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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1/20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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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1월 20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마카 2,15-29)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 오늘 복음
    (루카 19,41-44)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1마카 2,15-29
오늘 제1독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그 무렵 

15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모데인에서도 제물을 바치게 하려고 그 성읍으로 갔다. 

16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이 그 관리들 편에 가담하였지만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은 한데 뭉쳤다. 

17 그러자 임금의 관리들이 마타티아스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성읍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존경을 받는 큰사람이며 아들들과 형제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소. 

18 모든 민족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처럼,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 

19 그러나 마타티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20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21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22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23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 어떤 유다 남자가 나오더니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24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25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26 이렇게 그는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27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28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 둔 채 산으로 달아났다. 

29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9,41-44
오늘 복음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20일
현정민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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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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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평화는 수단이 아니라 삶이다.

이번 한 주 동안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여정을 복음으로 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수난하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예수님의 마음을 엿보게 됩니다. 독백과도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루카 19,42)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19,42)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도시가 평화를 알지 못하고 평화를 볼 눈이 없음에 깊이 탄식하십니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입니다(이사 32,17 참조). 그리고 정의는 ‘그의 것을 그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마땅한 흠숭을 드리고, 내 이웃을 그 존엄에 맞갖게 존중해 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러나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예수님을 없애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를 지키려 합니다. 평화와 어울리지 않는 수단으로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1219년, 십자군 전쟁의 역사 속 가장 치열하였던 시기에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 하나가 이슬람 진영 한복판에 찾아들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그는 이 전쟁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며 하느님의 뜻은 오로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형제적 삶을 사는 데 있음을 선포하고자, 무장하지 않은 ‘평화의 사절’로 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오늘날까지 ‘거룩한 땅’ 이스라엘에 머무르며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있는 성지들을 돌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평화의 발걸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평화 이기주의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은 전체가 갈릴래아에서 얼마 동안 활동하시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 33주간 월화수요일 삼일은 예루살렘 길목인 예리코에서 복음을 선포하신 얘기를 들었고 오늘은 아주 특별한 얘기를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우시는 것은 복음 전체를 놓고 볼 때 아주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제가 알기로 두 번밖에 없습니다. 왜 우십니까? 예루살렘이 폭삭 망할 것이기 때문이고, 예루살렘이 왜 망하냐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 아이러니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와 정반대로 평화가 제일 없는 곳이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평화가 없는 것은 평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화는 우리 인간이 그렇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왜 평화 의지는 없는 것입니까? 평화 이기주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평화롭기 바라지만 같이 평화롭기를 바라지는 않기에 결과적으로 나만 평화롭기를 바라는 꼴이 됩니다.

평화공존이라는 좋은 말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나만 잘살려고 하고 내가 잘살기 위해 너를 눌러야 하고, 심지어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기에 은근히 남이 불행해지길 바랍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나는 버스 전용차선을 막힘없이 달리면서 다른 차들은 거북이걸음으로 가는 것이 미안하지 않고 오히려 은근히 기분이 좋으면 그것이 바로 행복 이기주의인 것이지요.

나만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나 나만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나 이 ‘나만’이 행복이나 평화 문제에서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 평화롭고 행복하고, 우리 모두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같이 평화롭고 행복해야 나도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을 가르치시는 주님이 평화의 임금이심을 예루살렘이 모르고 거부하다가 마침내는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그 평화를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예루살렘처럼 이 평화를 거부하고 평화 이기주의를 살고 있진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또 다시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시며 우시며 말씀하셨다.”(루카 19,41)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마치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범죄를 두고 울었던 것처럼(1열왕 8,11), 예레미아가 유다의 유배를 두고 세 번이나 울었던 것처럼(예레 9,1;13,17;14,17) 우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전에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34)하시고 탄식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또한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 앞에서도 우셨습니다(요한 11,3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식을 올리셨습니다.”(히브 5,7)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마태 5,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하고 탄식하시며, 당신께서 우시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함에 대해 우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가슴이 미어지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과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예고(루카 19,43-44; 21,20-24; 23,28-31)하시고, 그것을 종말을 예시하는 역사적 심판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울음과 말씀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적 경고임과 동시에, 회개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당신의 ‘눈물’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도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방문미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는 울음과 연민의 경험을 상실한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에게서 우는 능력을 빼앗아갔습니다.  

