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양이 오시리라 요한이 선포하였네. 우리 임금님 그리스도 오시리라.
전능하신 하느님, 죄의 멍에를 메고 구원을 기다려 온 저희가 다시 맞는 성자의 탄생으로 옛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18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예레 23,5-8)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 오늘 복음
(마태 1,18-24)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예레 23,5-8
오늘 제1독서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7 그러므로 이제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하지 않고,
8 그 대신 “이스라엘 집안의 후손들을 북쪽 땅에서, 그리고 당신께서 쫓아 보내셨던 모든 나라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 고향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마태 1,18-24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18일
정호철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1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이해하지 못해도 받아들이는 용기
약혼녀에 대하여 슬픈 이야기를 들은 남자가 있습니다. 약혼녀인 마리아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잉태하였음을 알게 된 요셉입니다. 그에게는 삶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충격적이고 슬픈 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고발하지 않기로 합니다. 고발은 곧 그녀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던 그는 마리아의 명예, 존엄성, 생명을 보호하고자 남모르게 헤어지기로 합니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의 비밀을 요셉에게 공유하면서 그를 하느님의 계획에 참여하도록 초대합니다. 그에게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중에 그리스도께서 성모님을 제자에게 맡기시듯이, 지금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요셉에게 맡기십니다. 천사는 태어날 분에게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요셉에게 줌으로써 아버지의 자격과 임무를 부여합니다.
요셉은 묻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천사가 명령한 대로”(1,24) 합니다. 의심도 두려움도 없이 망설임 없는 순종만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요셉 성인을 “순종하는 아버지”요 “수용하는 아버지”(교황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늘, 특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만나면 하느님을 향한 요셉의 순종과 받아들임을 떠올려 되새기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간적으론 불행한, 신앙적으론 행복한
이번에는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요셉은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자기 아들 대신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된 것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행복한 분입니다. 아내와 자식을 스스로 내준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빼앗겼으니 불행합니다.
그러나 타의가 다름아닌 하느님의 뜻이요 인류 구원을 위한 것이니 행복합니다. 이것은 요셉뿐이 아니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성소자가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한 성소자라면 다시 말해서 인류 구원을 위해 부르심을 받고 뽑힌 성소자라면 그래서 자신을 완전히 희생 봉헌한 사람이라면 인간적으로 불행한 것을 신앙적으로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제 자랑 같아서 얘기하기가 조심스럽지만, -그래서 결코 자랑하려는 뜻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지만-저는 너무 행복한 성소자이고 그래서 저와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분들에게 미안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다른 것 안 해도 되고 사랑만 할 수 있는 제가 너무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행복할 뿐 아니라 너무 행복합니다. 저의 희생과 봉헌에 비해 지나치게 행복합니다.
사실 저의 희생이랄까 봉헌이 여러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또 따지고 보면 누구를 위한 것이기보다 저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것에 대해 저는 하느님께 감사하고 여러분께는 미안해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고속도로에서 버스 전용 차선을 타고 밀린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남은 생은 인류 구원까지는 못 하더라도 몇 사람에게라도 구원이 되는, 그러기 위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저를 조금이라도 더 희생하고 봉헌할 줄 아는, 구원의 성소자가 될 수 있기를 요셉을 보면서 반성하고 기도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신앙의 모델 요셉
<제1독서>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예레 23,5-6)
<복음>에서는 구세주를 모셔 들인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에서는 태어날 아기가 예고된 구세주 메시아임을 두 가지 예언의 성취를 통해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은 요셉의 믿음에 찬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복음>에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이 거룩한 분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보다 높은 법, 곧 은총의 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야흐로 은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아직 뜨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빛으로 밝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거룩한 신비를 알려주고 깨우쳐준 까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천사는 단지 예고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약속으로 요셉을 이해시켜 주었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마태 1,21)
이렇게 그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받았습니다. 곧 아버지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마태 1,22).
