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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2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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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

 

 

2022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가 주님 말씀에 따라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가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이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당신 손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28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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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저희의 희망이신 하느님, 하느님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있을 수 없고 하느님만이 저희를 지켜 주시니 풍성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피시고 이끄시어 저희가 지금 현세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며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3장 47-53절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신현범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7월 28일 (목)
신현범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김주신 멜키올 신부 강론

 

 

2022년 7월 28일 (목)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우리 자신의 곳간엔 무엇이 들어있나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깨달은 제자들을 일컬어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자기 곳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곳간은 내일의 운명은 모른 채 재산을 모아 두고 좋아하는 ‘부자의 곳간’(루카 12,16-21 참조)과는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고 채워 주시며 영원히 존재할 이 곳간은 하느님의 지혜와 말씀이며, 예수님, 그리고 교회와 성사, 곧 하느님 그 자체입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그들의 보물 곳간을 채워 준다”(잠언 8,21). 

하느님께서는 이 곳간들을 마련하시고 채우시어 우리 몫으로 주셨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그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단순히 알고만 있는 이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방법을 그 곳간에서 꺼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성경적 지식이나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성경과 교리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만나 이루어진 ‘실천적 지식’을 지닌 사람입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은 이 지식을 온 세상을 위해서도 꺼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온갖 다양한 순간에 삶의 길을 묻고 치유를 청하는 세상 모든 이에게 곳간에 채워진 모든 것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곳간의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먼저 우리 자신의 곳간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부터 살펴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비유를 이해하면 천국 : 비유의 완성은 밥이다.

 

데일 카네기에게 한 여성이 ‘걱정 극복 사례’로 보내 『자기 관리론』에 나온 내용입니다. 

"대공황 대 남편이 버는 돈이라고는 한 주에 평균 18달러 정도였습니다. 남편이 자주 아프다 보니, 그마저도 벌지 못할 때가 많았지요. 가벼운 사고도 잦은 데다 볼거리, 성홍열은 물론 독감도 여러 번 앓았어요. 결국 우리는 직접 지은 집을 잃었습니다. 식료품점에 주어야 할 돈이 50달러나 밀려 있는데, 먹여야 하는 아이는 다섯 명이나 되었습니다. 저는 이웃의 빨래와 다리미질을 해주면서 돈을 벌었고, 구세군에서 산 중고 의류를 수선해서 아이들에게 입혔습니다. 걱정이 많아 병이 날 정도였지요. 

하루는 외상값이 밀린 식료품점 주인이 연필을 훔쳤다며 일곱 살 난 제 아들을 야단쳤습니다. 아이는 억울하다고 울었습니다. 정직하고 예민한 아이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 얼마나 놀라고 부끄러웠을까요? 저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이제껏 겪어왔던 비참한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앞날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요. 그래서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세탁기를 끈 다음 다섯 살 난 딸아이를 데리고 침실로 가서는 종이와 헝겊으로 창문과 벽에 난 모든 틈을 꼭꼭 틀어막았습니다. 어린 딸은 “엄마, 뭐해?”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곳을 막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다음 침실의 가스난로를 켰습니다. 불은 붙이지 않았어요. 딸아이와 나란히 침대에 눕자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엄마, 이상해. 우리 좀 전에 일어났잖아!”

저는 “괜찮아. 우리 둘이 낮잠이나 자자꾸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눈을 감고 난로에서 새어 나오는 가스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가스 냄새는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깜빡 잊고 부엌에 있는 라디오를 끄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젠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찬송가를 듣다가 제가 얼마나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혼자서 문제와 싸우고 있었던 거예요.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하느님께 맡기지 않았던 것이지요. 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스난로를 끄고 문과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날은 온종일 울며 기도했습니다. 저를 도와달라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이 제게 주신 복, 곧 건강하고 멋지고 마음씨까지 착한 다섯 아이를 주신 것에 감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 배은망덕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후로 지금껏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집을 잃은 뒤 우리는 한 달에 5달러를 내기로 하고 임대한 시골의 작은 학교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그런 집에서라도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지붕이 있어서 뽀송뽀송하고 따듯하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이보다 더 심한 상황이 닥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제 기도를 들은 것 같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거든요. 물론 하룻밤 사이에 좋아진 것은 아닙니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우리는 돈을 조금 더 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커다란 골프장의 휴대품 관리소에서 일했고, 부업으로 양말을 팔았습니다. 아들 한 명은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열세 마리나 되는 소의 젖을 짰지요. 어느덧 아이들은 다 자라고 결혼해서 제게 자랑스러운 손주를 세 명이나 안겨주었어요. 

가스를 틀고 누웠던 끔찍했던 날들을 돌이켜볼 때마다 저는 늦지 않게 저를 ‘깨워주신’ 하느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린답니다. 그때 일을 저질렀다면 저는 인생의 수많은 기쁨을 맛보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살아온 즐거운 인생을 영원히 잃어버렸겠지요.

이제는 누군가에게 더 이상 살기 싫다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소리치고 싶어요. “그러면 안 돼요! 절대로 그러지 말아요!” 우리가 아무리 암울한 날들을 보낸다 해도 그 시간은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때가 지나면 미래가 펼쳐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선한 물고기인지 악한 물고기인지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전히 나에게 의지하면 나는 악인이고 주님께 맡기면 선한 물고기입니다. 

세상에 사탄교가 있다는 것 아십니까? 사탄교도 성경처럼 자신들의 사탄경이 있습니다. 사탄경 1장 1절은 이렇습니다. 

