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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1/22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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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이제 순결한 예물, 정결한 희생 제물인 용감한 동정녀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따른다.

하느님, 복된 체칠리아를 기리며 해마다 기쁘게 지내게 하시니 교회가 전하는 그의 모범을 저희가 충실히 본받아 성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1월 22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22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1마카 6,1-13
오늘 제1독서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죽어 가네.

그 무렵 

1 안티오코스 임금은 내륙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페르시아에 있는 엘리마이스라는 성읍이 은과 금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2 그 성읍의 신전은 무척 부유하였다. 거기에는 마케도니아 임금 필리포스의 아들로서 그리스의 첫 임금이 된 알렉산드로스가 남겨 놓은 금 방패와 가슴받이 갑옷과 무기도 있었다. 

3 안티오코스는 그 성읍으로 가서 그곳을 점령하고 약탈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성읍 주민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4 그들이 그와 맞서 싸우니 오히려 그가 달아나게 되었다. 그는 크게 실망하며 그곳을 떠나 바빌론으로 향하였다. 

5 그런데 어떤 사람이 페르시아로 안티오코스를 찾아와서, 유다 땅으로 갔던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6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나아갔던 리시아스가 유다인들 앞에서 패배하여 도망치고, 유다인들이 아군을 무찌르고 빼앗은 무기와 병사와 많은 전리품으로 더욱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7 또 유다인들이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제단 위에 세웠던 역겨운 것을 부수어 버리고, 성소 둘레에 전처럼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그의 성읍인 벳 추르에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8 이 말을 들은 임금은 깜짝 놀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던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실망한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9 그는 계속되는 큰 실망 때문에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마침내 죽음이 닥친 것을 느꼈다. 

10 그래서 그는 자기 벗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11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단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 …….’ 

12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13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20,27-40
오늘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22일
유재선 안드레아 신부

 

✚ 성녀 체칠리아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0

✚ 강론시작 09:0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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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마카베오기에서 배우는 참된 승리

마카베오기 상권 1-4장에 나오는 역사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 원정에 나서 넓은 영토를 손에 쥡니다. 그는 열두 해를 다스린 뒤 부하 장군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 주고 죽습니다. 여기서 시작된 왕조의 후손 가운데 성전을 약탈하고, 이스라엘의 율법과 풍습을 금지하며 우상을 세운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유다 전쟁에서 계속된 패배 소식을 듣고는 실망하여 죽어 가는 임금입니다. 그에게서 우리는 악의 전형적 모습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바로 남들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힘으로 강요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다름과 자유를 존중하지 않고 마구 짓밟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사제 마타티아스와 그의 다섯 아들은 용감히 일어나 율법과 성전에 대한 열정으로 맞서 싸워 침략자들의 군대를 몰아냅니다. 비록 적은 수였지만 그들은 이집트를 치신 하느님의 놀라운 힘과 업적을 기억하고 의지하였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에 달렸다고 굳게 믿은 것이지요. 마타티아스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는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듭하여 마침내 성전의 치욕을 벗겨 냅니다. 역겨운 우상의 제단을 허물고 율법의 규정대로 새로운 제단을 만들어 봉헌합니다. 

자신의 힘과 군대만을 믿었다가 좌절하고 절망하여 죽음에 이르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와, 오직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며 외세를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하여 봉헌하는 유다 마카베오는 뚜렷이 대조되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죽음 다음에 무엇이?