그렇습니다. 요셉은 그야말로,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요셉 성인과 함께 의심하기보다 신비를 받아들여 살아야 할 일입니다. ‘성령의 활동’을 받아들여, ‘행동하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쫒아 “의로움 사람”으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20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도망치고 싶은 관계 속에 숨겨진 보물
찬미 예수님. 오늘은 아주 특별한 성탄 연극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하려 합니다. 1966년 미국의 잡지 『가이드포스트(Guideposts)』에 소개되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9살 소년, '월리(Wally)'의 실화입니다.
월리스 펄링, 애칭으로 월리라 불리는 이 소년은 또래보다 덩치는 훨씬 컸지만, 지능이 조금 낮아 2학년에 머물러 있는 느린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비단결처럼 곱고 순수한 아이였지요.
성탄절 학예회 때 선생님은 월리에게 '여관 주인' 역할을 맡겼습니다. 대사를 외우기 힘든 월리를 배려해서 딱 한 마디만 하면 되는 배역을 준 것입니다. 게다가 월리의 큰 덩치가 요셉과 마리아를 위협적으로 쫓아내기에 딱 좋다고 생각했겠지요. 월리의 대사는 이것뿐이었습니다.
"방 없어요! 딴 데로 가시오!"
드디어 공연 날, 무대 위로 요셉과 마리아가 찾아왔습니다.
"여관 주인님, 제 아내가 만삭이라 너무 힘들어합니다. 작은 방이라도 없나요?"
월리는 연습한 대로 근엄하게 소리쳤습니다.
"방 없어요! 딴 데로 가시오!"
하지만 요셉 역을 맡은 아이가 대본에 따라 더욱 애처롭게 간청했습니다.
"주인님, 제발 부탁입니다. 아내는 지쳤고 날은 춥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습니다."
그 순간, 월리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각본대로라면 매몰차게 문을 닫고 들어가야 했지만, 월리는 문고리를 잡은 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눈앞의 마리아가 너무 불쌍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대 뒤에서 선생님이 다급하게 속삭였습니다.
"월리! 문 닫아! 안 된다고 해!"
하지만 월리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각본에는 없는 대사를 외치고 말았습니다.
"가지 마세요! 요셉! 마리아! 제 방으로 오세요! 내 방을 쓰세요!"
월리는 엉엉 울면서 무대 밖으로 뛰쳐나갔고, 연극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날 밤, 그 어떤 완벽한 연극보다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월리만이 진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방을, 자기 삶의 자리를 내어준 유일한 여관 주인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성 요셉이 처한 상황이 딱 이와 같습니다. 요셉에게 마리아의 임신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습니다. 율법대로라면 그녀를 고발해야 했고, 인간적으로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요셉의 인생에 불쑥 찾아온, 감당하기 힘들고 부담스러운 불청객이었습니다. 요셉의 '인생 각본'에는 없던 일이었지요.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월리의 대사처럼 "방 없어요, 딴 데로 가시오" 하며 관계를 끊어내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해결책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요셉이 위대한 성인인 이유는, 자신의 각본을 찢고 하느님의 각본대로 "내 방을 쓰세요" 하며 부담스러운 마리아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부담스러운 여인을 받아들인 바로 그 자리에서, 요셉은 구세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만약 요셉이 부담을 피해 도망쳤다면, 그는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되는 영광을 결코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사 안에는 이런 요셉의 길을 걸어간 수많은 증인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가경자 엘리자베스 레스외르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에게 남편 펠릭스는 평생 짊어져야 할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지독한 무신론자 의사였던 펠릭스는 아내의 신앙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엘리자베스에게 남편은 피하고 싶은 짐이자, 가장 '부담스러운 마리아'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논쟁하거나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침묵과 사랑으로 남편이라는 짐을 껴안았습니다. 그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펠릭스는 아내가 남긴 영적 일기를 읽고 통곡하며 회심합니다. 그는 훗날 도미니코회 사제가 되어, 아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을 제대 위에서 만나게 됩니다. 아내는 남편이라는 짐을 통해 성인을 낳았고, 남편은 아내라는 짐을 통해 사제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억지로 짐을 졌다가 주님을 만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키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로마 병사에게 붙들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야 했습니다. 그에게 피투성이가 된 죄수의 십자가는 끔찍한 불운이자 피하고 싶은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부담스러운 십자가(사명)를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발을 맞추어 골고타를 오르는 동안, 그는 예수님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고 그분의 눈빛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데르와 루포스는 초대 교회의 기둥 같은 신자가 됩니다. 억지로 진 짐이 그를 구원자와 만나게 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구약의 호세아 예언자를 보십시오. 하느님은 그에게 "가서 창녀 고메르를 아내로 맞아라"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 고메르는 결혼 후에도 계속 바람을 피우고 도망갔습니다. 호세아에게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수치이자 고통스러운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도망간 아내를 돈을 주고 다시 찾아오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찢어지는 마음(Compassion)을 체험합니다. 그는 인간적인 행복을 포기하고 이 부담스러운 여인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계시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종종 기도합니다.
