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5/01/18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 18.
반응형

 

 

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5년 1월 18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월 18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1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히브 4,12-16
오늘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마르 2,13-17
오늘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18일
유성현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31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가회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가회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06: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생중계 없음


  • 남양성모성지 온라인 매일미사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남양성모성지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생중계 없음 / 화 11:00 / 수 11:00 / 목 11:00 / 금 11:00 / 토 11:00


  • 원당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원당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원당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10: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10:00


  • 초당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초당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초당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0:30 / 월 06:30 / 화 19:30 / 수 10:00 / 목 19:30 / 금 10:00 / 토 10:00


  • 팔로티회 온라인 매일미사
    팔로티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나를 따라라 그러자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일치 주간의 첫째 날 우연히도 우리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르 2,14)의 소명 이야기를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레위를 기꺼이 당신의 제자로 뽑으셨고, 이어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죄인들의 친구’로 낙인찍히셔야 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의 문턱은 눈에 띄게 낮아졌습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신학교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던 저는 막상 신학교 지원을 앞두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저녁 미사를 드리는데 그날 복음이 바로 오늘 복음과 같았습니다. 

복음이 봉독되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2,14) 하는 말씀을 들을 순간부터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영성체를 어떻게 하였는지, 미사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습니다. 미사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앉아 있다가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며 일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마르코 복음 청년 성서 연수’에 참여하여 오늘 복음을 다시 만났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그럭저럭 넉넉하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은, 좀처럼 충족되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레위의 마음도 제 마음도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제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죄에 갇히지 않고 은총에로 나아가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 생각게 합니다. 나는 진짜 하느님을 믿는가? 믿는다면 하느님을 어떤 하느님으로 믿는가? 왜 이런 생각을 또는 성찰을 하게 됐는가 하면 오늘 히브리서가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자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존재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겠지만 하느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무엇보다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존재하셔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랑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믿는다고 해도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어야 하는데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적절하게 드신 비유가 있습니다. 종들에게 각각 한 미나를 주고 떠난 주인이 다시 돌아와 셈을 합니다. 

다른 종들은 그것을 열심히 활용해 주인이 돌아왔을 때 불려 되돌려드리는데 마지막 한 종은 그것을 그대로 되돌려드리고 왜 그랬느냐고 추궁을 당하자 주인이 주지도 않고 빼앗아 가는 냉혹한 분이라고 믿기에 그랬다고 답합니다. 

결국 그 종은 믿음대로 냉혹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 종은 은총의 어좌로 나간 것이 아니라 냉혹한 심판관의 어좌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유혹에 쉽게 넘어가 죄를 짓곤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죄 때문에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만듭니다. 하느님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죄 때문에 하느님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미성숙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의 죄에 갇힙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지은 다음 한 짓이고 그 후예인 우리가 이어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성왕인 이유는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많이 죄지었지만 자기 죄에 갇히지 않고 그 죄를 가지고 늘 자비하신 하느님께 나아갔기 때문인데,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시편 ‘Miserere’가 바로 주님께 나아가며 바친 시편입니다. 

그는 이 시편에서 “하느님 자비하시니”를 제일 먼저 입에 올리고, 자기 죄를 감추는 대신 오히려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나아가 히솝의 채로 깨끗이 씻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합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씻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가 부르심을 받는 얘기도 이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죄를 안 지었다고 생각하며 레위를 단죄하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를 제자로까지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가르침을 제대로 받는 우리는 하느님 자비하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믿읍시다. 그래서 자기 죄에 갇히지 말고 하느님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전인격을 동반한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의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의 방식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여,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부르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2,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제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르심

초등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앞으로 불러서 숙제로 제출했던 저의 글을 직접 읽으라고 하셔서, 또박또박 그리고 큰 소리를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난 뒤에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잘 썼다고 친구들 앞에서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읽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곧바로 저 다음 다른 친구를 불러서 그 친구에게도 직접 쓴 글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글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글을 써서 단 한 번도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저였습니다. 그에 반해 제 다음에 발표했던 친구는 계속해서 상을 받았습니다. 이 친구는 “이렇게 쉬운 것을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글 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벌써 40년도 훨씬 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글을 잘 써서 상도 받고 칭찬도 받았던 그 친구는 뛰어난 작가로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글을 쓰지 않고 그냥 평범한 회사원으로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부가 된 후 20년 넘게 꾸준히 글을 쓰고 있고, 책도 여러 권 출판했습니다. 만약 선생님께 지적받은 것을 계속 기억해서 ‘나는 글재주가 없어.’라면서 글 쓰는 것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재능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재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재능보다 더 필요한 것은 꾸준함이 아닐까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때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따릅니다. 사실 당시의 세리는 로마제국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동포인 유다인들에게 매국노, 부도덕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고, 예수님과 함께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만약 그가 사람들의 말을 따랐다면, 우리는 마태오 사도를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격 운운합니다. 때로는 성당에 나올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자격이 주어집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만 있다면,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만 갖는다면, 지금과 다른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그림자를 두려워 말라. 그림자란 빛이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비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 루스 E.렌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병들어도 괜찮고 죄인이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듯 우리는 사랑을 먹으며 성장합니다.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은 삶의 한가운데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산다는 것은 행복한 삶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도 우리요 물을 마시는 것도 우리자신입니다.

의인이 결코 아닌 우리를 기쁘게 부르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삶이 조금씩 아름다워지기 시작합니다. 조금 늦어도 많이 더뎌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름다운 삶을 배워나갑니다. 배우고 익히며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십니다. 음식을 씹으며 물을 마시며 감사를 드립니다. 죄인이기에 병들었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이렇기에 더 행복할 수 있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우리는 행복한 죄인입니다. 행복한 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시간이 행복입니다. 행복한 부르심 행복한 식사의 참기쁨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