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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1/20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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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2025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월 20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1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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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히브 5,1-10
오늘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곧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10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마르 2,18-22
오늘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20일
최봉용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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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사랑의 취객

오늘의 복음은 어제의 복음과 내용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이십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과방장을 감탄하게 하신 ‘좋은 포도주’이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의 1항에서 구약을 뛰어넘는 신약의 새로움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한 사건’은 나와 온 우주를 뒤흔드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은 이제 우리네 인간의 노력이기보다는 자신이 만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에 화답하듯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항 첫 시작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는지를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를 다시 활기차게 하신 ‘차고 흘러넘치는’ 충만한 포도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우리는 모두 ‘사랑의 취객’입니다. 감사와 찬미를 그분께 바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같아지셨으니 같아지자.

히브리서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심이고,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셨으니 우리도 주님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같아지심 중 하나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유혹받으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받으셨다는 것이며,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혹과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고, 유한하기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있다면 고통이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통이란 것이 본래 내가 원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그 반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굶주림은 본성상 인간이 너무도 싫어하고 원치 않는 것이며, 반대로 먹는 것은 즐거운 것이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기에 식도락이란 것이 있지요. 

그러니 굶주림 또는 먹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저의 어렸을 때의 고통은 굶주림의 고통이었고 이 고통과 비교하면 다른 고통은 사치스러운 고통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고통은 이렇게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요, 반대로 원하지 않는 것,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곧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원치 않는 곧 하기 싫은 것을 다 피할 수 있다면 나는 늘 즐거울 것이고 고통이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리고 인간은 유한하기에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그리고 인간은 고통을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고통을 인간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이렇게 인간의 조건인 측면도 있지만 영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내 원하는 대로 되게 하고 원치 않는 것은 피하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때 나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눈을 돌리면 그래서 주님처럼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보게 되면 영적인 고통이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도 얘기하듯 주님도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성부께 기도하셨고, 그러나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며 아버지 뜻에 순종하심으로 당신의 고통이 영적인 고통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고통은 우선 시선 돌림입니다. 고통에 갇히지 않고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고 이것이 실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린 고통에 신음만 할 뿐 기도로 바꾸는 데 얼마나 자주 실패합니까? 

그러므로 고통스럽기에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고,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그런 관상적인 기도를 우린 배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없기에 고통을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어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이것이 영적인 기도의 더 높은 차원입니다. 시선을 고통으로부터 하느님께 돌릴 뿐 아니라 사랑 때문에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 따르기를 한 번 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주님을 본받아 이런 영적인 고통을 받고 사랑의 순종을 산 분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순종의 근본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도 근본에서 본을 받는 사람이 되고 성인이 되라고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

어제 <복음>인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신랑인 그리스도의 때’가 열렸음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29-31)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며,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새로운 단식입니다. 그래서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되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2,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게 하소서.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미사는 제사일까, 축제일까?

