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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2022년 10월 13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에페 1장 1-10절)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1장 47-54절)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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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복음
루카 11장 47-54절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준수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10월 13일 (목)
김준수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10월 13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선택된 사람들
우리는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 에페소서의 시작에 나오는 찬미의 노래를 듣습니다(에페 1,3-14 참조).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이 찬가는 삼위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리고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조명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이 찬가에 소개되는 모든 행동의 주체로 드러나십니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으며,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찬가는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행위들이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신 것입니다(1,3-4 참조).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분리됨 없이 일치하여 활동하심을 봅니다. 여기에 우리가 받은 인장이며 앞으로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시는 성령께서 함께 언급되시면서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모두 구원 활동에 참여하심이 드러납니다(1,13-14 참조).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 활동은 결국 ‘우리’를 위하고 ‘우리’를 향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놀랍게도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으로 드러납니다. 아주 오래전 세상 창조 이전으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곧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맨 처음의 시간 개념보다도 훨씬 전에,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고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정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신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1,6.12.14 참조).
우리는 삼위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아주 오래전부터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가 바치는 마침 영광송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적임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사랑의 가교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에페소서 1장으로 바오로의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과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셨는데, 그 은총과 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의 신비를 우리가 알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이런 관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은총과 복을 내려주시는 하느님, 곧 사랑의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은총과 복을 받는 우리, 곧 사랑받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은총과 평화와 온갖 영적인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아니 계시면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를 더 전율케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순간적인 사랑이나 갑작스럽고 우발적인 사랑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숙성된 사랑이라는 것이고, 그러니 나라는 존재도 갑자기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 엄청난 사랑에서 공들여 생겨난 소중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이런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고, 자신이 태초부터 계획되고 선택된 소중한 존재란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느끼라고 만들어진,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가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 말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그리스도는 그리고 우리는 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하느님 사랑의 가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이어집니다.
저 하늘서부터 이 땅의 우리에게까지, 그 옛날 태초부터 지금 우리에게까지.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신앙에 기도와 공부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
영화 ‘식스 센스’(1999)에서 말콤은 실력 있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어린이들을 잘 치료해서 주지사에게 상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치료해주던 한 아이에게 총격당합니다.
몇 달 뒤 말콤은 콜이라는 아이를 맡게 됩니다. 자신이 실패했던 그래서 자신에게 총을 쏘았던 그 아이와 같은 증상입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려 다짐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문제를 자세히 검토합니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말콤에게 있었습니다. 말콤은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총을 쏜 아이와 마찬가지로 콜도 귀신을 보고 있었습니다. 의사로서 이는 믿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믿어주기로 합니다. 가르치고 치료하는 자세에서 배우고 치료받는 자세로 바꾸기로 한 것입니다.
콜의 말을 믿어주니 방법도 떠올랐습니다. 콜에게 나타나는 귀신들의 원한을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무서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정말 원한을 풀어주니 귀신이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로 보일 뿐입니다.
이번에는 콜이 말콤에게 말합니다. 현재 말콤은 아내와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콜은 말콤에게 아내가 잠들었을 때 말을 해 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내는 말을 잘도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지는 자신의 결혼반지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동안 자신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실상은 전에 총을 맞아 죽었었고 자신도 귀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혀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시며 어린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을 존중한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배우려 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누군가를 공경한다는 말이 가능할까요? 그 누군가에게서 받은 사랑도 있겠지만 분명 받은 가르침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가르침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후손들이 만들고 있다는 것으로 그들의 소행에 동조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책임을 지금 세대들이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만약 그들이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러면 그들은 예언자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거나 줄어듭니다. 하지만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그들은 예언자를 알아볼 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박해하니 그들은 몰라서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박해하는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 당신이 예언자심을 밝히셨습니다. 예언자들이 하려던 말이나 예수님께서 하시려던 말씀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죄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언자들의 지식을 배웠다면 예수님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무덤을 만들고 그리스도를 경배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닮은 예언자들이 오면 어떨까요?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는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면 교회에서 환영받을까요?
예수님은 모시면서도 그분의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에나 해당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시에만 해당하는 말을 단 한마디라도 하셨을까요?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 자체이신 분이 당시에만 해당하는 말씀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십일조 이야기하면 대부분이 반대합니다.
