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8,31ㄴ-39)
어떠한 피조물도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3,31-35)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로마 8,31ㄴ-39
오늘 제1독서
어떠한 피조물도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루카 13,31-35
오늘 복음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31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35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30일
정찬웅 루카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5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주님의 길, 끝까지 걷는 믿음
오늘 복음 첫머리에서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헤로데가 죽이려고 하니 도망가시라고 합니다(루카 13,31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13,33)라고 하시면서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저는 이 복음 말씀을 읽을 때면 우리나라 신앙의 선조들, 특히 순교자들의 삶이 생각납니다. 순교자들은 신앙을 증언하면 반드시 혹독한 고문과 죽음이 다가올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의 길을 끝까지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갔을까요? 아니면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갔을까요? 그 길을 끝까지 걷는다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생각만 해도 무섭고 떨립니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죽음을 이겨 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그 죽음이 어떤 뜻을 지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음에서 도망치시지 않고, 당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면서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잘 걸어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길을 간다고 하면서 제 방식대로, 자신이 편한 대로 갈 때가 많습니다. 오늘 하루 자기가 편한 방식이 아닌 주님의 방식대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따라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정신무장 성령무장
지난 바자회는 하느님 은총과 여러분의 기도와 후원과 봉사 덕분에 성황리에 아주 잘 끝났습니다. 날씨는 너무 화창하고 적당히 따듯했으며 많은 분이 바자회를 찾아와 주셨고, 봉사자들은 모두 기쁘게 봉사해주셨습니다.
옥에 티가 있었다면 민원 때문에 구청 직원이 와서 그만두라고 한 것인데 그런데도 큰 문제로 만들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다하고 끝을 잘 맺었습니다. 일은 이렇게 잘 마무리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다음 날 미사 때 생겼습니다.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제 내부의 영적인 문제였지요. 하필 미사 중에 그 일이 떠오르며 그 구청 직원의 괘씸함이 눌러도, 눌러도 계속 생각나는 거였습니다. 그 어린 것이 화를 벌컥 그리고 먼저 낸 것과 구민에게 봉사해야 할 공무원이 마치 군림하듯이 행세한 것이 괘씸하여 한 번 찾아가 따지고 잘못했다는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 제가 너무 한심하고 그런 자신을 보는 것이 너무 슬펐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미사를 드릴 때 하느님께 마음을 쏟으라고 했는데 제 마음이 자꾸 그 애송이한테 가 있었고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할 제 마음을 부정적 감정이 차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스럽습니까?
이런 저를 바오로 사도는 오늘 강하게 나무라는 듯합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아니어도 저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하고 지향을 둬왔습니다.
이 나이를 먹어서도 시시하게 사소한 인간적인 감정에 지배당하지 말자고. 하느님께 가야 할 나이에 인간 문제에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뺏기지 말자고. 그런데 이렇게 지향을 두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제 옆에 사탄이 늘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이 나이 들면서 점점 듭니다.
특히 형제들이나 신자들과 미사와 기도를 함께 드릴 때보다 혼자 드릴 때 하찮은 생각이나 감정이 많이 듭니다. 흔히 말하듯 제가 정신 무장이 되어 있다면 이런 것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텐데 저는 아직 정신 무장이 덜 되어있다는 표시겠지요. 이런 저와 우리에게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하라고 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런데 하느님의 무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바오로 사도는 오늘 여러 말로 하고 있지만 제가 그것을 한마디 말로 줄이면 바로 성령 무장입니다.
정신 무장이라는 일반적 용어를 신앙적 용어로 바꾸면 성령 무장일 것이고,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 대적하실 때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가셨듯 악령과 사울 때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으로 무장하고 싸워야 합니다. 성령 충만, 성령 무장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계속 가야할 길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음에 직면하신 장면’과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신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13,31)
바리사이들의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예수님께 호의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여행을 방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여우’라고 지칭하시면서 그에게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루카 13,32)
예수님께서는 그 어떠한 인간적 장애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계획과 당신의 사명수행’을 관철하십니다. 곧 당신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진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가야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다는 것’을,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하신다.’는 말씀은 그분의 뜻에 따라 ‘당신의 삶을 완성하시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자진하여 당신의 길을 가심’을 밝히십니다. 곧 담대하고 의연하고 결연한 의지로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가실 것을 밝히십니다. (마치, 최초의 불교경전 숫파니파타에 나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라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연상시켜줍니다.)
