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주님, 저희가 시작한 참회의 생활을 인자로이 도와주시어 육신으로 닦는 이 재계를 성실한 마음으로 완수하게 하소서.
2025년 3월 7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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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58,1-9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오늘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오늘 말씀 카드
(이사 58,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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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58,1-9ㄴ
오늘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마태 9,14-15
오늘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7일
최재관 암브로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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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단식은 속죄의 날에 지키도록 정해져 있었는데, 공적으로 집단에서 지키거나 개인이 따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단식은 의도하지 않게 율법을 지키지 않았거나 어긴 것을 본래대로 회복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또한 단식은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속죄하는 행위로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후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도 단식을 권고한 기록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도교 문헌인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할 것을 권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단식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시지 않습니다(마태 6,16-18 참조). 다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이 회개해야 할 때라고 보았습니다(3,2 참조).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스라엘이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혼인하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때라고 보셨습니다(이사 62,5 참조).
단식의 실천과 관련하여 세례자 요한이 강조한 회개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치의 초대는 어느 하나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닙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영적인 삶은 비이성적인(irrational) 것이 아니라 이성에 지배되지 않는(nonrational)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단순히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장 훌륭한 단식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왜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지듯이 묻습니다. 그런데 따지듯이 물은 것이 아니라 여쭌 것인데 제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지요.
어쨌거나 이 질문에 약간 삐딱한 마음으로 이렇게 되묻고 싶어졌습니다. 꼭 단식해야 하는 건가? 그것은 단식 강박이 아닌가? 어쩌면 자기학대일 수 있지 않을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에 저의 답은, 적어도 억지로 하는 단식은 아니어야 하고, 자기학대에 불과한 단식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뭐든 다 좋자고 하는 것이니 단식도 그래야 하고, 그렇기에 어제 성숙하고 슬기롭게 선택해야 함에 관해 얘기했듯이 단식도 성숙하고 슬기로운 단식을 선택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저는 물만 먹는 단식을 주로 했는데 요즘 와서는 효소를 먹는 단식을 주로 합니다. 그러나 뭘 먹으며 하는 단식이냐보다 곧 방식보다, 무엇을 위해 하는 단식이냐 곧 목적을 더 따져 단식해야 할 것입니다.
미용 목적의 단식, 건강 목적의 단식, 치료 목적의 단식, 항의 목적의 단식과 같이 목적 단식 가운데는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단식이 있는가 하면 이웃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단식이 있는데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이웃 사랑 단식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이니 이 단식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웃 사랑 단식은 두 가지 목적을 다 이루는 단식입니다. 곧 이웃을 흡족하게 할 뿐 아니라 하느님도 흡족하게 하는 단식이고,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단식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목적으로 단식하면 어떤 효과가 그 안에 숨어 있습니까? 나의 건강, 나의 기쁨, 나의 행복, 나의 구원이 그 안에 숨어 있지 않습니까?
미용 목적의 단식만 하면 그 목적 하나만 이루는데 사랑의 단식은 미용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는데도 나의 미용에도 좋고, 이웃도 행복하게 하고 나도 행복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나를 구원합니다.
마음먹기 쉽지 않겠지만 이왕 하는 단식, 이런 단식을 목적으로 하는 단식을 하라고 권고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단식은 사랑이다.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단식’과 ‘신랑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하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곧 ‘단식의 참된 정신’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에서는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하고, <화답송>에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주소서.” 라고 노래합니다.
사실, ‘단식’은 <레위기>(16,29-3)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단식을 앞세우던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께 따졌고,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태 9,15)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당신이 ‘신랑’(묵시 19,6-9)임을 계시합니다.
사실,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계시하고 있고(이사 54,5-6;62,4-5;호세 2,16-20),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요한 3,29)이라 불렀으며, 예수님 스스로도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시면서 당신을 ‘신랑’(마태 22,2)으로 비유하셨으며,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과 교회 혹은 신자들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2고린 11,2;에페 5,23-32).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단식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밝혀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이는 ‘단식해야 할 이유’와 함께 당신의 수난 예고와 당신이 수난 받는 야훼의 종인 메시아임을 계시합니다.
곧 오늘날의 우리가 단식을 해야 할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수난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단식이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새로운 의미의 단식으로, 결국 단식은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곧 사랑으로 행하는 단식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9,14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으십니까?
주님!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 속 부자유의 멍에를 풀고
불의의 결박을 부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생명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단식은 사랑을 위해 자신을 ‘떠나는’ 방법
아지즈 ‘지즈’ 샤베르시안은 인터넷·SNS 시대에 가장 유명해진 ‘피트니스 인플루언서’ 중 하나로, 호주 출신의 러시아계 젊은 보디빌더였습니다. 자신을 “신이 빚은 몸”이라고 칭하며 SNS에 끊임없이 사진과 영상을 올려 수많은 추종자를 모았습니다.
“파티, 근육, 셀카”의 결합으로 2010년대 초중반 젊은 층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근육만 좋다면 삶의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식의 메시지를 퍼뜨리며 ‘지즈’를 하나의 밈이자 문화 아이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 불과 22살의 나이에 태국 여행 중 사우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사후 스테로이드 등 약물 사용이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고, 가족 역시 심장 관련 질환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무리한 몸집 키우기와 스테로이드가 청년을 얼마나 위험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표적 사례로 남았습니다.
