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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
2022년 6월 8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야의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시자, 온 백성이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라고 부르짖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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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5장 17-19절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도훈 라파엘 신부 집전
2022년 6월 8일 (수)
김도훈 라파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6월 8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산에서 하느님과 바알 신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홀로 남은 주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대결합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주 하느님의 권능을 청합니다. 마침내 하늘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함께 있던 모든 것을 태워 버리며, 하느님의 위엄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미 주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을 체험하여 알고 있으며, 우리가 믿는 주님이야말로 전지전능하신 참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시편 16[15],1)라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깁니다.
구약의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구약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당신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정신을 십자가의 신비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참스승이시며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완성된 율법과 계명, 십자가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며 하늘 나라를 위한 보화를 쌓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엘리야의 고독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는 카르멜산에 있습니다. 임금을 비롯한 이스라엘 온 백성 앞에 있고 그들 앞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러 와 있습니다.
현재 그는 혼자 남은 주님의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엘리야의 고독에 대해 묵상하고자 하는데 첫째로 그의 고독은 자신이 선택한 고독입니다.
제 생각에 그도 분명 고독이 두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거짓 예언자 450명 가운데 있는 것을 택할 수 있었지만 그는 혼자 남는 고독을 선택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고독이 두려워 죄 짓는 것을 선택하곤 합니다. 없는 사람을 흉 볼 때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그런 얘기하지 말자거나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심하게 성찰하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고백성사를 보는데 남을 흉 본 것과 고독을 두려워한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문제일까요?
남을 흉 본 것은 죄라고 생각하고 고독을 두려워함은 죄라기보다는 약함이라고 생각하기에 흉 본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고독을 두려워함이 더 큰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흉 본 것은 결과일 뿐 고독을 두려워함이 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뿌리 없는 열매 없듯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원인이 있기에 그 결과가 있는 것이니 원인이 언제나 더 문제지요.
아무튼, 우리는 고독을 죄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같은 맥락에서 왕따를 두려워하며 그래서 아이들의 경우 그 두려움 때문에 더 두려운 것인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미성숙한 아이에게는 왕따가 죽음보다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고독할 줄 아는 것은 성숙함이고, 고독할 줄 알고 고독을 견딜 수 있어야 어른입니다.
둘째로 엘리야의 고독은 하느님을 위한 고독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느님을 선택한 고독이고, 하느님의 진실을 알려야 하는 예언자의 고독입니다.
이렇듯 예언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은 제 생각에 예외없이 고독하고 그러기에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어쩌면 예언의 사명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셋째로 엘리야의 고독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고독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고독이기에 하느님께서도 그와 함께 계시는데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해 고독을 선택했는데 하느님을 느낄 수 없고 그래서 하느님 없이 고독을 견뎌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무서운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마더 데레사 같은 분들이 바로 이런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영혼의 어둔 밤을 체험하시면서도 믿음을 사신 분들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영적 지도자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하지요.
"하느님이 나를 원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이 하느님이 아니시고, 하느님이 진짜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끔찍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사실 하느님은 많은 경우 아니 계십니다. 아니, 아니 계신 듯이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는 그리고 우리도 예언의 삶을 산다면 고독한 믿음을 살고 믿음의 고독을 사는 존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무엇을 하든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라.
1932년 LA 올림픽 때 이반 펠레 선수는 뜀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런데 ‘저건 나도 하겠다’라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2012년 런던 올림픽 때의 양학선 선수의 모습을 보면 가히 신기할 정도로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그러면 이반 펠레 선수는 연습을 게을리했던 것일까요? 그는 그 해 올림픽의 2관왕이었습니다.
1908년에는 남자 다이빙 경기에서 공중 2회전이 금지되었습니다. 너무 위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10살만 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왜 발생하는 것일까요? 당시에는 그런 기술들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 대단한 존재인지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못 한다고 믿으면 못 하고 한다고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나를 만들어준 분에게서 옵니다. 이 지상에서 나를 만들어준 분은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기지도 못할 때부터 이미 우리를 향한 꿈을 꾸고 계십니다.
피카소의 어머니는 피카소가 어렸을 때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군인이라면 장군이 될 것이다. 사제가 된다면 교황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나는 화가이고 피카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피카소가 무엇일 될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명품이 될 것은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카소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모님의 기대, 부모님의 믿음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기대라고 하면 어떤 말로 바꿀 수 있을까요? ‘계명’, 곧 ‘율법’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하지 마라, 저것을 하지 마라가 목적이 아닙니다. 계명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성장해주기를 바라서 내려주시는 규정들입니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에게 새의 발만 수천 번을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났지만 수천 번의 그림을 통해 새의 발이 다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새의 발만 봐도 그 특징을 잡아내어 바로 그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기 위함이 아닌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기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주시는 지시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넘어진 숫자보다 걸은 숫자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이는 부모는 자녀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효도하고 싶다면 더 완전함으로 나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불완전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호락호락한 모습이 되기를 바라며 만드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분명 하느님은 최고의 작품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셨다면 최고의 걸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박세리 선수를 쫓아다니던 아버지는 박세리 선수가 그냥저냥 한 선수가 되기를 바랐을까요? 김연아 선수를 쫓아다니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최고가 되기를 원하고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일점일획도 거스르지 않으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작품이 됩니다.
이렇게 율법을 따라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모습이 되어가려는 사람에게 나오는 것이 ‘창의력’입니다.
