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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
2022년 6월 10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그의 뒤를 이을 예언자로 엘리사를 세우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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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5장 27-32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도훈 라파엘 신부 집전
2022년 6월 10일 (금)
김도훈 라파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파비아노 레베쟈니 파비아노 신부 집전
2022년 6월 10일 (금)
파비아노 레베쟈니 파비아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강한 바람에도, 사나운 지진에도, 뜨거운 불 속에도 주님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불이 지나간 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엘리야를 부르십니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에 주님을 위해서 열정을 다하여 험한 길을 걸어왔고, 이제는 홀로 남아 적들에게 목숨마저 빼앗길 위험에 놓인 엘리야의 고백과 한탄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또 다른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끊임없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예언자는 늘 하느님과 대화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구원을 위해서 죽기까지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예언자의 역할은 오늘날 주님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선택된 우리를(필리 2,15 참조) 통해서 계속됩니다.
오늘 복음은 간음과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단호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이는 여섯 개의 대당 명제(마태 5,21-48 참조) 가운데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드러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탐욕을 경계하십니다. 죄의 충동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과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어서, 눈과 손은 마음먹은 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기관인데, 예수님께서는 온몸이 죄를 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육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게 하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풀 수 없다는 혼인의 불가 해소성의 바탕 위에 남편과 아내가 서로 충실한 신의로 혼인 유대를 계속 이어 가기를 바라십니다.
육의 탐욕이 넘쳐 나고, 거룩해야 할 가정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는 어지러운 이때에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을 떠올리며 용기를 냅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3.8).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엘리야의 두려움과 하느님 체험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오늘 독서의 엘리야는 동굴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동굴에 있습니까? 그것은 동굴에 숨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다시 왜 동굴에 숨었습니까? 두려움 때문에 숨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다시 무엇이 왜 두렵습니까?
엘리야와 관련하여 이런 질문이 계속되는 오늘인데 자기를 죽이려는 이제벨이 두려워 숨은 것이지만 실은 이제벨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있지 않아서 두려운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지 않으면 이제벨 뿐 아니라 개도 두렵고 개똥이도 두렵습니다.
왜냐면 두려움은 사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내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되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최악을 각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 하나라면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다른 하나이고 이것이 더 완전합니다.
최악을 각오한다는 것은 뒤집으면 선을 하나도 기대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내 문 앞까지 실제로 와있음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되기까지는 프란치스코처럼 최선에서부터 마지막 하나 쥐고 있던 선까지 포기하는 가난과 작은 악에서부터 가장 싫어하는 악까지 껴안는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최악을 각오하게 되고 두려움이 없게 되었어도 오늘 엘리야에게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인간은 다시 두려움 앞에 서는 존재이고, 그래서 오늘 엘리야처럼 다시 하느님 앞에 서야 되는 것이 또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내 앞에 있을 때 의지적으로라도 주님께 몸을 돌리고 오늘 엘리야처럼 하느님께서 나타나주시기를 바라고 기다려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인간은 죄의 쾌락을 위해 기꺼이 지옥을 선택하는 존재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음란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눈으로 죄를 짓지 말고 차라리 눈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실까요? 진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혼자 힘으로는 죄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륜을 다룬 영화 ‘언페이스풀’(2002)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뉴욕 맨하탄의 어느 고급 저택에 결혼 10년 차 부부인 에드워드와 코니는 8살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는 그들에겐 권태기나 불신은 없어 보입니다.
어느 날 코니가 시내로 쇼핑을 나갔다가 낯선 남자와 부딪혀 다치게 됩니다. 친절한 프랑스 남자는 바로 자기 집 앞에서 그녀를 치료하고 보내면서 책 한 권을 선물하게 됩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가장 싼 와인이라도 보내줄 걸 그랬다며 아내를 놀립니다.
코니가 그가 준 책을 보다가 그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종이를 발견하게 되고, 거리를 걷다 그의 생각이 나서 고민 끝에 전화합니다. 그날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 그녀에게 집에 잠깐 들러 커피라도 먹고 가라고 합니다.
