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제 눈을 비추소서. 제 원수가 “내가 이겼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 주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사오니 주님의 교회를 언제나 자비로이 지켜 주시어 저희를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2025년 3월 18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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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1,10.16-20)
선행을 배우고 공정을 추구하여라. - 오늘 복음
(마태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오늘 말씀 카드
(마태 23,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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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1,10.16-20
오늘 제1독서
선행을 배우고 공정을 추구하여라.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마태 23,1-12
오늘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18일
기민영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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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하였던 것처럼 스승의 구실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듣고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그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들의 말을 듣고 실행하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가르침의 권위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유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이 환호하자, 나귀가 등에 예수님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사람들이 자신을 반기는 줄 알고 우쭐해하였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스승이나 선생, 또는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의도적으로라도 자신을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바로 겸손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스스로 겸손해야 할 때를 알아차렸다면, 그토록 오만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오만해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마태 18,4)임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해지려는 태도는 다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은총의 담지자? 낭비자?
우리가 겸손하게 되면 다른 사람 위에 있으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눔을 어제 저는 했지요.
겸손하지 못한 제가 다시 말해서 교만한 제가 저를 경계하는 뜻으로 겸손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다음 말씀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희는 선행을 배워라.”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을 합치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선생이라고 불리길 좋아하며 가르치려고만 들지 말고 배우는 자세를 가지라는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진 점은 옛날보다는 좀 겸손해진 점이 있고, 어디서나 남을 가르치려 드는 훈장 기질은 좀 나아졌지만 배우려는 자세는 아직 너무 부족하기에 아직 저의 겸손은 멀기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 것만으로는 아직 겸손하다고 할 수 없고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그래도 겸손하다고 할 수 있지요. 어디서나 배우고 누구에게나 배우는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진정 겸손하다고 할 수 있고 성숙한 겸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면에서 저는 교묘한 교만이 있습니다. 삼십 대 후반부터 저는 성경과 프란치스코의 글 외에 다른 책은 거의 책을 읽지 않습니다. 참고하는 차원에서는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지만 내 인생의 답과 지침이 되는 것은 성경과 프란치스코의 글에서 얻지 다른 책에서는 얻을 것도 없고 그래서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만 이것이 교묘하게 저를 영적으로 교만케 합니다. 영적으로 우위에 있다며 은근히 남을 낮추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배우고 모든 것에서 배우려는 자세일 때 그때 모든 사람 밑에 있는 것이고 이것이 진정 겸손일 것이고,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스승이 되지 말라고 하신 것에서 더 나아가 섬기기까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되지는 못해도 은총의 담지자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담지자(擔持者)란 맡아 지니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누가 은총의 담지자가 되느냐 하면 겸손한 자가 되는 법이지요.
그것은 비를 제일 먼저 맞는 것은 산꼭대기지만 다 흘려버리고 제일 낮은 계곡에 빗물이 고이는 것과 같고, 바다가 제일 낮지만 제일 넓고 모든 물이 고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의 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총을 다 흘려버리는 낭비자지만 겸손한 사람은 은총의 가장 훌륭한 담지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가르친다며 입으로 다 흘려버리지만 겸손한 사람은 그 말씀을 다 마음에 간직하고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나는 담지자인지 낭비자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지금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누울 자리’, ‘일자리’, ‘아버지 자리’, ‘앞자리’, ‘윗자리’ 높이와 위치와 순서와 역할 등등~.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음을 지적하시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하시면서,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먼저,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또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라고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란다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하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는 말씀을 되새겨보게 합니다.