미국의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곡에서 연주자는 단 한 음도 연주하지 않습니다. 공연장의 소리로만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존 케이지는 음악이 듣는 것만이 아니라 행위 자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공연장에 존재하는 모든 소음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이런 짓을 했다면 욕을 먹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존 케이지는 음악가입니다. 음악가가 이런 창의적 발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은 최고라는 자존감입니다. 이미 최고이고 최고가 될 것이기에 자기 스스로 모든 과정을 시험해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최고를 만듭니다.
모든 자수 성공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이 그렇게 성공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 두려움 없는 용기가 창의성을 발휘하게 하고 실제로 그들을 최고로 올려놓았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조선업을 시작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정 회장은 우리나라가 한창 포항제철을 밀어주고 있을 때 그 철을 이용해 커다란 배를 만들어 팔면 이윤이 많이 남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세 가지가 없었습니다. 기술, 돈, 수요였습니다. 배를 만들 기술도 없었고 조선소를 지을 돈도 없었으며 당연히 배를 사겠다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이루어 냈습니다. 우선 기술부터 자문받아야 했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닌 끝에 영국의 조선 기술 기업 ‘애플도어’의 회장이었습니다. 이제 기술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소를 지을 돈이 없었습니다. 애플도어 회장은 ‘버클레이 은행’을 설득하기는 힘들 것이라 했습니다.
정 회장은 조선소를 지을 백사장이 찍힌 사진만 들고 무작정 은행을 찾아갔습니다. 당연히 돈을 빌려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때 정 회장은 당시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1,500년도부터 이런 배를 만들었습니다. 영국은 1800년도부터지만 우리가 쇄국정책을 해서 그렇지 그 기술은 우리가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버클레이 은행 사장은 웃으며 추천서를 써 줍니다. 허락을 받아낸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우선 돈을 빌려줄 때 수출보증기구의 승인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수출보증기구에서는 조선소를 지어도 배를 살 사람이 없으면 차관을 갚을 수가 없으니 수주계약을 먼저 받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정 회장은 너무 당연하고 합리적인 말이어서 조선소를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정 회장은 초라한 백사장 사진을 들고 배를 살 사람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습니다.
그러자 정 회장처럼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 해운업자 선박왕의 처남 ‘리바노스’였습니다. 그는 26만 톤 두 척을 현대에 주문했습니다. 이 주문서를 수출보증기구에 알렸고 차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돈과 기술력으로 5년 뒤에 전달할 선박을 2년 6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는 기업에는 어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전쟁만 아니면 다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창의성을 발휘하게 했고 그 창의성이 결국 성공에 다다르게 한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유일의 작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 뜻, 곧 계명만 잘 따르기만 하면 그분이 우리를 향해 꾸시는 꿈을 반드시 이뤄낼 수 있습니다.
참 효도의 길은 무엇을 하든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러기를 바라는 이의 율법을 한 점, 한 획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결심이 엄청난 창의력을 발휘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자는 창의력도 뛰어납니다. 믿는 대로 되는 과정에 창의력이 있습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같은 기대를 하시며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빗자루질하더라도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처럼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계명은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빗자루질하던, 요리하던, 봉사하던 그곳에서 최고가 될 것을 결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미 그러한 결심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에 보답하는 일은 그분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 아주 작은 그분의 계명까지 꼭 지키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 너를 위한 거야.
신부가 되고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선배 신부님께서 저를 자기 본당에서 특강을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담되었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신자들 앞에서 특강을 합니까?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 너를 위한 거야.”
당시에는 만만한 후배라고 부려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초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진짜로 저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남을 가르침으로 인해 자기 공부가 됩니다. 저 역시 많은 강의를 통해 제 생각들을 정리하고 제 안에서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사람들 앞에서 벌벌 떨었던 울렁증 같은 증세도 말끔하게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계속 똑같은 강의를 할 수 없으니, 쉬지 않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만해서 부려 먹은 것이 아니라, 저를 성장시켜 주신 귀한 초대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말로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당시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을 치유해주셨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지요. 율법에 참뜻을 부여하셔서 진정한 완성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 즉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은 율법은 그 모든 권위를 계속해서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우리는 모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받은 율법은 주님의 권위를 받아서 세상에서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요? 만약 율법을 완성하지 않았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안식일만 강조할 것이고 겉으로 보여주는 예식만을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새로운 모습으로 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
- 알베르 까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 17)
사랑을 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완성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적극적인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생명이신 하느님을 가리킨다. 율법과 예언서는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생활의 길이 올바르면 우리들 삶도 올바른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올바른 생활의 질서는 모순된 우리의 삶까지 치유한다. 사랑이 지켜지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예수님께서 아프게 진단하신다. 자발적인 참여와 올바른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사랑의 성숙으로 사랑을 성화시켜 나가야 한다.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삶은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도 꼭 필요한 사랑의 완성이다. 사랑의 정신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계명의 깨어있는 삶이다.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이 여정도 중요하다. 율법과 예언서로 우리 삶의 모든 차원을 사랑으로 들어 높이시는 예수님이시다.
생명은 생활의 질서가 필요하다. 공동체는 이 사랑의 생명이 모여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생활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 여정을 통해 인격을 폐지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격을 완성하시는 분임을 깨닫게된다. 공동체와 개인 모두를 살리는 사랑의 정신이다. 폐지가 아니라 완성이다. 완성을 가르치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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