서 대학에 4년 장학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획사에서 큰 계약금을 준다고 하며 김형준 씨를 불렀습니다. 그에게 돈과 인기는 매우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금을 부모님 돌려주지 않고 친구들과 돈을 쓰러 다녔습니다. 기획사에서 받을 계약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 학기 학점 2가 안 되어 학사경고를 받아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명해지면 되니까. 하지만 계약 자체가 자신에게는 거의 돈이 떨어지지 않는 계약이었습니다. 인기는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매달 80만 원씩 받아서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 안 좋아진 것은 태사자까지 해체하게 된 것입니다. 김형준 씨는 사람들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으며 나이가 46세가 될 때까지 자발적 외톨이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전의 자기 모습을 알고 있던 이들로부터 전화 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너무 우울한 나머지 뭐라도 해야 하겠기에 택배 일한다고 합니다.
일찍 성공했지만 오랜 시간 살아갈 힘을 잃었던 김형준 씨가 다시 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희망해야 합니다.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는 또 다른 희망이 생겼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을 희망해서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쳐가던 대학 때 힘을 얻게 해 준 것은 종교였습니다. 저는 그때 잘나가던 저의 또래들을 보며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만약 내가 천국 가고 저들이 지옥 간다면?’이라는 몹쓸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극단적인 생각을 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은 저에게 다시 살 힘을 주었습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해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희망할 때는 오히려 희망의 힘을 잃습니다. 희망은 하늘의 것입니다. 하늘에 있어야 힘을 얻습니다. 땅에 묻히면 힘을 잃습니다.
희망도 총량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를 희망하면 하나는 덜 희망하게 됩니다. 나뭇잎을 먹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을 때 나비는 더는 나뭇잎을 희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꽃을 희망합니다. 그래서 나뭇잎이 없어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내가 희망하는 대상이 있는 곳에 나도 살게 됩니다. 천국을 희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천국에 가면 우리는 우리가 잃었다고 착각할 것까지 다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죽음 뒤의 세상을 희망하라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희망하며 희망을 잃고 사는 삶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이 세상의 고통을 참아내기도 아주 쉬워집니다.
지옥문 앞에는 “이곳에 들어오는 이은 희망을 버려라!”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희망하면 희망을 잃습니다. 항상 나와 비교되고 내가 범접하지 못할 업적을 이루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희망은 절망의 씨앗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세상 것들을 희망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 삶이 힘들어지고 행복 지수가 떨어집니다. 심지어 자살률이 1위입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하라고 하는 이들은 오히려 이 세상을 힘들게 살도록 만드는 이들입니다.
희망은 하늘의 것입니다. 그 희망이 이 지상의 것에 쓰인다면 힘을 잃습니다. 마치 경유 차에 휘발유를 넣는 것과 같습니다. 경유 차에 휘발유를 넣어도 괜찮을까요? 다 망가집니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빼내고 다시 경유를 채워 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희망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그런데 지상의 것을 희망하면 고장 납니다. 연료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나의 존재가 바뀌어야 합니다.
단편영화 ‘슬픈 남자’(The Sad Man)이 있습니다. 그는 늘 혼자입니다. 혼자 행복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슬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줍니다. 그는 행복합니다. 그런데 여자아이가 남자의 가면을 벗기자 남자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아이를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또 우울해합니다. 아니 그것을 행복이라 여깁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려면 좋아하는 것을 바꾸면 됩니다. 그러면 그 좋아하는 것에 맞게 나도 바뀝니다. 내가 바뀌지 않고 계속 나뭇잎이 없다고 우울해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하는 것에서 천국의 것을 희망하는 것으로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그 즉시 다시 삶의 에너지가 솟습니다. 본래 희망은 하늘의 것이고 하늘의 것을 희망할 때 작동합니다. 꿀은 애벌레에게 어떤 에너지도 주지 못합니다. 먼저 나비가 되어야 꿀이 에너지가 되듯, 천국을 희망해야 희망이 나에게 에너지가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평생 함께할 배우자가 지녔으면 하는 특성은 무엇일까요?
당신은 평생 함께할 배우자가 지니고 있었으면 하는 특성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할 특성은 무엇일까요?
영국 스완지대 연구진은 59개국 젊은이 2,400명을 대상으로 평생 함께할 배우자가 지녔으면 하는 특성을 조사했습니다. 선택지에는 외모, 재력, 종교, 유머, 자녀 계획, 창의성…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가장 많은 이가 ‘친절’을 꼽은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평생의 만족을 따져보니, ‘친절함’이 제일 중요한 덕목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친절한 사람은 실제로 인기가 많아서 주변에서 많은 이가 함께합니다. 그에 반해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면서 자기만을 챙기려는 사람에 대해서는 함께하기 힘들다며 거리를 두지요. 종종 외모도 괜찮고, 능력도 많고, 재산도 있는데도 왜 결혼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평생 함께할 사람이기에 보이지 않는 부분, 특히 함께할 때의 편한 마음을 줄 수 있는 ‘친절’ 등의 가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을 전 세계 젊은이 모두 공통으로 본다는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외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보다, 내적으로 숨겨져 있는 부분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결혼만을 위해 내적 성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함께할 수 있는 공통점이 바로 친절 등의 내적 가치에 있기에 모두 실천해야 할 덕목이 되는 것입니다.
종말에 일어날 일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어떤 일에도 대처할 각오를 하라고 이르십니다. 특히 박해에 대해 말씀하시지요. 임금과 총독 앞에 끌려가고,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예수님 따르는 사람을 넘겨 죽이기까지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이 ‘인내’라고 하십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희망을 바라보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이 ‘인내’가 영원한 생명인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모든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실컷 부려 먹으려는 꼬봉(종)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함께할 친구로서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께하려는 주님 모습에 우리는 어떻게 함께하고 있습니까? 혹시 자기 자신만 챙겨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인내’를 갖춰, 진정한 내적 성장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장애는 불편하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
- 헬렌켈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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