그의 집에 잔뜩 긴장한 채 들어온 코니는 화려한 언변 술에 끌려 들어가고 자연스러운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괜한 죄책감에서였던지 남편에게 들러 선물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폴에 생각으로 가득 찼고 다시 그를 찾습니다. 자연스럽고 대담한 손길로 폴의 관심에 응대합니다. 죄책감에서인지 집을 나오지만 놓고 온 코트를 가지러 다시 들어갔다가 자기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합니다. 코니는 돌아오는 기차에서 죄책감을 이기는 이상야릇한 일탈의 쾌감을 느낍니다.
에드워드는 자기 동료를 통해 코니가 거짓말한 사실을 알게 되지만 ‘설마 아내 코니가?’라는 생각에서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다. 남편의 어설픈 눈치도 알지 못한 채 점점 폴과의 관계에 빠져들게 된 코니는 그 행동 수위에 대담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고 에드워드의 부하직원에게 들키게 됩니다.
에드워드도 자신을 대하는 코니의 모습과 거짓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점점 더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대화 도중 외도가 가져오는 파경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에 걸렸던지 코니는 폴에게 헤어지자고 합니다. 하지만 몸은 계속 폴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쾌락의 맛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에드워드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부하직원과 언쟁 끝에 싸우게 되자 그에게 가족 간수나 잘하라는 막말을 듣게 되고 흥신소에 아내의 추적을 맡기고 시카고로 1박 2일 출장을 갑니다. 코니는 또 나쁜 아내 나쁜 엄마가 됩니다. 코니는 아들 픽업까지 놓칩니다.
아들에게까지 사랑을 주지 못하게 된 자신을 보며 코니는 정말 이 관계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며 폴을 찾았는데, 폴은 다른 여자와 즐기고 있었습니다. 질투에 눈이 먼 코니는 여자를 폭행하고 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점점 더 나락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사진으로 아내의 불륜을 확인한 에드워드는 폴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를 하나의 노리갯감으로 여기는 폴에 분노가 치밉니다. 그리고 자신이 코니에게 선물한 커다란 유리구슬이 폴의 집에 있는 것을 보고는 우발적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칩니다. 폴은 사망합니다.
에드워드는 자수하려 합니다. 그러나 폴이 죽은 지 모르고 그에게 헤어지자는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는 가정을 위해 그의 시신을 처리하고 아내와 함께 아들 학예회에 갑니다.
그런데 경찰이 들이닥칩니다. 폴의 살인이 일어난 집에서 코니의 전화번호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코니는 폴이 죽었다는 소식에 적잖게 놀랍니다. 그리고 세탁소에 맡기러 간 에드워드의 옷에서 자기 불륜 사진을 보고는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둘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함께 계속 살아야 할지, 아니면 자수해야 할지를 두고 경찰서 앞에서 고민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욕 자체가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욕구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
일단 욕구가 커지면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그 욕구보다 더 만족시킬 행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배고 고프면 다른 행복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음욕이 증가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욕구를 증가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생각’입니다. 뱀은 하와와 대화를 통해 하와의 욕구를 증가시켰습니다. 뱀이 하와와 대화하는 것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면 욕망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결코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눈을 빼고 손을 자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를 미워한다는 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쾌락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죄에 떨어집니다. 사실 인간은 지옥에 갈지 알면서도 죄의 쾌락을 선택하는 약한 존재입니다.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2000)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대학생 때 사랑했던 여자를 잃었는데, 교사가 되어 그 여자가 환생한 남자를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동성애는 이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은 다음 생에서는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이기를 바라며 줄을 매지 않고 번지 점프대에서 함께 뛰어내립니다.
