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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2/12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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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주님이 영화롭게 내려오시리라.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리라.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다시 오실 외아드님을 깨어 기다리오니 구세주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저희가 등불을 밝혀 들고 깨어 있다가 그분을 맞이하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2월 12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48,17-19)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 오늘 복음
    (마태 11,16-19)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이사 48,17-19
오늘 제1독서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1,16-19
오늘 복음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12일
정재웅 마티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12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들을 귀가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마태 11,16) 기쁘게 놀 줄 모르고 늘 불평하는 아이들과 같은 당신 세대를 꾸짖으십니다.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모든 유다의 지도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위한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열린 마음으로 들었지만, 권력과 풍요를 누리는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에 열려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보다 더 귀먹은 이는 없고, 보려고 하지 않는 이보다 더 눈먼 이는 없습니다. 회개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회개로 초대하는 이들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를 옹호합니다.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의 전달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거부하고자 그를 ‘마귀 들린 자’라고(11,18 참조) 부르고, 예수님을 거부하고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11,19)라고 일종의 인신공격을 하면서 핵심인 하느님 말씀을 피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말에 불만을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도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불만의 이유나 핑곗거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고 믿는다면, 오늘 독서의 이사야서가 말하는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48,17)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혜는 덧셈이고 어리석음은 뺄셈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사랑에서 비롯된 진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사야서는 이렇게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과 세례자 요한에 대해 먹으면 먹는다고, 먹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당대 사람들을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인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시며 이렇게 결론 내리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미성숙의 한 형태는 자기중심의 어리석음입니다. 자기가 자기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기에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경청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일리(一理)가 있고 하느님 말씀에 진리(眞理)가 있음을 보지 못하기에 경청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의 말을 경청했다면 건강을 잃지도 않고, 몸뿐 아니라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평안할 텐데 건강할 때는 어리석게도 자기 건강만 믿고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경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지혜가 옳다는 것이, 지혜가 이룬 것으로 드러나듯 어리석음이 그르다는 것은, 어리석음이 이룬 것 곧 건강 상실로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이룸이고, 어리석음은 상실입니다. 지혜는 덧셈이고, 어리석음은 뺄셈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당신 말씀과 영에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슬픔일 것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고 부수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이 ‘찢기어지고 나누어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변화와 성화로 새롭게 하여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에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1,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무디어 진 제 마음이 
빛보다 어둠에 치우친 까닭입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실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완고함의 벽을 헐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국소 마취된 신앙: 손끝의 쾌락에 갇혀 심장의 고통을 잊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행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이들이 손에 잡히는 것,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에 행복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영화 『에비에이터』의 실제 모델이자 당대 최고의 억만장자, 영화 제작자, 비행사였던 하워드 휴즈의 삶을 들여다봅시다. 그는 젊은 시절, 세상 모든 남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을 다 가졌습니다. 막대한 부, 하늘을 나는 명예, 할리우드 여배우들과의 염문까지, 그의 '손끝'에는 늘 쾌락과 성공이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어땠을까요? 

그는 세균 공포증과 강박증이라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펜트하우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그는 발가벗은 채 지냈습니다. 세균이 옮을까 봐 티슈 상자를 신발처럼 신고 뒤뚱거리며 걸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소유했으나, 정작 마음의 평안은 단 한 조각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육체의 감각과 욕망에만 치중하느라 영혼의 행복에는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그의 마지막은, 화려한 펜트하우스가 사실은 차가운 감옥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국소 마취된 신앙인'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수술할 때 국소 마취를 하면, 몸의 다른 부분은 멀쩡한데 딱 그 부분의 감각만 사라집니다. 영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욕망'이라는 마취제를 맞고 영혼의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이를 저는 '초점의 오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마치 욕망이라는 현미경으로 눈앞의 이익만 확대해서 보느라, 저 드넓은 하늘을 보여주는 망원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꼴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지혜'란 무엇일까요? 지혜는 단순히 똑똑한 머리가 아닙니다. 지혜란, 손끝의 찰나적인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전체, 즉 '마음의 행복'을 바라볼 줄 아는 눈입니다. 부분에 매몰되지 않고 전체를 보는 능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라고 탄식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 왜 그들은 반응하지 않을까요? 귀가 먹어서가 아닙니다. 자기들만의 놀이, 자기들만의 욕심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할 '심장의 감각'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무감각, 아케디아(Acedia)입니다.   

이렇게 손끝의 욕망에만 집중하며 국소 마취된 채 살아가는 이들이 겪게 되는 비극을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주인공 마틸드는 가난하지만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어느 날 파티에 초대받은 그녀는 돋보이고 싶은 허영심, 즉 '손끝의 쾌락'을 위해 부자 친구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립니다. 파티에서의 하룻밤은 꿈처럼 화려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부러움, 찬사... 하지만 그 영광은 잠시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돌려주기 위해 막대한 빚을 집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무려 10년 동안 하녀처럼 일하며, 고운 손은 거칠어지고 얼굴은 늙고 추해집니다. 10년 후, 빚을 다 갚고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난 마틸드는 충격적인 진실을 듣습니다. 