“네 삶의 주인은 너 자신이다.”

신앙인의 첫째 진리는 이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죽음 직전에도 내 삶의 주인이 여전히 나라면 나는 사탄교의 단원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만들 수 없는 인간이면서 어떻게 나의 창조자가 나라고 여길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럽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살라고 합니다.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귀가 찢어질 듯한 포성이 터지고, 팔다리가 잘려 나가 비명을 지르는 전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참호 안에서 당신을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신을 찾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신을 찾지 않는다면 나쁜 물고기가 분명합니다. 

나쁜 물고기에서 좋은 물고기가 되는데 단 20분이면 충분합니다. 결단만 내리면 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평생 이 20분의 회개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영원한 불지옥을 선택합니다.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아서 좋은 건 도대체 무엇입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임언기 신부가 임종 직전 한 냉담 신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간암 말기 환자였는데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끝까지 성사를 거부하는 것이 안타까워 청했던 것입니다. 배에 이미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할 것이 없느냐고 묻는 신부님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말을 못 하나 싶어 십계명을 일일이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병자는 미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환자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나 죄 없어!” 

바오로 사도는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10)라고 말합니다. 천사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분은 오랜 냉담으로 하느님의 비유를 계속 거부하고 계셨기에 가장 중요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비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유의 완성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비유의 완성은 이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누군가가 주는 선물은 다 비유입니다. 그 선물 안에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볼 수 있으면 비유를 이해한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의 비유를 다 알아들었을 때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는 라면 하나의 가치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유의 완성은 밥입니다. 그리고 밥을 이해하면 그 밥을 주시는 분께 죽음까지도 맡길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위 이야기에서 다섯 살 된 딸은 엄마가 함께 죽음으로 가자고 할 때 미심쩍은 마음에서도 엄마와 함께 누웠습니다. 어떻게 엄마에게 목숨까지 맡길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엄마가 주는 비유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비유 중에 ‘밥의 비유’를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어머니의 자녀가 됩니다. 

박철민 배우가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와서 어머니가 해 주셨던 조기 매운탕을 먹고는 오열하는 장면은 밥의 비유를 이해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 이름도 모르지만, 어머니께 마지막까지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은 밥의 비유이고 이 비유를 이해하면 이제 하느님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밥의 비유는 마지막입니다. 작은 비유들의 포인트가 쌓이다 보면 결국 이해하게 되는 게 밥입니다. 그 밥에 주시는 분의 살과 피가 들어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의 비유를 이해하면 좋은 종류의 물고기가 되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모든 비유는 바로 성체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한 밑밥입니다. 우리는 성체의 비유를 이해하고 그 밀떡을 하느님의 살과 피로 주시는 양식으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물의 비유

 

종종 꾸는 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을 꾸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군대에 다시 이등병으로 입대하는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제대했는데, 당시 나의 선임들이 꽉 차 있는 내무반에 이등병으로 있는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니 기뻐할 일인데도,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라서 그럴까요?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 필요 없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좋아하는 일이 아니어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군대 시절이지만, 제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일만을 쫓으면 해야 하는 일을 놓치고 맙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포기하면 어떨까요? 나의 발전을 가져올 변화의 가능성이 줄어들게 됩니다. 어떤 공부도 공부는 해야 하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재미없다고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재미없어서 포기해야 할까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떠올리면 재미없어도 해야 하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일만이 우리가 해야 할 진리가 아닙니다. 해야 하는 일에 충실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발전과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물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비유된 바다에 던져진, 특히 티베리아스 바다에서 쓰던 것은 길이가 4~500미터, 넓이가 2~3미터나 되는 큰 그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잡힐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고기만 잡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고기도 잡힙니다. 그물 안에 들어왔지만, 나쁜 고기라서 하느님 나라라는 그물 밖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고기는 하느님 나라에 살기에 합당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기 좋아하는 것만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먼저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보다 필요한 일을 먼저 찾았습니다. 
 
이 좋은 고기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내세운다면 절대 좋은 고기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고기는 주님의 사랑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었고, 자기 좋아하는 것을 쫓는 이기적인 사람보다 주님 좋아하는 것을 먼저 좇은 이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기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그물에 있을 것 같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남들보다 잘하려고 고민하지 말라.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 게 중요하다.

- 윌리엄 포크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태 13, 48)

 

마음의 바다에서 마음의 그물을 던진다. 바다는 받아들이고 그물은 차별하지 않으며 이 모두를 끌어 올린다. 마음 안의 일과 마음 밖의 일이 하나가 된다. 

소중한 것을 못 찾아서 아직도 우리는 헤매인다. 하늘 나라는 헤매고 있는 우리를 끌어올려 소중한 것을 만나게 한다. 과거의 것을 끊어야 참된 것과 새것을 만날 수 있다. 하늘 나라를 만나야 할 곳이 바로 우리 마음의 자리이다. 

마땅히 만나야 할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않기에 그물이 있는 것이다. 그물같이 끌어올려 열게되면 보이게 된다. 던지고 끌어올리고 선별하는 사람의 실천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냐를 묻게 된다. 변화가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하늘 나라는 그물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내어주고 맡겨드리는 삶이 참된 삶이다. 내 것을 만들려는 욕심의 시간을 끌어올리니 아무 것도 내 것이 아니다. 하늘 나라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믿고 따르는 받아들임의 나라이다. 이 변화의 과정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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