운동은 단식과 매우 흡사합니다. 몸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지즈는 운동을 해서 자기 몸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고 사람들의 시선과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단식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찾아와 따지는 이들이었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단식의 목적이 당신이어야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단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빼앗기면 그분께 다가가기 위해 단식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합당하기 위해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행위입니다.
‘마크 월버그’는 1971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도체스터에서 태어났습니다. 빈곤과 범죄가 공존하던 이웃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일찍부터 폭력과 마약, 도둑질 등에 노출되었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그는 10대 후반 이미 여러 범죄를 저질러 법정에 서게 되었고, 실제로 교도소 생활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그 시절 그는 폭력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행동으로도 비판받았는데,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폭행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신앙에 눈뜨게 된 계기는, 교도소 생활 도중 자아를 성찰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이대로 가다가는 내 미래가 정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교도소 안에서 가톨릭 사제와 대화를 나누며 점차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마크는 출소 후 “지금이야말로 인생을 완전히 바꿔야 할 때”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지역 본당 신부님과 꾸준히 만나 상담하고 고해성사를 보며, 세례성사 때 했던 서약을 다시금 되새겼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신앙은 내게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는 닻(anchor)과 같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마크 월버그의 하루 루틴은 ‘절제와 규칙성, 그리고 신앙’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매우 이른 새벽(대개 오전 2~3시경)에 기상해 첫 번째로 기도 시간을 갖습니다. 운동으로 몸을 깨운 뒤, 가족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며, 이후 촬영 일정이 있을 경우 그 스케줄에 맞춰 움직입니다.
마크는 “나는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미사에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든, 하느님 앞에 서는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라고 직접 밝혔습니다.
가정에 대한 책임도 매우 중요시하여,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이를 위해서는 피트니스나 식단 관리도 철저히 계획합니다.
“기도와 운동,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나를 지켜준다.”라는 그의 말처럼, 마크는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가꾸는 데에 균형 있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마크 월버그가 “절제의 삶이 기쁨이 된다”고 자주 언급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방탕의 끝자락에 서 봤고 거기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누렸던 부와 명성은 결국 순간적인 즐거움에 불과했다. 마음속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 안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아아인맨의 로버트 나우니 주니어는 치즈버거의 맛을 느끼지 못해 마약을 끊었습니다. 마약을 끊는 일이 단식인데, 잃어버린 치즈버거의 맛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크 월버그에게 있어서 단식은 하느님과 가족을 만나기 위한 나의 노력이었습니다.
내가 단식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달라고 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단식의 본래 의미를 잃습니다. 단식은 내 육체의 욕망 때문에 만나고 있지 못한 누군가를 만나러 떠나는 여정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지난주에 가톨릭평화방송에서 녹화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평화방송이 서울 명동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통 체증으로 운전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지하철 타고 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덜 걸릴 것 같아서 직접 운전을 해서 방송국으로 갔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성당에서 방송국까지 1시간 20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까요.
1시간 넘게 촬영하고 이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켜니 1시간 40분을 예상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운전하는데, 안내하는 길이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저의 경험상 분명히 막히는 길인데, 그쪽으로만 안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2~3분 늘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촬영하고 난 뒤라서 너무 피곤했는데, 막히는 길로 안내하니 더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무시하고, 제가 아는 길로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알던 길이 더 막히는 길이었습니다. 분명히 더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2시간 30분 동안 운전해서야 집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방송에서 연예인이 말했던 이런 우스갯소리가 생각납니다.
“남자가 꼭 따라야 할 여자가 둘이 있다. 내비게이션과 아내 말은 잘 들어야 한다. 목적지까지 가야 하니까.”
자기 판단이 맞을 때도 있지만, 그 판단이 오히려 자기를 힘들게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판단을 내려놓고 들을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현재의 가톨릭 신자들은 일 년에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만 단식합니다. 그러나 당시 경건한 바리사이들은 한 주에 두 번 단식했었습니다. 단식은 불의한 사회 구조를 정화시키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며, 굶주린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목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단식이 남에게 보이려는 형식적인 행위, 자기 과시의 한 방편으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단식 행위가 옳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자기들 나름으로는 올바르다고 판단했겠지만, 주님이 제외된 단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면 단식할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수난에 동참하는 단식,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단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된 판단보다,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들이 내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모든 것을, 나는 해냈다
- 메이 웨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보게 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우리의 삶에서 빼앗겼는지를 깨닫는 사순의 단식입니다.
단식으로 숨겨진 우리 마음이 드러납니다. 가면을 벗고 판단을 멈추는 단식입니다. 우리자신을 만나는 진정한 단식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단식의 정신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신앙인의 참된 자세와 참된 정신이 요구되는 사순입니다.
우리 존재의 의미는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진정한 단식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치러야만 하는 고통을 피하지 않습니다.
단식은 사랑의 행동이며 사랑의 참된 실천입니다. 단식의 첫 시작은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내적침묵입니다.
먼저 단식해야 할 우리자신입니다. 몸과 마음의 유혹을 이겨내면서 우리는 성장합니다. 빼앗긴 신랑이 되돌아오는 신랑의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는 희망찬 사순의 단식입니다.
단식은 우리에게 일깨움을 줍니다. 좀더 건강하게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부터 먼저 바꿔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소중한 인격이며 소중한 단식의 아름다운 사랑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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