위령 성월을 지내면서 죽음과 삶에 대해서 우리는 성찰을 합니다. 죽음이라는 거울을 보며 삶을 성찰하고, 죽음 다음이 무엇일지 성찰을 합니다. 죽음이란 완전한 끝, 絶對無로 돌아가는 것인지? 죽음 다음의 다른 삶이 있는 것인지? 죽음 다음의 삶은 어떤 것인지?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이 죽음 문제 때문에 논란이 있었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신부님이 지옥에 대한 신학적 주장을 폈습니다. 지옥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지옥이라면 지옥이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영원한 형벌의 지옥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과연 인간 죄에 대한 벌로 ‘인간 존재를 이 세상을 끝으로 완전히 끝내시는지’, ‘정말 지옥이란 것이 없는 것인지’ 등의 많은 논란을 촉발시켰고, 이로 인해 이 신부는 결국 성공회에서 파문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과학자들에게는 죽음이 생명의 소멸 현상에 불과하겠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생기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이 세상 생명이 시작되었다면 죽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이 세상 생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생기라는 명령에 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죽으라는 명령에 이 육신을 벗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 죽은 인간은 새로운 명령을 기다립니다. 이제 죽은 인간은 새로운 육신을 만납니다. 새로운 육신을 입은 새로운 생명은 더이상 이 세상 인연에 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새로운 인연도 만들지 않습니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아비 되고 어미 되는 일도 없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이들이 살아있는 것”이기에 죽는 일도 없고 영원하신 하느님과의 영원하고 완전한 일치에 들어가 삼위일체 하느님과 삼위일체적인 친교를 나누고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나를 포함하여 하느님의 하느님들인 모든 존재가 친교를 나눕니다.

그래서 죽음은 이제 더이상 단순한 이 세상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세상 인연들과 이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세상 인연의 소멸은 본래대로 하느님께로 돌아감입니다.

色卽是空
서 정원

(전략)

色卽是空이란
파도(色)는 바람이란 緣을 만날 때
파도가 되는 것이요,
바람이란 緣이 다하면
본래대로 바다(空)가 된다는 것이다.

空卽是色이란
바다 또한 바람이란 緣을 만날 때
파도(色)가 된다는 것이다.

色이 있는 모든 것들은
빛이란 因緣을 만날 때
푸르다 빨갛다 운운할 수 있다.
빛이란 緣이 다하면 깜깜한 空이란 것이다.

나도 緣 따라 나요
緣이 없어지면 空이요
空도 緣 따라 色이요
色 또한 緣이 다하면 空이다.

(후략)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성경을 모르면 속박이요, 믿음은 해방이다.

오늘 우리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와 예수님의 신적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영적무지로 인한 속박을, 신적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속박과 자유가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9-40)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여긴 까닭에, 내세나 부활과 영적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곧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을 마치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의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보고서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영적존재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루카 20,15-16 참조)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탈출기>(3,6)를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루카 20,37)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0,38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주님!
저희를 깨우쳐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 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런 사람과는 혼인시키면 절대 안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대작 『죄와 벌』에서 우리는 인류 문학사상 가장 기이하고도 거룩한 커플을 만납니다. 한 명은 오만함에 빠져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찍어 죽인 살인자 라스콜니코프이고, 다른 한 명은 가난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파는 창녀 소냐입니다. 

어느 날 밤, 촛불이 가물거리는 소냐의 누추한 방에서 살인자는 창녀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청합니다. 소냐가 떨리는 입술로 읽어 내려간 구절은 요한 복음 11장, '라자로의 부활'이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소냐의 목소리가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에 이르렀을 때, 라스콜니코프의 영혼을 짓누르던 죽음의 껍질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날 밤, 촛불은 꺼져가고 있었지만 두 죄인의 가슴 속에는 부활의 불씨가 옮겨붙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소설의 진짜 결말인 '에필로그'는 그들이 시베리아 유형지로 떠난 후를 그립니다. 어느 이른 아침, 강가에 앉아 있는 라스콜니코프 곁으로 소냐가 다가와 조용히 손을 내밉니다. 그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무릎을 끌어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적습니다. 

"그들을 부활시킨 것은 사랑이었다. 한 사람의 심장은 다른 사람의 심장을 위하여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 그들에게는 7년이라는 세월이 마치 7일같이 느껴졌다." 

보십시오. 살인자와 창녀라는 꼬리표, 죄책감과 수치심이라는 과거, 이 모든 '죽음의 흔적'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육체적으로 탐하거나 소유하려는 남녀가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어주는 '완전한 친교', 즉 부활한 존재들의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와 살다 죽었다면,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누구의 것)가 됩니까?" 