그것은 헤로데가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면서도 이루지 못했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지만 이루지 못했던, ‘당신의 죽음’을 이제 스스로 이루시러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사명수행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었듯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에페 6,13)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우리가 가야할 길을 계속 가야겠습니다.”(루카 13,33). 아멘.
<참고>: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의 일부
묶여있지 않는 사슴이 숲속에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으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남을 해치지 말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며/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며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도 말며/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전에 경험했던 즐거움과 괴로움을 모두 던져 버리고/ 또 쾌락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맑은 고요와 안식을 얻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3,33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주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가야할 길을
계속 가게 하소서.
자신이 죽어
타인을 살리는 길을!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평화의 복음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쥐고
담대하게 가야할 길을
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순종의 길을 가오니
당신이 하고자 하신 바를 이루소서.
당신 안에서
제 삶이 완성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음의 위협 이기는 법 : 새끼를 품은 암탉처럼
오늘 복음에서, 몇몇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겁을 주기 위해 아주 현실적인 경고를 합니다.
"여기에서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헤로데 안티파스, 그는 이미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실제적인 권력이자 '죽음의 위협'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헤로데'가 있습니다. 나의 생사여탈권을 쥔 것처럼 보이는 직장 상사, 나의 미래를 위협하는 경제적 불안,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 혹은 나를 비난하는 여론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헤로데'의 눈치를 보며, 그가 "너를 죽이려 한다"는 말 한마디에 두려워 떨며 발걸음을 멈춥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분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서, '저 여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당대 최고의 권력자, 자신을 죽이려는 왕을 '여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당당함, 이 죽음을 초월한 자유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바로 다음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예수님의 관심은 '헤로데'라는 '여우'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오직 '병아리'들, 즉 당신의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는 '암탉'의 삶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올해 20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4세기 로마 제국은 '아리우스 이단'에게 삼켜졌습니다. 아리우스파는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시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첫 번째 피조물일 뿐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심장을 겨누는 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핵심 저서인 [말씀의 강생에 관하여]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신화, 神化) 하시려는 것"인데,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이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 황제 자신이 이 아리우스파에 물들었습니다. 황제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교에게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황제가 교회의 '헤로데'가 된 것입니다. 제국의 모든 주교가 황제의 권력 앞에서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타협하고 쓰러졌습니다.
바로 그때,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아타나시우스가 홀로 일어섭니다. 그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부제로서 참석하여, "예수님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s)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황제는 그를 '여우'처럼 집요하게 물어뜯었습니다. 그는 네 명의 황제에 의해 무려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했고, 17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와 망명지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모두가 그에게 "세상이 모두 아리우스파가 되었는데, 왜 당신 혼자 맞서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때 그는 교회사에 길이 남을 대답을 합니다.
"Athanasius contra mundum!" (아타나시우스가 세상 전체에 맞서겠다!)
그는 '암탉'처럼 진리라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혹독한 '헤로데'를 만났던 한 가톨릭 신자, 고(故) 김대중 대통령도 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생명'을 국민들에게 주고자 싸웠습니다. 그 이유로 그는 당대 최고의 '헤로데'들에게 끊임없이 생명을 위협받았습니다.
