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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는 유산을 버리고 집을 떠나 보잘것없고 가난하게 되었지만, 주님이 그를 들어 올리셨네.
2022년 10월 4일 화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갈라 1,13-2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0,38-42)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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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복음
루카 10장 38-42절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인혁 타대오 신부 강론
2022년 10월 4일 (화)
조인혁 타대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10월 4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어쩌면 우리 안에도 이런 옹졸함이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자매 가운데 누가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보이십니까?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칭송을 받지만, 사실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은 그녀의 언니 마르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마르타가 겪는 마음의 동요와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여기서 ‘분주함’이란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움직인다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뿐만 아니라, 마음이 흩어지고 어지러운 상태도 포함합니다. 사실 마르타도 예수님 말씀을 듣고 싶어서 그분을 집에 초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귀한 손님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해야만 하였고, 마르타가 그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발치에 앉아 속 편하게 말씀을 듣고 있는 철없는 동생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언니 입장에서 화가 날 법도 합니다. 참다못한 마르타는 동생이 자신을 거들게 해 주십사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언니가 동생에게 직접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집에 온 손님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큰 결례이지요. 그러나 마음이 복잡해진 마르타는 그런 요청이 실례가 되는지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 초대되신 예수님께서 사소한 집안싸움의 중재자로 전락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하느님 말씀을 듣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질투심에 사로잡힌 인간의 전형을 비추기도 합니다. 마르타는 그분 말씀이 듣고 싶어서 예수님을 집에 초대하였지만, 나중에 가서는 동생이 말씀을 들을 기회마저 박탈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그런 옹졸함이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누리지 못할 바에는 남도 누리지 못하길 바라는 질투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그것은 긍정일까, 부정일까?
디저트 브랜드 라라브레드의 ‘강호동’ 대표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15년 동안 기초생활 수급자였고 학력은 중졸입니다. 그리고 피가 나면 멈추지 않는 혈우병을 앓고 있는 남자였습니다. 혈우병을 치료하기 위해 한 달에 150만 원이 필요했지만, 어머니는 분식집 일로 90만 원밖에 벌어오시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선생님도 “너 혈우병 있다며? 1년 동안 가만히 있어”, 친구들도 “넌 우리랑 다른 괴물이야”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를 이끌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고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그를 절망에서 구해준 것은 바로 ‘책’이었습니다. 나의 앞길을 밝혀줄 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절망이라고 생각했던 인생에서 『헬렌 켈러』라는 책을 읽은 뒤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이후 길은 책에 있다라는 생각으로 2,000권의 책을 더 읽고 100억 자산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17세 되었을 때 정주영 회장의 책을 읽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집에서 소 판 돈을 훔쳐서 서울로 상경한 이야기를 읽고는 그도 집에 있는 돈을 훔쳐서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재혼하였지만, 이복형제들이 매일 구타하여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성년자가 일할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노숙 생활하며 접시를 닦아야 했습니다.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모았지만, 책을 읽는 곳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길을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으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해. 그냥 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야!”라며 길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강 대표는 8년 동안 1억 이상을 모아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서 호프집을 열었습니다. 물론 잘 안되었습니다. 아무리 전단을 뿌려도 안 되었습니다. 그는 또 책에서 길을 찾았습니다. 당시 인터넷 블로그가 활성화될 때라 그것을 통해 홍보하기로 한 것입니다. 책을 읽으며 인터넷 홍보 방법을 터득하고 이웃 가게를 먼저 무료로 홍보해주고 거기서 생긴 비법으로 직원이 20명 넘는 홍보회사를 만듭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사업이 잘되어갈 때 아내와 함께 홍콩에서 먹었던 에그타르트 맛이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역시 책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당시 디저트 사업이 매년 25%씩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디저트 사업에 투자하였고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챙기는 것 같아서 자신이 건물을 사들이어 그곳에서 자기 가게를 차렸습니다. 그러자 부동산 수입이 더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책에서 길을 찾은 덕분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책이 아니면 나는 성공 못하고 가난은 평생 대물림되고 죽거나, 결혼도 못 하고 행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강호동 대표는 누구에게도 자기 앞길을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일하기 바쁘셨고 선생님은 환자 취급했고 친구들은 괴물 취급하였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그에게 길을 알려준 것은 책입니다. 그는 책에서 주는 영감으로 움직였습니다. 만약 그전에 움직였다면 어땠을까요? 실패만 계속 연속으로 거듭하다 안 좋은 결과를 맞았을 것입니다. 책은 많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보고 이렇게 하면 좋고 저렇게 하면 나쁘다는 것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책 속에서 영감을 받는다면 그 길이 대부분은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습니다. 이것이 겸손함입니다.
