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를 구하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제 발은 올바른 길에 서 있나이다. 거룩한 모임에서 주님 찬미하오리다.
하느님,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 육신의 극기를 명하셨으니 저희가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자애로우신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2025년 3월 17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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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다니 9,4ㄴ-10)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36-38)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6,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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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다니 9,4ㄴ-10
오늘 제1독서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4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5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6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7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유다 사람, 예루살렘 주민들, 그리고 가까이 살든 멀리 살든, 당신께 저지른 배신 때문에 당신께서 내쫓으신 그 모든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8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9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10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루카 6,36-38
오늘 복음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17일
이현종 세베리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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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오늘 복음에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움을 실천하려면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알아차리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는 데 바오로 사도가 회심하는 과정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회심하기 전까지 십자가 죽음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바오로를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바오로는 죄인인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으로 배반자 이스라엘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던 하느님의 자비(예레 3,12-13 참조)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로마 11,32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려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먼저 체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상대에게 잘못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만 보려는 우리의 한계를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자 노력합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겸손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쟤들이 아니라 저희가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오늘 다니엘서에서 저희는 죄를 지었다는 고백이 몇 차례 반복되는데 이 고백에서 저는 ‘저희는’이라는 표현이 유독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쟤들이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지 않고, ‘저희는’ 죄를 지었다고 공동의 죄를 공동 고백하는 겁니다.
이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래야지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공멸하는 공동체를 보면 서로 쟤가 잘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요즘 이런 모습을 너무 많이 보고 있고 그래서 무척 가슴이 아픕니다.
공멸의 길을 끝까지 가려는 그들이 가엾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합니다. 서로 너를 눌러 이기고 자기만 살려고 하다 결과적으로 공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몇 가지 구체적으로 지적하시는데 먼저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제 생각에 여기에는 ‘함부로’라는 부사 하나가 빠져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판단은 그 자체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육신으로나 정신으로 병이 있으면 그 병이 무엇인지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고 그래야 정확한 치료가 되겠지요.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치 말고 신중히 그리고 정확히 판단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판단은 사랑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이나 사람의 상황 판단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판단이 문제이고 그것도 단죄가 목적인 판단이 문제이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다음 남을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단죄하지 말라는 말보다 용서하라는 더 적극적인 사랑, 또는 더 적극적인 자비의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종합하면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말씀인데 이와 관련하여 저는 옛날의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의 저는 단죄한 다음 용서하느라 애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경우 멀쩡한 사람을 단죄하여 죄인 만들고, 그런 다음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을 용서하느라 애를 썼습니다.
애초에 단죄하지 않았으면 용서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었는데 교만했기에 감히 단죄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고 죄지었던 것이며, 교만을 제거하지 않고 용서하려고 했기에 용서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겸손이 밑바탕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이 밑바탕 되었을 때야 우리는 다니엘서의 예언자처럼 쟤들이 죄지었다고 고발치 않고 저희가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자비를 베푸는 방법 4가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그러니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주님!
제 안에 심으신
당신의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완전한 용서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많이 들어본, “뿌린 대로 거둔다.” 법칙입니다. ‘부메랑’ 법칙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법칙은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됩니까? 잘 안 됩니다.
영화 ‘밀양’에서는 신앙으로 용서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불편한 상황을 잘 그려냈습니다. 회개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남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그 책임을 물을 때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이렇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심판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심판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을 심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부터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두려워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입니다.
자기를 심판하지 않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솔직함입니다. 타인의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부끄러운 것을 쉽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이웃도 아니요 하느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할 때 저절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용서를 위해 반드시 여기까지 이르러야 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심판하는 내 안의 심판자,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자아는 ‘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절대 완전히 죽지 않고 계속 나를 심판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에 나오는 아라곤은 왕국 곤도르의 정통 후계자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조상이었던 이실두르가 사우론에게서 ‘절대반지’를 빼앗고도 끝내 파괴하지 못한 과오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실두르의 그 선택은 훗날 사우론이 다시 힘을 키우는 빌미가 되었고, 후손인 아라곤은 “나도 언젠가 조상처럼 약해져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와 자격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그는 은둔자처럼 숨어 지내며 방랑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는 스스로 “내가 왕의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힘을 발휘하면, 혹시 조상 이실두르처럼 반지와 악의 유혹에 휘말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끊임없는 자기 의심이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자기 정죄가 쌓여서, 아라곤은 왕좌를 이어받을 수 있는 용기도 없었고, 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조차 뿌리 깊이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지 원정대에 함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두려움과 조상의 죄책감을 이겨 내기 시작합니다.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길을 떠난 이들과 동행하는 동안, 아라곤은 단지 무력이나 권위가 아닌, 진정한 용기와 헌신으로 동료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조상과는 달리 “절대 반지의 악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없애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동료들을 돕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스스로는 반지를 소유하지 않았지만, 반지를 지닌 프로도와 그 곁의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숱한 전투와 유혹 속에서도 ‘반지의 힘을 탐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 냅니다.