‘지옥’에 관한 이야기도, ‘심판’에 관한 이야기도,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도, ‘선교’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교리에서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말해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성인들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이것이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섬기는 척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부터 회개해야 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전에 어디서 읽었던 예화 내용을 제 생각대로 정리해봅니다. 어떤 선교사가 문명을 접해보지 못한 아마존의 오지로 들어갔습니다. 선교사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에게 문명의 이로움을 알려주며 호감을 얻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들에게 신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선교사가 나이가 들어서 죽을 때가 되자 선교사는 자신의 가르침을 책 한 권에 그들 언어로 써서 그들에게 남겼습니다. 부족은 선교사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책 한 권을 소중히 간직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게 우선 사제만 볼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사제도 그 책을 보기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사원을 만들어 가장 깊숙한 곳에 책을 숨겨두고 매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도 만족하지 못한 부족은 분실할 위험을 없애기 위해 아예 금고에 넣어놓고 일 년에 한 번만 꺼내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에게 많은 이익을 준 선교사를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가 알려준 대로 신앙을 지켜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과 진리를 주십니다. 성찬의 전례와 말씀의 전례입니다. 성물방에서 보면 성물과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행히 하.사.시.를 읽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책이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진리의 열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은총을 위해 기도는 하되 공부는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와 공부의 균형이 맞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책을 묻어놓고 선교사만 기리는 부족처럼 되지 않습니다.
레지오 회합에서도 맨날 교본만 공부합니다. 하지만 교본에서는 프레시디움이 생긴 지 처음 몇 년만 교본으로 하고 나머지는 영적독서를 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실제로는 교본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10년을 레지오를 했다면 적어도 영적 독서 10권은 읽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본만 읽으며 지식을 쌓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묵주기도의 은총과 영적 독서의 균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지식의 열쇠’는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은총의 열쇠와 함께 지식의 열쇠도 간직한 우리 공동체가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Nothing.
미국 네바다주 사막 한복판에서 낡은 트럭을 몰고 가던 ‘멜빈 다마’라는 젊은이가 허름한 차림의 노인을 발견하고 급히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어디까지 가십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라스베이거스까지 태워주길 청했고 청년은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서는 25센트를 주며, “영감님! 차비에 보태쓰세요.”라며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면서 명함을 청해서 받았습니다.
시간이 꽤 흘러서 뉴스에 ‘세계적인 부호 하워드 휴즈’ 사망이라는 기사와 유언장이 공개되었습니다. 하워드 휴즈는 영화사, 방송사, 비행기 회사, 호텔, 카지노 등 50개 업체의 회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언장 중에 자기 유산의 1/16을 ‘멜빈 다마’에게 증여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일생 중 가장 친절한 사람이라는 메모가 있었습니다.
멜빈 다마가 받은 유산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2,000억 가량이었습니다. 낡은 트럭을 태워준 친절과 25센트의 차비가 2,000억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친절이라는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은 이렇게 큰 가치를 만듭니다. 이 세상에서 그 가치를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께서 보답해주실 것입니다. 이 점도 하워드 휴즈가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가 죽기 바로 직전 남긴 단 하나의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Nothing”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남기는 것 하나 없는 삶, 하늘나라에 자기 자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을 거부하는 삶이 아닌,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를 향해서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오히려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죽이고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이신 예수님까지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어떻게 하면 옭아맬 수 있을지를 계속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종교 지도자들의 이런 모습이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할까요? 또 하느님 나라에 자기 자리를 널찍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들이 보여줬던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아닌 이 세상 안에서만 힘 있는 모습일 뿐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것에 온 힘을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것을 기울여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생에는 두 가지 삶이 있다. 하나는 기적 같은 건 없다고 믿는 삶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는 삶이다. 내가 생각하는 인생은 투자의 삶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건네고 아프게 사라진 모든 예언자의 피를 기억합니다. 예언자들의 피는 사라진 기억이 아닌 오늘을 다시 살게하는 정신이며 역사를 다시 정신 차리게하는 준엄한 가르침이 됩니다. 지난 날의 과오를 더이상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피로 얼룩진 우리의 역사입니다. 떨쳐 버릴 수 없는 피조물의 모순된 폭력의 그림자입니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도 없습니다. 진정한 역사의 만남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 이 상황을 바로 보려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자세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과거를 뼈저리게 반성하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됩니다. 반드시 거쳐가야 할 반성의 여정입니다. 모든 공동체는 책임을 먹고 자라납니다. 책임은 서로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뜨거운 가슴에서 참된 가치를 발휘합니다.
책임은 가장 중요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몸과 마음의 책임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회개는 생활의 책임감 공동체의 책임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성숙한 책임감은 성숙한 사랑임을 믿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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