사실, 이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군중과 제자들에게 ‘배움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곧 그들의 말과 행실이 모순되고 언행이 불일치한다하더라도, 혹은 행실이 비록 모범이 되지 못하다할지라도, ‘그들의 말은 실행하고 지키는’ 겸손함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않는’ 분별과 지혜를 군중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나는 지금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고 있는가? 진정, ‘배우는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3,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늘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나폴레옹은 종교가 가톨릭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황제’라는 칭호를 가지고는 보통 왕관을 씌우는 의식은 교황이 주례를 맡게 되지만, 나폴레옹은 스스로 왕관을 씌우며 자신이 모든 권력의 근원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황제란 자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노력을 이룬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의 황제 즉위 후, 그는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정복하고, 자신의 황제 권위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리한 전쟁은 결국 패배와 몰락을 초래하게 됩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의 패배는 그가 칭호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결과로, 그의 군은 대패했고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1814년,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엘바 섬으로 유배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죽기까지 가톨릭 신앙을 주장했지만, 자아를 누르지 못하는 그냥 종교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종교가 그 사람을 바로잡아주었던 예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본래 깊은 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거나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청년 시절 링컨은 오히려 의심과 회의 속에서 살아갔고, 성경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적으로 여러 번 실패를 겪고, 개인적으로도 가족의 죽음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는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으며 방황하는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난 이후, 남북전쟁이라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닥뜨리자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국가가 분열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링컨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의 막중한 책임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부담감은 그의 내면에 깊은 신앙을 일깨웠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기 시작했고, 특히 전쟁 기간 동안 시편과 복음서의 구절들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전쟁의 무게와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질 수 없음을 느끼고 점점 더 하느님께 의지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겸손해지고, "나의 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에 서 계신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섭리를 정치적 결단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또 이같은 신앙으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는 “하느님 아래 새로운 자유가 탄생하도록,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합시다.”라는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결국 링컨에게 종교는 단순히 개인의 위안이나 심리적 안정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으로서 역사적 결정을 내릴 때 도덕적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대통령 이전의 링컨이 종교에 무관심하거나 회의적이었다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고 의지하는 신앙의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깊어진 관계가 링컨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자, 노예제 폐지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정말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 있을 때는 부하 병사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며 가장 앞장서서 적과 맞서는 용맹하고 현명한 지도자였지만, 평화가 왔을 때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되고자 했고 점점 독재자의 모습을 띠었고 공화정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국민 영웅인 그를 암살하였습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거나 칭호를 가지게 되었을 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좋은 모습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 악한 모습이 되어갑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려는 지에 대한 그 뜻에 달려있습니다. 그 사람이 섬기는 ‘신’ 때문입니다.
자아를 섬기는 사람은 자아가 원하는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선한 신을 믿고 지향하는 사람은 그 모습이 되어갑니다. 사울 왕이 왕이 되고 점점 나빠졌던 이유는 자아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윗이 왕이 되어 점점 겸손해진 이유는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기를 형성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교만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고 하시고,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아버지만을 스승으로 부르시고,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불려지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불리셨고, 또 제자들을 “아이들아!”(요한 13,33: 21,5)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데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만큼 겸손하셨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 아무리 위치가 바뀌더라도 그것들은 다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정체성을 더 확고하게 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신앙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자아를 섬기기에 자리에 따라 자기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인을 뽑을 때는 그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겉모양의 종교가 아닌 참으로 섬기는 신이 어떤 신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직 신만이 그 사람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의 지위에 따라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신이 되려는 존재기 때문에 자아를 누를 수 있는 분은 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육.마.를 누르지 못하면 자신이 믿는 신은 그 사람 안에서 아직 신은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사순시기에 본당에서는 금요일마다 십자가의 길을 합니다. 지난주, 십자가의 길을 신자들과 함께 할 때였습니다. 5처에서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5처는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사형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된 것이지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형수인 예수님을 그렇게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의지를 세워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 안에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우리 삶 안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때가 많습니다.
형제 중 부모님 돌봄을 전담하게 될 때, 직장에서 사람들이 내게 자기가 할 일을 넘길 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고 억지로 하게 될 때,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다른 사람의 꿈을 위해 나의 꿈이나 계획을 희생해야 할 때…
이런 상황일 때 “억울하다”라고 말합니다. 공평하지 않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행동하면 그 모든 보상을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키레네 사람 시몬의 억울함을 잘 보지 못합니다.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보상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억울함에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의 사랑을 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통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주님의 위로와 놀라운 힘이라는 보상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순되는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께 불충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는 말과 행동은 열심히 했지만, 정작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무조건 실천하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데, 그들은 아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자기 맘에 들어야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불편한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 뜻 안에 머무르고 또 실천할 때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갚아주십니다. 그러나 순간의 만족만을 그리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드러내려고 할 때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하느님을 내게서 멀리 밀어놓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어린 가지가 구부러질수록 나무도 기울어진다.
- 알렉산더 포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실행에 힘을 실어주십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실행입니다. 진심을 말하고 진심을 삶으로 실행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참된 실행입니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좋은 실행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십자가의 실행입니다. 마음을 하느님께 옮기는 실행입니다. 마음을 비워내는 실행입니다.
실행으로 만들어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실행은 말에 갇혀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의 생활도 올바른 실행으로 아름다워집니다. 실행이 있기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실행이 있기에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이 사순시기가 실행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만남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착한 실행이 선물이고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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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2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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