결국 그는 “이실두르가 실패했던 과제를 후손인 내가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내고, 인간과 엘프, 호빗과 드워프가 하나 되는 연대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기까지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사우론의 군대를 상대로 과감히 전쟁을 걸고, 자신의 힘을 다해 동료들을 지켜 내는 장면에서, 그는 더 이상 “조상의 잘못된 길을 밟을까 두려워 숨어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반지가 결국 파괴되고 사우론의 권세가 무너져 내렸을 때, 아라곤은 마침내 스스로 “나는 조상과 다르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책임 있게 완수했다”는 내적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 결말로 아라곤은 ‘엘레사르’라는 이름을 받아 곤도르의 왕으로 즉위하고, 왕이 된 이후에도 과거의 경험과 겸손을 잊지 않으면서 백성과 중간계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훌륭한 통치자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를 가리려는 노력을 멈췄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마련하신 용서의 가죽옷을 입었어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또 과거의 망상이 자기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매진했어야 합니다. 그 뜻에 자기 뜻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던 것처럼.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자아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 다른 이들을 심판하게 만들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사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민족에게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직무를 맡기심으로써 과거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결국 나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는 가장 완전한 길은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믿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자격이 없다’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타인을 판단하면서 합리화하려고만 합니다. 죄책감이 없었다면 분명 사명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사명을 받아들여 수행함으로써 이전의 나를 판단하던 자아는 죽습니다. 자아를 죽이는 가장 완전한 길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발밑에서 계속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뱀의 소리는 그저 쐐야 쐐야 하는 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렇게 뱀이 무력하게 될 때 나는 의로움으로 타인을 심판할 존재가 아닌 용서할 존재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완전한 용서의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어느 마을에 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계속된 가뭄에 마을 사람들은 성당에 가서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째 계속 성당에서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성당 한가운데에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너희의 기도가 닿았다. 참된 믿음을 가진 이가 제단에 초를 봉헌하면 곧바로 비를 내려주겠다.”
사람들은 서로 주저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를 봉헌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신부도 수녀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자들도 차마 신부, 수녀에게 초를 켜라고 하기 힘들어서, 신자들의 대표이며 믿음이 크다고 알려진 사목회장님이 등 떠밀려서 제대 초를 켜서 봉헌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누가 제대 초를 켜서 봉헌해야 하는지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밖에 없다는 의견이 모이고 있을 때, 성당 한가운데로 한 꼬마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를 켜서 제단에 봉헌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의 복장에서 참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비가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또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비가 내리길 기도하면서도 비 올 것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를 하느님께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시면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또 남을 단죄하지 말고, 무엇보다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제일 못하는 부분이 아닐까요? 너무 쉽게 심판하고 단죄하고 있으며, 용서를 가장 힘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온전한 신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온전한 신뢰는 지키기 힘들어도 그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이 말씀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보이는 굳은 믿음의 소유자만이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 박경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심판에 발목이 잡혀 우리 영혼을 잃어버립니다. 심판에 빠져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딘지를 묻는 은총과 용서의 사순입니다.
용서는 빛 속을 걷게 하지만 심판은 사람을 끊임없이 어둠으로 중독시킵니다. 심판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심판의 돌을 던지면 그 심판의 돌은 또 다른 심판의 돌이 되어서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심판을 끊는 것이 복음입니다. 심판은 우리 모두를 가두지만 복음은 우리 모두를 자유로이 풀어줍니다. 복음을 벗어나는 심판을 멈추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용서로 걸어가야 할 때입니다.
심판에 빠져있는 우리를 건져올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나누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자비이고 멈추어야 할 것은 심판입니다. 되받아야 할 자비의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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