"주님, 저 사람만 없으면 살겠습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주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과 예화들은 정반대의 진리를 말해줍니다.
"네가 피하고 싶은 그 사람, 네가 부담스러워하는 그 관계가 바로 내가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모든 관계는 우연이 아닙니다. 나를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는 시몬의 병사이거나, 나를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끄는 호세아의 아내일 수 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라는 부담을 끌어안았을 때 예수님을 품에 안았듯이, 우리도 내 인생의 각본을 찢고 "내 방으로 오세요"라고 말할 때, 그 관계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안 만나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보다는 '이 관계를 통해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만나주실 것인지'를 먼저 묵상하는 대림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강의하다 보면 종종 여러 생각이 계속 떠올려집니다. 강의의 내용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강의 주제에 맞지 않는 내용, 본질에서 빠져나가는 다른 이야기일 때도 있습니다. 말하면서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삼천포로 빠진 것 같아서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분심으로 가득하게 될 때가 바로 정상 궤도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분심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를 어느 성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 하느님께 너무 많은 말을 하려 하기에.
2) 세상일에 분주해서.
따라서 초조해하지 말고, 우선 편안한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오로지 하느님 현존만을 느끼려 노력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특별한 장소가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하느님 현존은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일이기에 삶 안에서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향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에 너무 집중하면 돌아가기 힘듭니다. 하느님 현존을 계속 느끼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방황을 멈추고 오로지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셉 성인이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당시 유다인의 결혼 풍습을 보면, 먼저 약혼이 있었는데 함께 살지는 않지만, 이는 법적으로 이미 결혼한 상태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로 불리며, 헤어지려면 정식 이혼 증서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다가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려와 동거를 시작하는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 약혼 기간에 임신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율법상 간음으로 간주되어, 신명기 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이때 요셉의 역할이 드러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19)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라면 부정한 아내를 고발하여 처벌받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율법적인 의로움이 아닌, 자비로서의 의로움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조용히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지요.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메시지를 전달했고, 이 메시지에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요셉은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습니다. 고민했지만,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면 곧바로 행동하는 모습만 보여줍니다. 묵묵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의로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주 관심사는 오로지 하느님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요셉의 이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에서 자기가 굳이 주인공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묵묵히 삶 안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을 주님께서 요구하십니다.
오늘의 명언
성공이란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이란 당신이 가진 것을 원하는 것이다(데일 카네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받아들이는 순종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신앙의 결단이 바로 순종입니다. 이렇듯 신앙의 핵심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는 방향 전환입니다. 이 침묵의 순종을 통해 구원은 말이 아니라 삶의 선택으로 시작됩니다.
참된 탄생은 언제나 인간의 계획이 멈추는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서 요셉은 먼저 자기 계획을 내려놓습니다. 요셉의 순종은 불안을 제거한 뒤의 결단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용기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의심보다 존중으로 맞아들입니다.
사람을 소유하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맞아들임과 받아들임의 신비입니다. 맞아들임은 믿음의 선택이며 받아들임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맞아들이는 구원의 오늘 되십시오. 성 요셉은 맞아들이는 순종의 등불입니다.
마태오복음 1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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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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