... 누가 울고 있습니까? 누가 오늘 이 세상에서 울고 있습니까?”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뜻을 외면하여, 또 다시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9,44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주님!
오늘 당신의 뜻을 알아듣고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게 하시고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평화를 이루게 하시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무인도에서 4년을 버티게 한 단 하나의 습관

찬미 예수님!
우리는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대니얼 디포가 완전히 창작해낸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알렉산더 셀커크(Alexander Selkirk)'라는 스코틀랜드 항해사의 실제 체험이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와 '알렉산더 셀커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크루소는 '난파'라는 사고로 무인도에 갇혔지만, 셀커크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무인도에 내렸습니다. 

1704년, 셀커크는 '싱크 포르(Cinque Ports)'라는 배의 항해사였습니다. 그는 성격이 거칠고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낡아서 곧 침몰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선장과 대판 싸운 뒤 "이 배를 타고 가느니 차라리 무인도에 내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칠레 연안에서 670km 떨어진 '마스 아 티에라(Más a Tierra)'라는 무인도에 정말로 버려졌습니다. 그는 곧 다른 배가 자신을 구조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그곳에서 그가 보낸 시간은 무려 4년 4개월이었습니다. 그가 섬에 내렸을 때 가진 것은 옷가지, 칼 한 자루, 도끼, 그리고 '성경 한 권'뿐이었습니다. 첫 몇 달간 그는 해안가에 머물며 절망적인 고독과 싸워야 했습니다. 밤마다 해안으로 몰려나와 울부짖는 수천 마리의 바다사자 떼 소리는 그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오늘 복음 속 예루살렘처럼, 완벽한 혼돈과 멸망의 공포(세상의 혼란) 한가운데에 던져졌습니다. 

그를 미치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규칙적인 일과'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과의 중심에는 '아침'과 '저녁'의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해 준 우즈 로저스(Woodes Rogers) 선장에게 훗날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그 섬에서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하고, 성경을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그는 섬에 달력을 만들어 날짜를 확인하며, 특히 '주일'에는 모든 노동을 멈추고 온전히 하느님과 만나는 '방문의 때'로 지켰습니다. 그는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라는 매일의 자기봉헌을 통해, 무인도의 야만성이 자신의 내면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영적 방어벽을 쌓았습니다.

1709년 2월 2일, 마침내 우즈 로저스 선장이 이끄는 배가 그를 발견했을 때, 선원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4년 4개월을 홀로 지낸 사람이 당연히 미쳐 있거나 언어조차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셀커크는, 짐승 가죽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문명인보다 더 평온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즈 로저스 선장은 1712년에 출판한 자신의 항해 일지 『세계를 일주한 순항』에 이 놀라운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셀커크)는... 읽고, 시편을 노래하고,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 고독 속에서 자신이 이전에 살았던 그 어떤 삶에서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셀커크는 세상의 모든 평화라고 여기던 것들이 사라진 무인도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 '하느님'(어머니)을 만나는 '방문의 때'를 지켰습니다. 그는 그 규칙적인 기도를 통해 '평화'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장소'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하다가 런던 탑의 차가운 독방에 갇혔습니다. 그의 아내 앨리스가 찾아와 "대체 왜 고집을 부리십니까? 여기 감옥보다 우리 집이 더 좋지 않습니까?"라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토마스 모어는 평온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감옥과 내 집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여기도 하느님께서 계시고, 내 집에도 하느님께서 계시오."

그는 어떻게 감옥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그의 평화는 '집'이나 '정원'(장난감)에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평생을 지켜온 '규칙적인 기도 시간'(아침/저녁)을 단 하루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때'를 놓치지 않았기에, 그는 왕의 위협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진은 현대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무엇이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안정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연구했습니다. 수많은 변수 속에서 가장 강력한 요인은 '돈'이나 '학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규칙적인 가족 저녁 식사'였습니다. 아이에게 평화는 학교 등수나 스마트폰이 아닙니다. 부모이고 부모와의 규칙적인 만남입니다. 