우리 앞길을 밝혀주는 책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성체로 우리 안에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가장 완전한 길을 알려주려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 곳을 모르면서도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모습으로 마르타가 나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주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지 않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십니다. 자기 집을 봉헌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체를 영하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응답이 없으면 긍정으로 보아야 할까요? 어떤 종이 그렇게 행동할까요? 종은 주인의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주인 없는 집이 되어 강도들에게 약탈당하고 맙니다.
1사무 13,1-14에 ‘사울의 제사’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울이 왕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사울의 아들 요나탄이 필리스티아 군대를 건듭니다. 그래서 필리스티아 군대가 엄청난 군대를 이끌고 사울 앞으로 옵니다. 예언자 사무엘은 자신이 7일 내로 와서 제사를 지내고 주님의 뜻을 묻겠다고 전갈을 보냅니다.
하지만 사울의 군사들은 적수가 되지 않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떱니다. 바위 뒤에 숨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심지어 탈영하는 군사까지 생깁니다. 마지막 일곱째 날 사울은 자신이 제사를 지내고 하느님의 뜻을 묻습니다. 제사가 끝났을 때 사무엘이 옵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주님께서 사울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다른 이에게 왕권을 주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사울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줄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응답이 없다면 그냥 있어야 합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아무것도 안 해야 합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승리를 주십니다. 주님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는지. 끝까지 참고 주님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주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이 좋은 사례가 판관기 6장에 나옵니다. 바로 기드온 판관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미디안 압제로부터 구원하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믿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시험합니다. 하루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 달라고 하고 다른 날은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렇게 명확하게 하느님의 뜻을 묻는 기도온에게 하느님은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어차피 하느님 뜻은 아주 명확하게 오는 일은 거의 드뭅니다. 어떤 확신이 오면 행동해야 합니다. 다만 그 확신이 찰 때까지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필요한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가 있었습니다. 차라리 자녀를 낳아 신학교 보내겠다고 말씀드리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원한다!”
어쩔 수 없이 신부님께 사제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빨리 예비신학생에 등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가 5월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적어도 1년은 예비신학생을 해야 하는 것인데 저는 몰랐습니다. 확신이 올 때까지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뜻이 주님 목소리를 묻히게 하지 맙시다. 마리아처럼 항상 듣는 마음으로 내 안에 계신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인생에 있어서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다양한 방법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 때문에 커다란 트라우마를 안고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이니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줄 것 같지만, ‘너를 잘 알고 있다’라는 단정적인 생각으로 오히려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도 못한 사람이 부모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트라우마로 힘든 삶을 살았던 아주 유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독특한 그의 그림에 세상은 ‘창조적’이라고 했지만, 그의 부모는 이 그림을 보면서 고흐가 ‘미쳤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라면서 화를 내곤 했다고 합니다.
만약 고흐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쉽고 어여쁜 그림, 그리고 사실적이고 바람직한 그림만 그렸다면 어떠했을까요? 부모에게 인정받고 특별한 사랑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흐는 가족과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받는 작품보다 자신이 생각했던 궁극의 아름다움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을 찌르는 듯한 ‘해바라기’가 탄생했고, 마음속의 불꽃놀이를 떠올리게 하는 ‘별이 빛나는 밤에’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부모 자녀 간의 간격이 세상에서 가장 먼 사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그런데, 나의 이웃들과는 어떨까요? 나의 편견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또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떤 좋은 관계도 형성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가장 먼 사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그러자 마르타는 분주하게 예수님 시중을 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마르타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주님의 일을 함께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마리아처럼 주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집중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 밖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틀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면서, 자기의 방법만 맞는 것으로 주님께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라고 하십니다. 마리아의 선택만 옳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법이 다 틀리지 않았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이지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방법도 틀리지 않다는 원칙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나아가는 다양한 길을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
- 생텍쥐페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한가지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통한 자기변화입니다. 가난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인 성 프란치스코의 맑은 삶이 우리의 오늘을 비춰줍니다. 복음적 가난을 선택한 삶은 하느님과 이웃을 속이지 않습니다.
사랑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참된 회개는 가난을 가난은 정신을 만들며 살아계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기쁨을 보여줍니다. 가난은 온전한 생명이며 온전한 성장이 됩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가난의 삶은 바로 자신을 낮추는 참된 행복입니다.
참된 가난은 양극단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자신의 위치를 알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모든 것과의 소통이었습니다. 소통은 생명의 참모습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깨우쳐줍니다. 삶의 질적인 변화는 마음의 참된 변화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자체에 행복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작은 언제나 자기 자신부터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소유가 아닌 사랑을 모든 것을 나누는 사랑이 가난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가난은 계산할 것이 없어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삶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가난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맛은 맑은 가난의 맛 청빈입니다. 오늘도 작은 빵으로 부유한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가난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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