환생이 100% 확실하다면 모를까, 그리스도교 교리 안에서는 자살은 지옥에 갈 확률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도 이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인간은 즐거움을 위해 지옥에 가는 것까지 감수할 미련하고 약한 존재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번지 점프를 하기 전에 아파할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님과 형제들, 친척과 친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만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어떤 가정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음란한 동영상과 행위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죄를 끊고 싶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이 죄를 끊게 해 달라고 청했는데도 매번 그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이 죄를 지으면 고통스러운 벌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날도 지방으로 출장을 가서 모텔에서 틀어주는 음란한 영상을 보고 죄를 지었습니다. 다음날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위독했습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건강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럴 수 있다고 여겼지만, 왠지 찜찜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출장을 갔습니다.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가 교통사고로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나의 죄와 내 주위 사람들의 고통이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가족을 위해 죄를 이겨냈습니다. 그랬더니 아팠던 어머니가 의식을 찾고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분이 그 죄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내도 사랑하지 않고 자녀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해 준 대상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나를 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영화 ‘침묵’은 스승이 일본에서 선교하다가 종교를 저버리고 일본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자 신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로드리고 신부도 결국엔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침묵하시는 후미에라 불리는 예수님의 그림을 발로 밟아야 했습니다.
주저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후미에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주여, 저는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원망했습니다.”
“나는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다.”
로드리고가 예수상을 밟는 순간 새벽닭이 웁니다. 그 옛날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때 베드로의 괴로움을 예수께서 이해하시고 용서하시며 함께 괴로워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아파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유일하게 나를 가장 완전히 사랑하신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진정 죄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결혼은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진짜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아는 자매님으로부터 남편과 부부 싸움을 심하게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왜 싸우셨는데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별것도 아닌 것으로 다투었다면서, 왜 이런 것으로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사건의 원인은 커피였습니다. 식사 후에 “커피 타드릴까요?”라고 물으니 “좋지~~ 고마워.”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하게 탈까요? 연하게 탈까요?”라고 묻고, 설탕을 몇 스푼 넣을지도 물었답니다. 그러자 남편이 함께 산 지가 몇 년인데 자기 취향도 모르냐고 버럭 화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자매님은 너무 억울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타 주려고 물은 건데 이게 화낼 일에요?”라고 따졌답니다.
결혼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30년 넘게 같이 살았어도 싸운다고 하더군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결혼은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진짜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서로 통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닐까요? 서로 통하지 않기에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하기 위해, 진짜로 통하기 위한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이혼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맞나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라 말씀하시고, 아내를 버리는 자도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라고 하시지요.
우연히 인터넷에서 실험 카메라 영상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몸매가 좋은 여성이 몸에 꽉 끼는 옷을 입고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쳐다볼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몇 명이나 쳐다보았을까요? 남녀노소 상관없이 거의 모든 사람이 바라보았습니다. 만약 이를 보고 음욕을 품게 되었다면 모두 눈을 뽑아버려야 할까요?
눈이나 손은 마음이 결정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지체를 빼거나 잘라 버리라는 말은 곧 그러한 마음을 빼버리고 잘라 버리라는 의미였습니다.
잘못된 마음을 모두 빼고 잘라 버리면서, 오로지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을 위해 사랑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사랑할 수 없다고 단정을 지어서는 안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은 따로 없다. 오직 우리의 생각에 달렸다.
- 셰익스피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마태 5,29)
모여 살기에 마음의 질서가 필요하다. 올바른 실천의 시작은 언제나 우리들 결심에서 시작된다. 하느님을 벗어나면 욕망을 채우려는 우리들 본능만 남는다. 본능으로는 아무 것도 만날 수 없다.
하느님을 만나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야 한다. 하느님 없이는 사람의 삶은 아름다울 수 없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신앙은 더 좋은 것을 위해 빼어 버리고 잘라 버리는 회개의 참된 여정이다.
참된 사랑 참된 관계는 결코 욕망에 갇혀있지 않다. 갇혀있지 않기에 더 깊어질 수 있는 봉헌이다. 봉헌의 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비워야 충실할 수 있는 사랑의 관계이다. 그래서 마음은 하느님을 가장 필요로 한다.
하느님을 품고 바라보는 세상 참 아름답다. 보시니 참 좋은 관계가 사람이 걸어가야 할 사람의 길이며 사람의 마음이다. 병든 마음을 되살리시는 마음의 의사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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