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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3/10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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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들이 제 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천상의 가르침으로 저희를 회개시키시어 사순 시기에 올바른 마음으로 선행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2025년 3월 10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3월 10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3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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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레위 19,1-2.11-18
오늘 제1독서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 
너희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12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너희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님이다. 

17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18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

 

 

마태 25,31-46
오늘 복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10일
김광두 고스마 신부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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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작은 이들’이 되어 ‘작은 이들’과 함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40)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 준 의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의 ‘가장 작은 이들’은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로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의인이 되려면, 이 가장 작은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작은 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1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이 죄짓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6절 참조).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10절 참조).

그리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14절 참조). 바로 이 작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어린이처럼 스스로 작아진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작은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의인들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업신여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해서 입을 것과 먹을 것, 그리고 머물 곳이 없는 이들은 죄의 유혹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과 함께하도록,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모든 이가 하느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서로 도우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작은 이들’이 되어 ‘작은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처럼 주님처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크게 요약하면 이런 것 같습니다.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네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네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뉩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이 주님이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그런데 오늘 말씀을 뜯어보면 사랑의 상승이 있습니다.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여기애인(如己愛人)에서, 내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여주애인(如主愛人)으로. 그러므로 상승의 시작인 나 자신처럼 이웃 사랑하기를 보겠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동일시(同一視)와 불이시(不二視)입니다. 동일시란 너와 나는 같고 하나라는 시각이고, 불이시는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우리 인간관계는 다름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다름에서부터 출발하지만 같음과 하나를 추구할 수도 있고, 다른 존재가 같을 수는 없고 하나 될 수는 더더욱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다름 때문에 같을 수 없고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고, 다르지만 같음도 있고 둘이지만 둘이 아니라 실은 하나라는 걸 보는 겁니다. 이것을 쉽게 경상도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가 남이가?’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다르지만 남이냐 하면 남은 아니라는 말이고, 다른 것만 보며 남이라고 하지 말고 같은 점을 보며 남이 되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민족인데 다름만 보기에 남북이 적이 되고,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다름만 보기에 좌와 우가 극좌와 극우가 되어 싸웁니다. 이렇게 가다가 남과 북은 영원히 다른 나라가 되고, 대한민국은 둘로 쪼개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사랑은 다름 때문에 남남인 채로 살려는 것을 극복하고, 같음을 발견하려고 애쓰며 하나를 살려고 하는 의지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과는 남남인 채 사는 것이 편하고, 다른데도 같음을 보고 하나가 되려는 것은 너무 힘든 것인데 주님께서는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당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런 놀라운 표현을 하십니다.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그런데 우리의 주님께서 이렇게 이웃을 당신 형제라고 하시고, 이웃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것이라며 이웃과 당신을 동일시하시며 당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오늘 신명기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며 ‘나는 주님이다.’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라고 하신 분이 우리의 주인님인 것 맞습니까?

주인님이 이리 말씀하셨는데도 나는 남남인 채로 편히 살겠다고, 남남인 채로 편하게 사는 것에 안주하며 살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앞에서 사랑은 의지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려는 의지이고 더 고귀한 사랑을 향한 상승 의지입니다. 고귀한 사랑이란 주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남이 아니라 주님으로 사랑하는 것인데 이 고귀한 사랑을 향한 상승 의지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봉헌의 삶을 사십시오. 연민의 삶을 사십시오. 친교의 삶을 사십시오.

오늘은 [또르 데 스뻬키 수도회](Tor d'Specchi)의 창설자요, 로마의 주보성녀인 프란치스카 로마나(Francisca Romana, 1384~1440)) 대축일입니다.

프란치스카 로마나 성녀는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성인 돌아가신지 36년 후인 1384년에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의 삶을 갈망했습니다. 그렇지만, 열두 살 때쯤에, 부모님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 40여 년 동안 결혼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슬하에 일곱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전쟁과 역병으로 인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고, 로마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성녀는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직접 봉사하면서 자신의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그녀는 1425년 8월 15일, 45세 때, 현재의 프란치스카 로마나 수도원인 [산타 마리아 노바 수도원]의 봉헌자로 응답하였고, 1433년 3월 25일에 함께 봉헌한 자매들과 함께 [또르 데 스뻬키](Tor d'Specchi) 수녀원을 창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창설한 이 수녀원에 자신은 입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혼인한 한 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52세 때, 1436년, 그녀는 남편이 타계하자, 비로소 공동체에 입회하였습니다. 한참 늦은 ‘늦깎기 성소’인 거죠. 그리고 4년 후, 1440년 3월 9일 56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삶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는 가정과 신앙의 조화입니다. 성녀는 결혼한 여성으로서 가정을 충실히 돌보면서도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오늘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큰 모범이 됩니다.

