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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1/23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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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신성과 지혜와 힘과 영예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옵니다.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토록 받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사랑하시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1월 23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23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2사무 5,1-3
오늘 제1독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그 무렵 

1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2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 

3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모두 헤브론으로 임금을 찾아가자,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콜로 1,12-20
오늘 제2독서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12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기를 빕니다.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5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23,35ㄴ-43
오늘 복음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35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23일
이주형 세례자요한 신부

 

✚ 그리스도왕 대축일 소개 00:06

✚ 청구성당 소개 01:28

✚ 미사시작 02:15

✚ 강론시작 16:5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1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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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사랑은 대신 죽는 왕좌에서 드러났다.

오늘 우리는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면서 예수님을 ‘온 누리의 임금’, ‘그리스도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 

오늘 복음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빈정거리며 한 이 말은 예수님의 삶을 잘 요약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이들은 살리시면서 정작 당신 자신은 다른 이들을 위한 제물로 내주신 참된 사랑의 임금이십니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23,37).

 군사들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며 한 말입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23,39). 

예수님 곁에 매달린 죄수 하나가 그분을 모독합니다. 빈정거리고 조롱하고 모독하던 자들의 한결같은 주문은 ‘자신을 구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임금이신 하느님 나라는 자기를 먼저 돌보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 하나는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23,40-41)라고 하면서 자신이 벌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극심한 고통을 주는 십자가 위에서조차 저주를 내리시기보다 용서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참으로 선하신 구원자를 발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윽고 그는 주님께 자신을 맡깁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23,42). 

그날, 그 시간 그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왕직에 초대된 우리

저는 예수님을 주님, 저의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도 30대 중반까지는 잘하지 못하였음, 임금님, 저의 임금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얼마간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꼭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해야 하고, 그 축일을 지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그러기에 이 축일을 지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말 잘 듣는 아이에게 말 잘 들으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듯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잘 받드는 사람에게 예수는 우리 임금이라고 할 필요 없고 그 의미를 잘 모르는 저 같은 자가 이 축일을 지내며 의미를 새겨야 하겠지요.

저의 거부감은 예수님께서 결코 임금이고자 하지 않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사실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임금들과 같은 임금이 결코 되고 싶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후손이라고 열광하며, 오늘 독서에서 보듯이 그 옛날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 부어 임금으로 세운 것처럼 지금 로마 밑에 있는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나라를 구해주기를 바라고,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자신이나 구해 보라고 로마 군사들이 조롱할 때도 거기에 맞대응할 마음이 전혀 없으셨지요.

예수님께서 세우려고 하신 것은 당신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오셨고 당신과 함께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지요. 

어쨌거나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통치자가 아니라 온 누리의 통치자 곧 하늘과 땅의 통치자로 받들라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는 물론 세상의 통치자들도 이 예수님의 통치를 본받으라는 것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통치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오늘 감사송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를 구원하시고, 그 영원하고 보편된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셨나이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이 왕직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억압하고 군림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님처럼 밑으로 내려가 발을 씻어줌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게 하고, 그럼으로써 세상에 생명과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왕직을 수행하라고 합니다. 이 초대를 받아 기꺼이 응답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리스도 왕(임금)은 대체 어떤 왕인가?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한 해를 끝맺고, 다음 주간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오늘을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대축일은 단순히 한 해의 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절정을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왕(임금)’은 대체 어떤 왕인가?

이를 오늘 <감사송>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온 누리의 ‘왕’이심을 말해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그리스도의 왕’과 ‘그분의 왕권’에 대해, 이렇게 밝혀줍니다.

<제1독서>에서 원로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기 전에,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2사무 5,2)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는 하느님께 적용된 호칭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결로 나를 이끌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끌어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 23,1-3) 

그러니 ‘목자’는 명령하고 군림하는 이가 아니라 돌보고 생기 돋우어주고 이끌어주고 살려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백성이 임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백성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당시의 임금들에 비추어 본다면,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사가는 이를 이렇게 전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마르 10,45) 

이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요한 10,11 참조)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왕’ 모습입니다. 

<제2독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온 누리의 주권과 다스림을 찬양하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를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위에 새겨진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전해줍니다. 곧 그분의 ‘왕’의 모습을 생생히 드러내줍니다. 바로,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왕의 다스림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밝혀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대체, 그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이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 나라인가?

사실, 오늘 <복음>은 죽음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믿는 이’, 곧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 선언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온 세상에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이 하늘나라가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건네주신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다스림이 바로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왕좌는 십자가이며, 그분의 왕관은 가시로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가시의 왕관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진정한 영광의 상징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와 자비의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처럼, 용서와 자비가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일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무에 충실할 것을 되새겨보며,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전에 한 유명한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서 세상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3,43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주님!
당신 십자가와 
함께 있게 하소서

비참하고 초라하고 
조롱받고 모욕당하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지라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용서와 화해, 
섬김과 사랑이 다스리는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제 자신을 내어주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죽게 하소서.