이 질문은 철저히 '죽음'을 전제로 한 질문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갉아먹는 세상에서는 '소유'만이 살길처럼 보입니다. 내 핏줄을 남겨야 하기에 자식에 집착하고, 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배우자를 독점하려 합니다. 이것이 세속과 육신의 욕망이 만드는 '지상의 혼인'입니다. 지상의 혼인은 거룩하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서 때로는 서로를 옥죄는 소유의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다."(루카 20,36) 

죽음이 사라진 곳, 부활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내 것'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멈춘 그 자리에서 비로소 '천국의 혼인'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배타적인 소유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투명하게 만나는 '친교(Communio)'입니다. 이 '천국의 관계'가 얼마나 뜨겁고 아름다운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미 이 땅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규칙을 넘어선 사랑의 폭풍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 베네딕토 성인과 그의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해 보십시오. 1년에 단 한 번 만나던 어느 날, 해가 저물자 베네딕토 성인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누이여, 이제 가야겠소. 수도원 규칙상 밤에는 밖에서 머물 수 없소." 

하지만 죽음을 예감했던 스콜라스티카는 오빠를 붙잡았습니다. 

"오빠, 제발 오늘 밤은 가지 마세요. 밤새도록 천상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해요." 

오빠가 완강히 거절하자, 그녀는 식탁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져, 베네딕토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오빠가 "누이여, 하느님께서 용서하시길!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라고 묻자, 그녀는 평화롭게 웃으며 답했습니다. 

"오빠는 제 청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셨습니다. 자, 나가실 수 있으면 나가보세요."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이 장면을 두고 "사랑할 줄 아는 이가 더 위대한 힘을 발휘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날 밤, 두 남매 사이에는 남녀의 정욕이나 율법의 경직됨은 없었습니다. 오직 두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엮이는 거룩한 친교만이 폭풍우처럼 몰아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넘어선 천국의 관계입니다. 

타오르되 소멸하지 않는 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일화는 또 어떻습니까?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포르치운쿨라) 숲속에서 클라라와 소박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 성인이 성령에 취해 하느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인근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물동이를 들고 달려왔습니다. 성당과 숲 전체가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불은 없었습니다. 오직 두 성인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에 잠겨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본 것은 물질을 태워 없애는 파괴적인 불이 아니라, 두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될 때 뿜어내는 성령의 불꽃이었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서로를 소유하려다 태워버리지만, 부활의 사랑은 서로를 살리며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왜 부활을 믿어야 합니까?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사랑은 결국 무덤에서 끝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잊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덕분에 우리는 희망을 가집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소유의 껍질을 벗고 '진정한 만남'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의 예고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 완전히 내어주며 하나 되시듯, 우리도 이 교회 안에서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깊은 영적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내 사람, 저 사람은 남"이라고 가르는 세상의 배타적인 벽을 허무십시오. 라스콜니코프와 소냐가 죄의 사슬을 끊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했듯, 베네딕토와 스콜라스티카가 밤새도록 천국의 기쁨을 나누었듯, 우리도 서로에게 '마르지 않는 기쁨의 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곁에 있는 이를 바라보십시오. 그는 내가 소유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장차 부활하여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할, 영원히 빛나는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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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성녀 체칠리아에게 부어 주신 하느님의 은총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살아 움직이게 하시며 우리 또한 사랑으로 선택하고, 용기로 증언하며, 기쁨으로 봉헌되는 은총의 응답이길 기도드립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관계를 뜻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관계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내는 이들이 바로 부활을 사는 이들입니다.

시간과 죽음을 넘어선 생명의 공동체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의 삶은 하느님이 생명의 중심이 되는 현재입니다. 부활 신앙은 죽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단순히 숨 쉬는 인간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진정 살아있는 이들입니다. 죽음을 넘어 산다는 것은 우리 존재 전체를 하느님께 거는 결단입니다. 

하느님 은총에 응답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은총이 주어졌다는 이 사실보다 그 은총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했는가가 삶을 결정합니다. 우리도 은총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으로 응답하고 삶으로 노래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죽음마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찬미가 되게 하소서. 성녀 체칠리아의 삶은 상처와 순종을 건너 울려퍼진 하느님을 향한 한 편의 찬가입니다.

 

 

 

루카복음 20장 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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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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