그 절정은 1973년 도쿄 납치 사건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당한 그는, 배(용금호)에 실려 캄캄한 밤바다로 끌려 나갔습니다. 그의 눈은 가려지고, 손발은 묶인 채 무거운 쇠붙이가 몸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바다에 수장(水葬)될,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여우'의 아가리 속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그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강렬하게 빛나는, 눈부시게 하얀 예수님의 모습이 제 눈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너는 살 것이다.' 그 순간, 저는 제가 살 것을 직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체험'한 바로 그 순간, 정체 모를 비행기가 배 위로 초저공 비행하며 붉은 조명탄을 터뜨렸고, 납치범들은 "들켰다"고 당황하며 그를 바다에 던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암탉'처럼 국민들에게 '자유'라는 생명을 주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아버지'께서 생명을 보장해 주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 '체험'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1980년, 전두환이라는 또 다른 '헤로데'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을 때,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청주 교도소에서 "주님은 저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 저는 제가 가는 이 길이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임을 믿으며,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과 섭리를 굳게 믿습니다."라는 옥중서신을 썼습니다. 그는 이미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저 '독재자'라는 '여우'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이심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암탉'처럼 타인에게 '생명을 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진리의 생명'을, 김대중 대통령은 '자유의 생명'을 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주는 삶' 속에서, 그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아버지를 '체험'했습니다. 이 '체험'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헤로데'도 한낱 '여우'로 보이게 만드는 용기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까? 그렇다면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되십시오. 내가 '암탉'이 되어, 오늘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용서의 생명', '친절의 생명', '진실의 생명'을 내어주기 시작할 때, 우리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닌, '아버지'께서 주시는 힘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세상의 모든 '헤로데'를 향해 당당히 외치게 할 것입니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내 생명은 네 손에 있지 않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음식을 먹기 전, 카메라를 들고 음식 사진을 찍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저의 경우는 거의 찍지 않습니다(물론 특별한 음식이면 찍기도 합니다). 먹는 것이 뭐 대단하다고 사진까지 찍으면 기록을 남겨야 할까 싶고, 또 이런 음식을 먹는다고 사진을 찍어 SNS에 자랑질할 이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도 있음을 어느 아내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해주는 음식을 늘 사진 찍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아침에 급해서 한 ‘계란 후라이’까지 말이지요. 아내는 속으로 ‘이게 사진 찍을 일인가?’ 싶었습니다.
어느 날, ‘오늘도 남편이 사진을 찍겠지? 근사하게 음식을 준비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온 정성을 기울여 상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사진을 찍지 않고 그냥 식사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 어떤 생각이 났을까요? ‘마음에 들지 않나?’라는 생각이 나면서, 내내 불안한 것입니다. 혹시 안 좋은 일이 있나?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나? 등의 생각으로 식사 시간 내내 힘들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깨닫습니다. 사진 찍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표시였다는 것을 말이지요.
이 내용을 읽으면서, 모른 것이 세상에는 참 많음을 깨닫습니다. 더 큰 뜻이 있음에도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또 따르지 않았음도 깨닫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존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 몇 명이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13,31) 하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들이 순수하게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해서 헤로데의 위협을 알렸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사이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예수님을 쫓아내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고도 합니다.
어떤 의도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흔들림 없이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시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하고 죽이려는 예루살렘을 향해서도 분노가 아닌, 애끓는 사랑과 슬픔을 표현하십니다. 이는 구원을 베푸시려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이를 거부하는 인간의 비극적인 선택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결국 이 거부는 ‘집이 버려지는’ 심판을 초래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환호하며 맞이할 마지막 희망의 날을 열어두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힘차게 외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루카 13,35)
오늘의 명언
어리석은 사람은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자신의 외모를 자랑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본성에 더욱 신경을 쓴다(그라시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향해 걸었고, 가을 속 우리의 마음도 사랑으로 물드는 길을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중심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당신의 사랑으로 죄를 끌어안고 우리를 변형시키십니다.
예수님의 길은 사랑의 결단과 순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의 완성자이자 구원 역사의 최종 중심이십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은 구속의 여정이며,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사랑의 완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폭력과 배척을 통해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합니다.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을 낳습니다. 예언자의 길은 언제나 상처를 동반합니다.
예언자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사랑은 상처받을 때 완전해지고,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드러냅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 길은 거부와 고통으로 가득했지만, 바로 그 길에서 사랑과 구원이 완성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사랑과 믿음으로 두려움과 안일함을 이겨내는 새로운 여정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예루살렘의 여정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여정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루카복음 13장 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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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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