하여, 나의 뜻을 이루려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정의와 진리,
생명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의 기도는 시험하는 기도인가, 기억하는 기도인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세 은자』에는 아주 기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외딴섬에 세 명의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글도 모르고 교리도 몰랐습니다. 그저 하루 종일 손을 모으고 이렇게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당신도 셋, 우리도 셋,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느 날 그 섬을 방문한 주교가 이 기도를 듣고 혀를 찼습니다. "어허, 그렇게 기도해서는 하느님께 닿지 않습니다. 제가 정식 기도를 가르쳐 드리지요." 주교는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그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노인들은 머리가 나빠 외우는 데 한참이 걸렸지만, 주교는 뿌듯해하며 배를 타고 섬을 떠났습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세 은자가 물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배전에 매달려 소리쳤습니다. 

"주교님! 죄송합니다. 주교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거룩한 기도문을 그새 까먹었습니다. 처음 구절이 '하늘에 계신...'이었는데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부디 다시 가르쳐주십시오!" 

주교는 물 위를 서 있는 그들을 보며 전율했습니다. 그리고 십자 성호를 그으며 말했습니다. 

"어르신들, 당신들의 기도는 이미 하늘에 닿았습니다. 제가 당신들에게 배울 뿐, 더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하던 대로 기도하십시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완벽한 기도문을 외우지만 왕의 능력을 모르는 주교와, 교리는 서툴러도 왕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물 위를 걷는 은자들. 과연 누가 하느님을 살아있는 왕으로 모시는 사람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냅니다. 우리가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지, 아니면 단순히 내 소원을 들어줄 해결사로 여기는지는 '기도하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옛이야기에 두 거지가 나옵니다. 왕이 행차할 때마다 한 거지는 "우리 왕 만세!"라고 외쳤고, 다른 거지는 "왕의 선물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왕은 자신을 사랑한 첫 번째 거지에게는 빵 속에 보석을 숨겨 보냈고, 선물만 바란 거지에게는 그냥 빵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거지는 빵이 무거워 팔아버렸고, 선물만 찬양하던 거지가 그 빵을 사서 횡재했습니다.

언뜻 보면 선물을 바란 자가 이긴 것 같지만, 결국 왕은 진실을 알고 첫 번째 거지를 궁으로 불러들여 식탁에 앉혔습니다. 선물만 바란 거지는 평생 구걸을 면치 못했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의 전략을 이렇게 폭로합니다. 

"인간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 뜻이 사실은 '내 뜻'과 일치한다고 착각하게 만들어라. 그래서 만약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치 하느님이 계약을 위반한 것처럼 분노하게 만들어라." 

이것은 명백한 '시험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당신이 진짜 왕이라면 내 병을 고쳐보십시오. 내 자식을 합격시켜 보십시오."

이것은 간청이 아니라 거래이며,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입니다. 복음서에서 이런 화법을 쓴 존재는 광야의 사탄뿐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시오."

사탄은 끊임없이 "If(만약 ~라면)"라는 조건을 달아 하느님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이런 태도를 엄중히 꾸짖습니다.

"자매들이여, 왕이신 분께 고작 썩어 없어질 돈이나 명예를 달라고 조르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지나 하는 짓이지, 왕의 자녀가 할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양식은 오직 하느님의 뜻, 그리고 성체이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시험하는 기도'를 멈추고,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는 '기억하는 기도'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의 판관 기드온을 보십시오. 그는 하느님께 양털이 젖게 해달라고, 다음엔 마르게 해달라고 두 번이나 시험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당신이 나의 왕이심을 확신하고 싶습니다"라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는 확신이 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배우 최강희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우울증과 중독의 늪에서 바닥을 쳤을 때, 그녀는 체면을 버리고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는 응답이 올 때까지, 자신이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이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끈질긴 기도는 결국 그녀에게 "하느님이 나를 살리셨다"는 확신을 주었고, 그때부터 그녀의 삶에 왕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확신이 들 때까지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영혼을 태우는 '불(Fire)'같은 체험이 찾아옵니다. 천재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그 뛰어난 이성으로 신을 증명하려 했지만 끝내 공허함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1654년 11월 23일 밤, 기도를 멈추지 않던 그에게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 체험을 양피지에 적어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불(FEU)! 철학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느님... 확신, 확신, 기쁨, 평화."

