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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1/07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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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하느님, 외아드님께서 저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니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에서도 저희가 그분을 닮아 새로워지게 하소서.

2025년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월 7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1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요한 4,7-10)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오늘 복음
    (마르 6,34-44)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 오늘 말씀 카드
    (1요한 4,8)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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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1요한 4,7-10
오늘 제1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마르 6,34-44
오늘 복음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4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5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37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40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1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7일
권다혁 다미아노 신부

 

✚ 미사시작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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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 두 모습을 떠올립니다. 첫째는 시편 23(22)편이 노래하는 ‘목자와 양 떼’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쫓아온 큰 군중을 가엾이 보시고 제자들을 시켜 모두 푸른 풀밭에 백 명 또는 쉰 명씩 무리 지어 자리 잡게 하십니다.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풀을 뜯는 초원의 양 떼들과 매우 비슷합니다. 어디에 풀과 마실 물이 있는지 잘 아는 목자와 함께라면 메마른 광야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구약 성경의 오경이 묘사하는 광야를 행진하여 가는 열두 지파 진영의 모습입니다. 낮 동안 그들을 안내하던 구름이 내려와 멈추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질서 정연하게 무리 지어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모세는 많은 것이 부족한 광야에서 백성들의 고충을 하느님께 가져가 아뢰고, 하느님께서는 이에 응답하시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백성의 가엾음을 외면하시지 않고 빵의 기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제자들의 가난한 봉헌물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의 기도를 바치신 다음 당신 양 떼들을 배부르게 하셨지요. 아버지 하느님의 도우심과 제자들의 가난한 봉헌이 함께한 선물과도 같은 아름다운 기적입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6,43). 신명기 28장 5절의 축복 말씀이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반죽 통의 축복이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서 이루어졌다면, 광주리의 축복은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오늘 서간은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라고 하는데 그 사랑 곧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 사랑은? 우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는 사랑입니다. 외아드님을 육화하게 하시어 우리와 같아지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고통과 불행 중에 있는데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식이 군대나 외국에 나가 온갖 고생고생하는데 모르는 체할 수 없어 뭐라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는 온갖 고생하는 사람들을 가엾어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사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많은 인간이 남의 고통과 불행을 보지 못합니다. 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거나 욕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가엾어하시고 이어서 행동을 취하십니다. 

첫째는 가르쳐주시고 둘째는 빵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빵을 주시기 전에 많은 가르침을 먼저 주시는 것인데 배부르게 하시기 전에 사는 길을 먼저 가르치는 것입니다.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요? 아무튼 일용할 양식으로 영적 육적인 양식을 모두 주시는데, 미사로 치면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행하심과 같습니다. 

두 번째로 그분의 사랑은 당신 아드님의 수난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나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고통에 나 몰라라 하지 않고 가르침과 빵을 주시는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서 우리의 고통과 불행에 동참하시는 것을 넘어 우리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심으로 우릴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흔히 당신 상처로 우리 상처를 낫게 하셨다고 하는 그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인데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우선 그 사랑으로 충만하고 배부르고 치유 받아야겠지요. 그 사랑을 받고도 아직도 배고프고 불만투성이고 아프다면 안 되겠지요. 내가 지금 배고프고 불만이고 아프다면 아직 그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겠지요.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서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받고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하려고 한다면 그 알량한 내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고 충만한 하느님 사랑을 받아 사랑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는 오늘도 주님 공현의 연장선상에서, 참 빛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빛을 가장 가까이서 가슴에 기대어 체험했던 사도 요한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 빛의 본질을 꿰찔러 선포해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그렇습니다.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참 빛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영성체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당신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으로 보내셨네.”(에페 2,4;로마 8,3 참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늦은 시간이 되자,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 6,36)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까닭입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당신의 배고픔으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먼저 굶주리는 이들의 먹을 것을 챙겨주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허기진 모세와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말입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당신 몸을 양식으로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토록 당신 자리를 떠나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마르 6,41)

그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당신의 사랑을 공현으로 보여주시고 드러내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실행하도록 맡겨졌습니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그 지고한 사랑에 참여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시며, 이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안으로 몸소 들어오십니다. 그토록 차고 넘쳐나는 사랑을 우리도 ‘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6,37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주님!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늘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신부님, 수녀님이 되면 저절로 믿게 될까?

하느님이 계심이 의심이 들어 고민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부님이나 수녀님들 중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이라도 믿음으로 내어놓을 때, 그것을 넘치도록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통해 수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정배연 수녀님의 이야기 또한 이러한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머니를 돌볼 수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할 수도 없었지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제는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능력 이상으로 내어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는 이들이기에 이러한 체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수원 성빈센트드뽈자비의 수녀회 정배연 루피나 수녀님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났는지 들려줍니다. 수녀님은 청년 때 청년빈첸시오회를 통해 수도성소를 받아들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차차 자기 힘으로 이웃에게 무언가 해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수도자의 길을 가고 있을 때 어머니가 편찮아지셨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낡고 비좁은 시골집에서 혼자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수녀님 말고 다른 형제들은 다 외국에 살았고, 어머니는 끝까지 그 집을 고집하셨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의 응답은 “네 몫이다.”였습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주님, 당신은 아시잖아요. 수녀인 제가 어떻게 어머니를 모실 수 있습니까?”

