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이제 순결한 예물, 정결한 희생 제물인 용감한 동정녀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따른다.
주님, 거룩한 동정 순교자 루치아의 전구로 저희 안에 믿음의 불이 타오르게 하시어 오늘 그의 천상 탄일을 지내는 저희가 영원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13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집회 48,1-4.9-11)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 오늘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집회 48,1-4.9-11
오늘 제1독서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그 무렵
1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2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3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4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9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10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마태 17,10-13
오늘 복음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13일
윤호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 성녀 루치아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4
✚ 강론시작 07:4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지금 여기의 은총을 못 보고 먼 곳만 찾는 우리에게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키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3,23-24).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에 앞서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답은 명확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엘리야를 기다린다는 것은 곧 엘리야 예언자가 예고하고 준비하는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예언자의 말을 자기네 방식대로 받아들이면서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의 중요성을, 이미 때가 지난 뒤에야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려 주는 ‘특별한 무엇인가’를 바랄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둘러싼 익숙하고 평범한 것들 안에 얼마나 많은 진리와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작고 평범한 것들은 조용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진리와 하느님의 뜻은 먼 훗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겸손한 인내심과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채워 주시는 작고 평범하며 익숙한 것들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알아차리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의 예언자를 알아보는 믿음의 눈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그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오늘 복음을 우리는 지금 대림절에 읽지만 본래 이 복음은 수난 예고를 앞두고 있으며 타볼산에서 주님께서 변모하신 사건에 이어지는 복음입니다. 타볼산 위에서 주님께서 변모하시는 얘기를 보면 그때 구약의 두 예언자 곧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같이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들은 주님의 두 중요한 사건을 관련이 있는 분들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 넘어가게 함으로써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게 하신 주님의 파스카를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어떤 면에서 주님과 관련이 있습니까? 바로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역할을 한 분입니다. 곧 주님께서 오시도록 사람들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분이지요. 사실 엘리야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예언자는 본래 바로잡는 존재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도 그래서 주님의 뜻을 알고도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의 불의와 죄를 바로잡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바로잡아주려는 예언자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일까요? 사람들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성인급은 돼야 기꺼이 받아들일 겁니다.
싫어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인정하는 것이 싫습니다. 너는 잘못됐어! 라는 말이 우선 기분 나쁩니다. 여간해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고, 인정하더라도 스스로 고치고 싶지, 지적받고 고치고 싶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교정의 고통 때문입니다. 바로잡아야 한다고 마음먹었어도 바로잡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관절염이 심해 수술할 경우, 수술의 고통보다도 수술 뒤 재활 치료가 더 고통스럽다고 하잖습니까? 그래서 스스로는 교정을 위한 재활 치료를 엄두도 내지 못하거나 결심하고 재활에 들어가지만 고통 때문에 포기하고 말기 십상인데 그래서 역설적으로 재활은 스스로 할 수 없고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영적인 교정 또는 영적인 재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전혀 상관없이 무신론자처럼 살아온 나를 바꾸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세상 것들에 맛 들인 나의 입맛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것이니 새로운 맛을 들이는 것도 힘들지만 기존의 입맛을 포기하는 것이 더 힘들겠지요.
그러니 관절의 교정과 재활처럼 이것 또한 스스로 하지 못하고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바로 예언자입니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사람들이 몰라보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다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인데 몰라본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내 주변에 나를 바로잡기 위해 쓴소리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이 보내신 예언자라고 알아보는 믿음 눈 말입니다. 사실 내 주변에 달콤한 소리 하는 사람보다 쓴소리하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그렇지요. 달콤한 소리는 원래 바로잡는 소리가 아니고 훌륭하다고 그러니 계속 그렇게 살라고 하는 소리지요. 그러므로 달콤한 소리들 중에 쓴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바로 나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임을 알아보는 믿음의 눈을 우리는 오늘 장착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해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엘리야의 재림에 대해서는 이미 <말라키서>(3,1,23)에서는 예고합니다. 거기에는 모세에게 내린 율법과 규정을 기억하라는 말(3,22)과 함께 언급됩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곧 엘리야가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씀하시면서,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이제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주는 동시에,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동시에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7,12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꽃길만 걸으려 애쓰지 말고, 자갈밭에서도 굴러 보세요.”
“꽃길은 누구나 원하는 길이라 경쟁이 치열하지만, 자갈밭에서는 대부분 의욕이 없어서, 조금만 의욕을 가져도 빛날 수 있어요.”
크게 공감 가는 말이었습니다. 저 역시 사제 생활에서 꽃길을 선택하려 했었습니다. 아니 꽃길이 나의 삶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힘든 곳에서 사목하게 되었습니다. 성지에서, 교구청에서, 빚 많은 성당에서…. 다들 제게 처음에는 “왜 그곳에 가는 거야? 주교님께 찍혔어?”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가 저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간으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습니다.
꽃길은 그냥 꽃길일 뿐입니다. 쉽고 편할 수 있지만, 내 안에 있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자갈밭은 분명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런 체험이 있고 난 후, 고통과 시련이라는 마음이 들면 하느님의 은총을 그 안에서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정말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이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꽃길보다 자갈밭에 하느님의 은총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말라키 예언서는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가 파견되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리게 할 것으로 예언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율법 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엘리야가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니, 엘리야가 와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이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임을 이야기하십니다. 사람들은 엘리야의 환생을 기대했지만, 실재는 회개를 외치며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 노력한 세례자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멋대로 다룹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인 메시아 역시 영광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고난을 받아야 함을 예고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화려하고 강력한 능력으로 세상을 뒤집을 ‘영광의 엘리야’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낙타 털옷을 입은 고행자 세례자 요한을 통해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에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작고 초라한 곳, 또 고통스러운 곳에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가치는 다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엘리노어 루스벨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삶 안에 오셨지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외형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교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틀을 깨시고, 기대하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요한을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은 결국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작은 은총을 못 알아보면 큰 은총도 못 알아봅니다. 깨달음은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것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왔고, 하느님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은총은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은총이 됩니다. 은총은 존중해 줄 때 자라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은총을 주십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은총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은총은 알아보는 이에게만 은총이 되고, 소중히 다루는 이에게서 비로소 선물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곁에 보내주신 사람과 은총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집회서 48장 11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5/12/14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14 |
|---|---|
| 25/12/12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12 |
| 25/12/1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11 |
| 25/12/1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10 |
| 25/12/0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09 |
| 25/12/08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08 |
| 25/12/07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