그는 더 이상 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의 불을 '기억'하며 자신의 모든 지성을 왕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증명이 끝난 곳에서 확신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 시절, 이와 똑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전까지 제 기도는 온통 "이것 좀 주십시오, 저것 좀 해결해 주십시오"라며 당신이 주님임을 증명해 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체 조배 중에 주님의 벼락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께서 제 영혼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다 주었다. 생명도, 살도, 피도 다 주었다. 더 무엇을 증명해야 하느냐?"

그 순간 저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미 생명까지 다 주신 분께, 고작 사탕발림 같은 위로를 내놓으라고 떼를 쓰고 있었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분의 압도적인 '다 주심'을 깨닫는 순간, 저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청할 염치조차 없었습니다. 이미 다 받았는데 무엇을 더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제 기도는 오직 하나, '주님의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다 주신 분의 뜻이라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왕을 시험하는 기도는 "내 뜻을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쓰지만, 왕을 인정하는 기도는 "이미 다 주셨음을 기억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기도할 때, 다른 화려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기도'의 첫 구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수없이 반복하다가 날을 샜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의 왕이 되신다는 그 사실 하나가 가슴 벅차게 차올라, 감히 다음 구절로 넘어갈 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기도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쳤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기드온처럼, 최강희 씨처럼, 그리고 파스칼처럼 확신이 들 때까지 매달리십시오. "주님, 당신이 왕이심을 제 영혼이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십시오. 그래서 마침내 "아, 그분은 나에게 다 주셨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날, 여러분은 더 이상 청원 목록을 들고 계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혹시 내가 청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왕께서는 이미 나에게 가장 필요한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 안에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야말로, 우리가 그분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는 대관식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동창 신부 중 한 명이 자기 어렸을 때 미사 가지 않고 놀다가 걸려서 홀딱 벗겨져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저의 부모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을 것 같습니다. 자주 그런 협박성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옛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더 엄격했었습니다. 조과만과를 바치지 않으면 부모님께서 밥을 주지 않았었고, 기도 때 졸면 그 자리에서 뺨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이 많은 이도 공소회장 앞에서는 쩔쩔맸고 무조건 순종했으며, 찰고 때는 회초리를 맞으면서 교리 문답을 외웠다고 합니다. 파공 참례(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축일에 노동을 쉬고 미사 참례하는 것)을 지켰고, 대축일에는 몇십 리 길을 걸어 본당에서 미사 참례를 한 것으로 나옵니다. 
 
너무 맹목적이고 과도한 것이 아니냐고 현대인들은 말할 것 같습니다. 그냥 먼 옛날의 일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이 아니라 공포에 의한 것이라면서 평가절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께 진심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편안하고 쉬운 신앙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자기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맞지 않으면 주님을 원망하고 또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거센 유혹 속에서 주님께 진심으로 나아가는 신앙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35절), 군사들(36절), 죄수 하나(39절)입니다. 그들의 조롱 내용은 광야의 악마 유혹과 비슷합니다. “네가 ~라면, 너 자신을 구원해 보아라.”라는 것입니다. 
 
왕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권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세상의 왕은 남을 희생시켜 자신을 살리고, 군림하며 힘을 과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살리고,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용서와 구원을 베푸시는 진정한 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왕을 어떻게 모셔야 할까요? 바로 예수님 옆에 있었던 회개하는 죄수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그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언합니다. 그 누구도 하지 않는 모습이며, 진정한 신앙 고백입니다. 주님께 진심인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만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모실 수 있었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왕은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이와 함께 있어 주는 참된 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왕을 맞이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우측에 있었던 도둑이 보여준 것처럼,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번 주일이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올 한 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떠올리며, 새로운 한 해를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성화는 우리의 행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을 하느님을 위해 함으로써 이루어진다(부활의 로랑 형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한 해가 저물수록 우리의 희망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스도왕의 권위는 우리를 향한 심판보다 우리를 향한 자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왕과의 만남 안에서 지금 시작되는 구원의 참된 기쁨입니다.

구원이란 어떠한 장소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일치의 친교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지배가 아니라 봉사와 자기 비움으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까지 우리들에게 내어주십니다.

그리스도왕께서는 지배가 아닌 섬김으로, 권력이 아닌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삶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생명을 살리는 주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은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하느님의 넘치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과거의 무게보다 현재의 선택을 더 중요하게 만듭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상황도, "너무 늦었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오늘 지금 여기이며 은총과 자비 안에서 시작되는 관계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의 변화가 낙원에 들어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도 은총은 저물지 않습니다. 넘치는 은총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삶이 우리의 참된 낙원입니다. 그 낙원에 들어가는 우리들의 겸손한 믿음의 고백이 울려퍼지는 그리스도왕 대축일 되십시오.

 

 

 

루카복음 23장 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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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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