수녀님은 어머니도 돌봐드릴 수 없으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제 몫이라면 응답해 주세요. 수도원을 떠나겠습니다.”

머지않아 주님께서는 “내가 하겠다.”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수녀님은 “네 몫이다. 내가 하겠다.”라는 뜻을 깨달았습니다. 

‘내 몫의 일을 주님께서 해 주신다는 뜻이었구나!’

그러고 나서 수녀님의 시선이 확 바뀌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를 찾아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수녀님이 못 가실 때는 꼼꼼한 주간 보호사가 어머니를 돌봐드렸고, 수녀님도 평화 속에서 어머니에게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부담이 없어진 어머니에게 봉사하니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증가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지만, 이래저래 주님의 섭리가 느껴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도움이 주위에서 쏟아졌습니다.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 수녀님의 일을 예수님이 해 주고 계신 것을 장례 기간 내내 느꼈고 힘들지 않으니 형제들에게 섭섭했던 것들도 저절로 다 풀렸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을 오천 명이나 되는 이들에게 먹이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것 이상은 당신께서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능력 이상을 원하실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순명으로 실천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여분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그 사람에게 드러내십니다. 

열왕기에서 엘리야 예언자는 과부에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과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하느님을 믿었고, 그 결과 그녀와 아들은 기근 동안에도 끊임없이 풍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시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 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1열왕 17,14).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모든 것을 내어드릴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넘어서 채우신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에게도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작아 보일지라도, 하느님께 드리면 그것이 얼마나 큰 기적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우리의 시간, 에너지, 혹은 작은 사랑의 실천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저도 한 사람도 만족시킬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니 매일 수천 명의 신자가 저의 유튜브 강론과 글을 읽으십니다. 이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매일매일 주님의 현존과 도우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과 신뢰는 마더 데레사 성녀의 삶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는 종종 “하느님께서는 제가 성공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충실하기를 원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빈곤과 고통의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자신이 가진 작은 것으로 수많은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녀의 작은 희생과 노력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크게 증폭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만나며 살고 싶거든 우리 능력 이상으로 주라고 하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내 능력만큼만 하려고 하면 만나지 못합니다. 불가능에 도전합시다. 그러면 반드시 그분의 능력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나와 같은 생각,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반대될 때 안색이 바뀌곤 합니다. 자기 생각과 같을 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 다름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친한 친구에게 자기와 다른 이웃의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어쩌면 저럴 수가 있냐?’면서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을 분명히 하겠다는 생각에서인지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모습으로 더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한 친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음~~ 그럴 수 있지.”
 
자기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럴 수 있다면서 자기 생각을 받아 들어주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뒤 자기도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을 만나도 “음~~ 그럴 수 있지.”라면서 그 생각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하기 위해 많은 생각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느꼈다고 합니다. 그 다름에 화가 나면 마음속으로 ‘3... 2... 1...’을 외친 다음,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면 대부분 해결되더라는 것입니다.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즉, ‘3... 2... 1...’을 말하는 잠깐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해서 부정적 마음에 갇혀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3... 2... 1...’ 그럴 수 있습니다.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부분을 오늘 복음에서 묵상해 봅니다.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늦은 시간까지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계산하고, 대책을 강구합니다. 그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자면 빵 이백 데나리온어치가 필요하니,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는 결론까지 내리게 되지요.
 
이렇게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제자들, 정반대로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예수님 곁에만 머무르려는 군중들. 누가 문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누가 틀렸다고도 또 맞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군중도, 자기 일을 도와주려는 제자들의 계산적인 생각도 그럴 수 있었기에 아무런 꾸중도, 칭찬도 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그 어떤 판단 없이 이상의 것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 복음에서는 빵의 기적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우리 삶 안에서도 계속해서 사랑의 모습으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 모범을 따라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 주님께서도 함께하십니다.

 

오늘의 명언

늘 명심하라. 해내고 말겠다는 너의 결심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단 사실을

- 에이브러햄 링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삶이 이어지는 곳에 빵이 있습니다. 빵이 생명입니다. 빵의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빵이 우리들의 삶에 들어오십니다. 빵이 되는 빵의 삶은 세상을 더 아름답고 배부르게 할 빵의 정신이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빵은 우리 모두에게 빵이 되는 사랑의 참된 삶입니다. 빵의 길을 따르는 삶이 지혜의 삶입니다. 살아있는 생명들은 베풀고 받아들이는 생의 풍요로움 속에서 진정한 감사를 배웁니다.

함께 나누지 않으면 모두 배부를 수 없습니다. 애틋함의 십자가가 빵의 나눔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나눔이 아니더라도 소박한 일상의 나눔은 우리 모두를 더 행복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빵이며 나눔입니다. 서로의 삶에 빵이 되지 않으면 사랑도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모두를 배부르게 하는 복음은 우리들에게 빵의 삶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먼저 위로의 빵이 되는 기쁜 날 되십시오. 빵이 되는 거룩한 실천의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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