일주일에 단 몇 번이라도, 정해진 시간에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규칙적인 만남'을 가진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훨씬 안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이 '저녁 의식'은 단순히 밥을 먹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루의 혼란을 마감하고, 가족이라는 '안식처'(어머니)로 돌아와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평화를 확인받는 '방문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왜 우셨습니까?

"네가 하느님께서 너희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19,44)

예루살렘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규칙적인 의식'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렉산더 셀커크와 달리, 그 제물(장난감)에만 매달려 정작 그들을 찾아오신 '하느님'(어머니)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오시는 때'에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 로마의 압제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세상'에게 평화를 구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길을 너 홀로 몰랐구나" 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기다릴 때 언제 돌아올지만 알아도 평화를 얻습니다. 평화는 때를 아는 자만의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하느님께서는 하루의 시작을 '저녁'으로 보셨습니다. 하루의 혼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저녁 기도'로 하느님을 만나 평화를 얻고, '아침 기도'로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 우리 신앙의 리듬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아.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 의식이 필요해."

'규칙적으로 만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준비시킵니다. 다니엘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예루살렘 쪽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 아침-점심-저녁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평화로웠습니다. 세상의 장난감이 주는 헛된 평화에 속지 마십시오. 매일 정해진 '아침'과 '저녁'에, 나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의식'을 회복하십시오. 그 '때'를 아는 사람만이 참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체적, 정신적, 성적, 경제적 폭력을 모두 포함하는 ‘데이트 폭력’이 있습니다. 집착에서 오는 잘못된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집착만 하고 있으면 상대는 도망갈 것입니다. 짝사랑도 그렇습니다. 짝사랑이 기억의 좋은 한 면을 차지할 수도 있지만, 꽤 오랜 시간 슬픔을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나만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돈에 집착하면 돈은 달아난다고 합니다. 그 돈을 가진다 하더라도 돈과 계속 싸우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돌고 돌기 때문에 ‘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도는 것을 막으려 하기에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 간의 이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 삶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쪽만의 사랑이라면, 또 집착에서는 오는 것이라면, 그리고 움켜쥐려고만 한다면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사랑의 관계가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에 부합해서, 우리 역시 사랑으로 다가서야 진정한 사랑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는 집착으로 주님께 다가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도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우시는’이라는 단어의 그리스어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소리 내어 통곡하는 슬픔을 이야기할 때 사용합니다. 멸망해 가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향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래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 있는 주님의 안타까움이 크게 보이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의 히브리어 뜻은 ‘평화의 도시’입니다. 지명의 뜻대로 ‘평화의 도시’가 되어야 하는데, 참된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모순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 우리 역시 자주 영적 눈멂의 상태에 있었음을 반성합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면서, 세상의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럴수록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보시고 우시지 않을까요? 

 

오늘의 명언

모든 말을 존중하라(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늦가을 끝자락의 평화처럼, 평화는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내려놓고 멈추어 서는 자리에서 조용히 스며드는 하느님의 깨끗한 계절입니다. 하느님 없는 평화는 끝내 무너져 내립니다. 예루살렘의 문제는 평화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평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평화는 하느님과의 바로 선 관계이며 우리의 내적 통합이며 공동체의 조화와 창조 질서의 회복까지 포함하는 총체적 구원입니다. 평화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어떤 제도나 정치, 율법이 아니라 평화이신 바로 예수님 자체이십니다. 참된 평화는 방법이 아니라 인격이며, 계획이 아니라 은총이며,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앞에 오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장 위험한 우리의 교만이 다름 아닌 참된 평화를 언제나 가로막습니다. 우리의 교만은 이기적인 분주함과 은총의 무감각으로 드러납니다. 평화는 복잡한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하느님을 바라보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평화는 당면한 문제 해결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신뢰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거부하는 우리들입니다. 평화를 외면하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평화는 오늘,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루카복음 19장 42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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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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