<둘째>는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성녀는 전쟁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랐습니다. 성녀께서는 우리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는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셋째>는 사랑과 봉사의 실천입니다. 성녀는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직접 돌보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작은 실천을 통해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르 벡에 있는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 봉헌자 수녀원”의 사라 수녀님은 “오늘 올리베따노회 수도자들에게 주는 성녀 프란치스카의 메시지”를 세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예, 제가 원합니다.” 라는 순명, 곧 봉헌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녀께서는 말합니다.

“봉헌되고 선사되고 바쳐지고 남김없이 자신을 쏟아 붓는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되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을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계획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더 좋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 계획에 늘 열려 있으십시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께 바치는 삶을 갈망했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은수 성소를 갈망했습니다. 그렇지만 열두 살 때, 부모님의 뜻에 따라, 불타오르는 자신의 갈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인의 부르심에 “예, 제가 원합니다.” 하고 응답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이상한 병에 걸렸는데, 성 알렉시오의 전구로 기적적인 치유를 얻게 됩니다. 기도 중 환시에서, 성 알렉시오가 그녀에게 “낫기를 원하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예,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낫기를 원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녀의 일생 전부는, 주변의 상황에 대해,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 하인들과 이웃들의 요청에 대해, 온통 “예” 라는 순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녀는 1425년 8월 15일, 45세 때, 현재의 프란치스카 로마나 수도원인 [산타 마리아 노바 수도원]의 봉헌자로 “예” 하고 응답하게 됩니다. 그때 그녀는 [봉헌증서]를 통해, “저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저를 봉헌합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녀는 함께 봉헌한 자매들이 자신들이 봉헌을 공동체 생활로 확장시키고 싶어 했을 때도, “예” 라는 순명으로 이 요청을 받아들여 그녀는 [또르 데 스뻬키](Tor d'Specchi) 수녀원을 창설하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입회한 자매들은 여전히 [산타 노바 수도원] 수도원의 봉헌자 신분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곧 봉헌자 수도공동체였던 것입니다.

1436년 5월 20일, 그녀는 남편이 타계하자, 비로소 공동체에 입회를 청원합니다. 그때 나이가 52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예, 원합니다.” 라고 하던 그 순명의 정신이 마침내 수도생활에 대한 응답으로 심화되었던 것입니다.

성녀께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대단한 영성을 지니십시오. 하느님께 ‘전부’를 바치면 그분은 ‘전부’를 되돌려주십니다. 툭 트여 막힘이 없는 영성을 지니십시오. 하느님께 전부를 청하십시오. 마치 소화 데레사께서 그리 하였듯이 ‘전부’를 선택하십시오.”

<두 번째> 메시지는 “당신(타인)을 위하여” 라는 연민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녀께서는 말합니다.

“연민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되십시오. 형제자매들의 좌절과 가난을 깊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십시오.”

<세 번째> 메시지는 “당신과 함께”라는 친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친교의 사람이 되십시오. 늘 타자에게 열려있고,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십시오. 모든 타자 중 으뜸 타자, 곧 ‘절대 타자’이신 하느님께 그러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한 몸”(Unum Corpus)을 몸으로 실현하십시오.” “사랑하기를 좋아하십시오. 여러분의 우정과 인간관계에 충실하십시오. 어머니가 되고 딸이 되고 누이가 되십시오.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되고 형제가 되십시오.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가꾸어 나가십시오. 성찬의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성녀께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봉헌의 삶을 사십시오. 연민의 삶을 사십시오. 친교의 삶을 사십시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2,39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주님!
이웃을 남이 아니라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로 보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을 내 몸으로 
사랑하게 하시고
내 몸을 사랑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옥이 없다는 헛된 희망을 주는 이들에게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짐승의 사랑의 수준이 있고, 인간, 그리고 성인들의 사랑의 수준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도 구제받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을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이와 달리 엄격한 심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지만,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해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린 것이며,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하느님께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은 내가 먼저 구원받아 그 사랑의 기쁨과 능력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이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라고 말씀하십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는 매우 탐욕스럽고 냉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가난한 이웃과 직원들을 경멸했습니다.