"어머, 마틸드! 그 목걸이는 가짜였어. 기껏해야 500프랑밖에 안 되는 모조품이었다고!"

보십시오. '진짜 행복'이 아닌 '가짜 욕망'을 좇은 대가는 이토록 참혹합니다. 찰나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청춘을 낭비해 버린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복음은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한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라고 선언합니다. 진짜 지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최고의 예화가 바로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 우깁니다. 솔로몬은 "아이를 반으로 갈라 나누어 주어라"라고 판결합니다. 가짜 어머니는 "내 것도 안 되고 네 것도 안 되게 그냥 나누자"며 동의합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이 아니라 '소유'라는 손끝의 욕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어머니는 울부짖습니다.

"아이를 죽이지 마시고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

진짜 어머니는 내 품에 안는 '소유의 행복'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아이가 숨 쉬고 살아가는 '생명의 행복', 즉 전체를 살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녀가 손끝의 욕심을 내려놓고 심장의 사랑을 택했을 때, 지혜로운 왕은 판결합니다.

"저 여자가 진짜 어머니이다."

지혜는 이렇듯 행동으로, 그 결과로 드러납니다. 부분을 포기함으로써 전체를 얻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대림 시기는 우리 영혼의 마취를 풀고 깨어나는 시간입니다. 어떻게 하면 욕망의 감옥에서 벗어나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성 요한 23세 교황님의 일화가 우리에게 그 답을 줍니다. 요한 23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교회와 세상의 산적한 문제들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 거대한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나?" 하는 책임감과 걱정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꿈속에서 천사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요한아, 교회의 주인은 너냐, 아니면 성령이시냐?" 

잠에서 깬 교황님은 무릎을 탁 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성령님, 교회의 주인은 당신이십니다. 저는 이제 자러 갑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자아의 욕망, 내가 해결사라는 '부분적 집착'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대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심장의 평안'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바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위대한 봄을 열 수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손끝의 쾌락이 아니라 마음의 행복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내 욕심을 채우려는 현미경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망원경을 들어봅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장터의 피리 소리에 기쁘게 춤추고, 이웃의 아픔에 진심으로 가슴 칠 수 있는 '살아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어떤 형제님이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술집에서 회포를 풀고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로 술자리가 무르익고 있을 때,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가 나타나 말합니다. 
 
“내 손녀딸이 아파서 그런데 껌 좀 사주세요.”
 
친구 중 한 명이 할머니가 요구했던 돈보다 더 얹어주며 껌 한 통을 샀습니다. 할머니가 옆 테이블로 갔을 때, 그 옆의 친구가 말합니다. 
 
“그 할머니 사기꾼이야. 손녀딸이 없어.”
 
이 말에 껌을 산 친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곧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휴~~ 정말 다행이다. 그러면 아픈 사람도 없네. 잘 되었으니 우리 모두 건배~~~”
 
이런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부정적인 마음은 우리의 사고를 닫아버리고 기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려 있으면 사고도 열리고 어떤 상황이든 다 기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런 열린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마태 11,16) 
 
당시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장터(agora)와 같은 공공장소에 모여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놀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놀이가 두 가지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어떤 제안에도 반응하지 않고 삐쳐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을 꾸짖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에도 춤추지 않고, 회개의 촉구에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무감각’과 ‘고집’으로,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오셔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장터의 아이들이 보여준 가장 큰 문제는 ‘악행’이라기보다 ‘반응하지 않음’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영적 위기는 하느님의 말씀에 더 이상 가슴 뛰지 않고, 이웃의 아픔에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는 ‘무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에게는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합니다. 실제로 본당 사제가 엄격하면 ‘사랑이 없다’라고 말하고, 사제가 자비로우면 ‘기강이 없다’라고 비판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처럼 반대를 위한 반대가 참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요? 주님께 더는 무관심으로 다가서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반대의 마음으로 이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세 사람이 걸어가면 반드시 네 스승이 있다(논어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하느님의 지혜는 예수님의 삶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진짜 지혜는 주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된 힘입니다. 참된 지혜는 사람을 묶지 않고 풀어주며, 두려움을 주지 않고 용기를 심어 주며,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게 합니다.

지혜의 옳음은 타자의 생명을 살리는 실천에서 드러나며, 지혜는 옳은 생각에서 끝나지 않고 그 생각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삶의 방식으로 빛납니다. 진리는 말이 아니라 삶의 품격으로 증명됩니다.

지혜의 참된 가치는 세상을 밝히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을 받아들이는 지혜란 하느님의 뜻과 진리를 알아보는 겸손한 마음이며,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지혜의 일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는 사실을 사랑이 된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혜는 약함 속에서 강함을 드러내고, 낮아짐 속에서 높아짐을 완성합니다.

지혜는 모든 어둠을 넘어 삶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 힘입니다. 오늘의 지혜란, 예수님처럼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어 사람을 살리고 희망을 북돋우며, 작은 일 속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신앙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사랑이 삶이 되는 일입니다.

 

 

 

이사야서 48장 17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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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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