오늘 복음은 소위 ‘단식 논쟁’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각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려고 하는 시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 예배의 차이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바라는 제사 형식이었지만, 신약은 신랑을 맞이하는 축제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사실 신약에 와서도 구약의 예배 형식대로 돌아가려는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특히 중세 시대에 성체성사는 깊은 경외심으로 접근되어야 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의된 ‘실체 변화’ 교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성체성사에 대한 헌신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영성체를 모독죄로 연결시키며 성체를 합당하지 않게 받을 경우 큰 죄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성사의 신학적 강조는 신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지나친 양심의 가책을 유발했던 것입니다. 많은 평신도는 성체를 연 1회, 특히 부활 시기에만 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엄격한 참회의 요구 조건은 많은 이들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독할 위험을 피하고자 차라리 영성체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나친 신중함과 성체성사에 대한 망설임은 지속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영성체를 멀리함으로써 많은 신자는 교회의 성사적 삶과의 중요한 연결을 잃어버렸습니다. 16세기에 등장한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불균형에 대한 반응 중 하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교회가 두려움과 법주의를 조장하고, 그리스도의 해방적 은총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실체 변화와 같은 특정 가톨릭 성사적 관행에 대한 개신교의 거부는 이러한 역사적 긴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까지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부담만 느껴야 한다면 멀어지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는 제사가 아니라 혼인 잔치여야 합니다. 마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처럼 울고 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기쁨으로 그분을 붙들려고 하는 순간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당신 안에 계신 아기 예수님의 활동을 깨닫고는 기쁨의 마니피캇을 부르신 모습과 같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예배방식입니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경섬유종증으로 외모가 심각하게 훼손된 비니치오 리바(53)를 따뜻한 포옹과 키스로 감싸 안아주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습니다. 리바는 이달 초 바티칸의 세인트 피터스 광장을 방문했다가 교황의 따뜻한 포옹을 받았습니다. 리바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꼭 천국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오직 사랑이었고 세상이 바뀌는 순간을 체험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리바는 당시 교황과의 만남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내가 먼저 교황의 손에 키스했고, 교황의 다른 손은 나의 머리와 상처를 어루만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교황은 내 얼굴에 키스하면서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나의 머리는 그의 가슴 앞에 있었고, 그의 손은 나를 감싸 안았다.”라며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 “교황의 어루만짐은 1분가량 이어졌지만, 나에게 그것은 영원 같았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리바는 “교황은 완전히 침묵했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가끔은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라며 “당시 내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같이 강하게 뛰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이것이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의 기분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 기쁨이 그리워 단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마더 데레사 성녀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기쁨은 영혼을 잡는 사랑의 그물이다.”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그녀의 기쁨은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은 우울한 형식주의 예배에 참여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기쁨을 지향하는 신앙입니다. 그 기쁨을 절실히 바라기 때문에 단식하는 신앙입니다. 성체성사의 혼인의 의미가 올바로 회복되지 않으면 가톨릭교회는 점점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빛을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죽는 순간에 ‘사랑받았다’라고 느끼며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쓸모 있는 사람, 쓸모없는 사람, 그리고 도움 되는 사람, 도움 되지 않는 사람 등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쓸모 있고, 도움 되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시선으로만 보게 되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사랑,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상대가 ‘사랑받고 있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일까요? 많은 봉헌과 거창한 희생을 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미소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웃으며 인사만 잘 해도 상대는 어느 정도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주님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만남은 사랑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서 사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순히 유다교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있음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단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단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며, 그래서 단식을 언제 하고 언제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식도 바로 사랑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단식해야지, 그냥 막연한 전통을 따르기 위한 단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그 안에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잊어버리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된다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일도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을 새롭게 세워야 합니다. 주님의 기준이 ‘사랑’에 있듯이, 우리도 ‘사랑’에 기준을 두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가? 바로 이 순간을 움켜잡아라.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시작하라.

- 괴테, ‘파우스트’ 중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잃어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소중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본질이 함께하는 사랑임을 너무도 잘 압니다.

잔치와 단식은 모두 신랑이신 예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새롭게 되지 않으면 잔치도 단식도 빛을 잃습니다.

그릇된 마음을 버리는 것이 단식입니다. 담아야 할 것을 담는 것이 단식의 올바른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수난도 있습니다.

수난을 통하여 드러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사랑은 찢어지는 이 여정까지 건너뛰지 않습니다. 더 견고해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결실을 맺으십니다. 새 포도주를 마주하기 위해 새 부대가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쓴맛과 단맛을 번갈아 함께 맛보며 더 깊어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잔치이며 또한 단식입니다. 십자가의 여정에 함께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욕망은 결코 복음을 향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도록 오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단식은 이제 그만 우리의 아집을 내려놓고 하느님 사랑에 하나 되는 것입니다. 잔치도 사랑 단식도 사랑 공적인 생활도 십자가의 수난도 모두 사랑입니다. 더 사랑하고 더 집중하기 위해 겸손과 절제라는 단식이 있습니다.

단식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새 부대에 담는 이 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우리들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사는지를 묻는 소중한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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