어느 성탄 전날 밤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들을 만난 후에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그 이전까지 그는 절대 다른 이를 돕거나 구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내면의 구원을 받은 이후에야 비로소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도움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아기를 사랑한다고 아기가 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의 눈높이에서 아이를 끌어올립니다.

그러나 만약 아기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들고 그 물속에는 괴물들이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죽을 것이 뻔한데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게 사랑일까요?

부모는 또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게 함께 죽는 것이라고 믿고 뛰어들어 죽으면 그 부모를 통해 새로 태어날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는 생명을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생명에 대한 경시일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은 낚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깊이에 있는 물고기들은 낚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어두운 심해로 들어가서 눈을 잃은 물고기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 물고기를 낚겠다고 그 압력 높은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오히려 생명에 대한 경시입니다.

반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히틀러는 어릴 적부터 가진 열등감과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차 증오와 야망으로 자신을 채웠습니다.

작은 악들이 쌓여 마침내 그는 유대인을 향한 끔찍한 학살과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가는 최악의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결국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고, 최후의 순간에도 회개하지 않은 채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또 다른 예로, 『반지의 제왕』의 골룸은 우연히 절대 반지를 얻은 이후부터 탐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 전체를 그 반지에 투자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반지를 얻으려는 집착만이 남아 삶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저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해 몇 년간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저에게 다가오기 어려워집니다. 가리옷 유다처럼 더는 희망을 할 수 없는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다른 죄는 용서받아도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비행기의 비상 상황에서 산소마스크를 먼저 착용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먼저 안전하고 구원받은 상태에 있어야만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관들이 화재 현장에서 반드시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한 후에야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옥이 존재하고 심판이 존재합니다. 사랑으로 심판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모기나 기생충은 사랑을 배울 수 없는 수준입니다. 희망이 없는 것에 희망을 거는 것은 나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경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받아서 주는 것이라 그 받은 사랑을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하느님이 계셔야 사랑이라고 말하며 하느님 생명까지 경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심판이 없는 게 사랑이 없는 것이지, 사랑이 있다면 심판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서도 일부러 죄를 짓는다면,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제물이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판, 그리고 적대자들을 삼켜 버릴 맹렬한 불에 대한 무서운 예상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히브 10,26-27)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여름방학이 가까워지면서 걱정이 생겼습니다. 본당에 가면 여름 캠프를 함께 해야 하고, 따라서 아이들과 물놀이를 해야 할 텐데 저 자신이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계속 걱정이 되었고, 나름의 생각 끝에 도서관에 가서 ‘수영 교본’을 빌려서 읽었습니다. 방학 전에 이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름 캠프에 가서 멋지게 수영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수영은 물에 들어가야지만 배울 수 있으니까요.
 
종종 ‘기도할 줄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기도할 줄 알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도 관련 책을 계속 읽으면 될까요? 기도에 관한 강의나 피정에 참석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직접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줄 모른다며 기도를 아예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대화도 만남도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는 정의를 기억하면서, 사람과 대화하듯 하느님과 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을 많이 읽고, 교리 지식에 대해 박식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수영을 잘하기 위해 책만 읽고 있고,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성경과 교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을, 또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에 다가선 것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 심판의 기준이었습니다. 성경이나 교리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믿고 고백한 신앙을 실제로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 배고픈 이, 목마른 이, 병든 이, 억압받는 이, 소외된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시지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2.42)
 
이웃을 향한 사랑이 곧 주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의인으로 인정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아이들은 틀에 맞추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잠재력을 펼쳐나가야 하는 존재다

- 제스 레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사람을 얻는 것이 곧 하느님을 얻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를 찾는 사람은 언제나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보다 먼저 가장 작은 이를 끌어안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만들고 이루어내시려는 진정한 복음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서 너무 먼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 너무 작아서 우리가 못 보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으로 시작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선는 가장 작은 이가 되시어 당당하게 사랑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댓가를 바라지 않기에 사랑의 실천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선입견을 버리면 안 보이던 것이 못 본 것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의 굶주림과 추위와 목마르심과 헐벗음과 병드심과 외로움에 다가가는 사순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깨어나야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가장 작은 이를 보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의 오늘 되십시오. 실행으로 옮겨지는 사랑의 평등이며 사랑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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