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셨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외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새로운 빛을 비추시고 동정녀 몸에서 저희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셨으니 저희도 그 은총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2025년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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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요한 3,7-10)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35-42)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38-39)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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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한 3,7-10
오늘 제1독서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7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
요한 1,35-42
오늘 복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4일
김형균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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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놓쳐 버린 예수님을 다시 되찾기
요한 복음서는 “무엇을 찾느냐?”(1,38)라는 물음으로 시작해서 “누구를 찾느냐?”(20,15)라는 물음으로 마무리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뒤따라오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던지신 물음은 “무엇을 찾느냐?”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던지신 물음이 바로 “누구를 찾느냐?”라는 것이었지요. 결국 신앙의 여정은 ‘무엇’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여 인격적인 사랑의 동반자인 ‘누구’를 만나서 그 사랑을 키워 가는 것이라는 말이겠습니다.
묵주 기도를 바치며 환희의 신비 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대개 이 신비를 묵상하노라면 아들을 잃고 애태웠을 부모의 심경과, 마침내 아드님을 찾아내시고는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하시는 성모님의 원망 섞인 말씀, 그리고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하시는 아들 예수님의 조금은 배짱 좋은 대답만 떠오르지요.
그리고 순명하시는 예수님과,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에 마음이 많이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초점을 비껴간 묵상이라는 것을 어느 때부터인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환희의 신비 5단입니다. ‘환희’란 터져 나오는 기쁨입니다. 자신들의 아들이면서도 하느님이신 그분을 잃었다가 가까스로 되찾은 부모의 감격과 탄성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요?
우리 마음의 그물이 촘촘하지 못한 탓인지 우리는 삶에서 예수님을 쉽게 놓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놓쳐 버린 예수님을 다시, 거듭거듭, 새롭게 되찾고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제대로 믿기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오늘 요한의 서간은 속지 말라고 합니다. 속는다고 함은 무엇이 사실이 아닌데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는다는 것이 실은 믿는 것입니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는 것이고 믿기 때문에 속는 것이고, 그렇기에 속는다는 것은 무조건 좋지 않거나 나쁜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이 낫겠습니다. 속지 말자는 것은 탁 느끼기에도 수세적이고 부정적이지요. 아무에게도 속지 않기 위해서 모두를 의심하게 되겠지요. 좋은 것인데도 나쁜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도 되고요. 그래서 좀처럼 그리고 점차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요.
의심이 심해져 불신까지 하게 되면 문제는 의처증이 중증이 되듯이 더 중증이 되고요. 그러므로 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음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속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제대로 믿는 것? 첫째는 믿을 분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속지 말라는 것은, 아무나 믿지 말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불신을 조장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제 말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라는 것이요, 사람은 아무도 하느님처럼 믿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사람으로만 믿어야 합니다. 그 정도의 사람을 그 이상의 사람으로 믿었다가는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기에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또 하느님을 믿더라도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웃기는 얘기할 때 많이 하던 얘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목욕탕에 갔는데 아버지가 먼저 탕 안으로 들어가 ‘아, 시원하다.’했고, 그래서 아들이 들어갔다가 너무 뜨겁자 ‘믿을 놈 하나도 없네’라고 했다지요.
주님께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당신에게 오라고, 당신에게 오면 안식을 주겠다고 또 짐을 가볍게 해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짐을 안 지게 해주시고 고생이 없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믿었다가는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한 자식처럼 주님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속이는 사람들 때문에 넌덜머리가 나 주님께 왔는데 주님께도 속았다 할 것입니다. 사실 많은 신자가 하느님을 믿으면 고통을 없애주실 거라고 믿음 때문에 믿기 시작하는데 주님은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지요.
주님은 짐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고, 주님의 길은 꽃길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짐을 지지 않게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짐을 잘 지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꽃길 걷게 해주겠다고 귀를 간질이는 인간에게는 속지 말고, 반대로 자기 십자가를 매고 당신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하시는 주님을 오히려 믿고 따라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에 대한 두 개의 증언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 개의 증언’입니다. 이는 마치 소개장처럼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하나는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며 증언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또 하나는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아가 형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며 중언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그리고 이에 대한 응답은 우리에게 ‘제자 됨의 길’을 깨우쳐줍니다.
그것은 ‘행위’를 나타내는 ‘일곱 개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의 두 가지 행위요, 만나서 함께 있는 중의 세 가지 행위요, 그리고 만난 후 그 결과로 발생하는 두 가지 행위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에는 증언을 “듣는” 행위와 들은 그분을 “뒤따르는” 행위요, 예수님과의 만남에서는 말씀을 주고받으며 “함께 가는” 행위와 그분이 묵으시는 곳을 “보는” 행위와 본 그곳에서 “함께 머무는(묵는)” 행위요, 그리고 만남 이후에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하는(말하는)” 행위와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행위로 표현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증언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그 것에 동의하고 받아들인다는 수동적인 측면을 넘어서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순명’의 자세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뒤따라간다.”는 것, 역시 단지 추종한다는 것을 넘어서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당신을 찾아 나서면,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시어”,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무엇을 원하느냐?”하시며, ‘진정 찾아야 할 것’을 찾게 해주고,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도록 일깨워주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아니,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참된 것’, 곧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는 묵는 곳을 “와서 보라”는 초대는 원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과 ‘보장’입니다. 또한 “함께 가” 주시며, 동행하여 당신께서 묵는 곳으로 ‘인도’하고 이끌어주십니다. 손수 동반자가 되어 주시고, 반려자가 되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묵으시는 곳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며, “함께 묵으십니다.” 사랑을 속삭여 주시며 흠뻑 적셔주십니다. 이렇게 사랑을 먹은 이들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하고 “증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갑니다.”
이처럼, 이 ‘일곱 가지의 행위’가 바로 오늘 우리가 제자로서 걷는 길이요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나에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데려가는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아버지께 가는 구원의 동반자요, 반려자가 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은 주님께서 우리의 동반자요 반려자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서로에게 구원의 동반자요 반려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함께 아버지께 가는, 이토록 아름다운 구원의 동반자들이요, 반려자들인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39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주님!
말씀을 듣고
단지 동의하지만 말고
받아들여 따르게 하소서.
따르지만 말고
전적인 헌신으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오늘도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일깨워주시고
저를 향해 계시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시어
당신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누군가와의 만남이 천국이나 지옥이 되는 이유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겸손히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라고 응답하신 장면을 묵상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때 준비된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깊은 교훈을 줍니다. 이를 통해 모든 관계가 계약에 기반하며, 그 계약을 지키지 못하면 양심상 그 만남이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는 마치 자녀가 부모의 뜻을 잘 따를 때, 부모를 만날 용기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자녀가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부모를 만나는 것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느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떠나는 이야기를 떠올려 봅시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아 그분께 나아갈 용기를 잃는 것과 비슷합니다. 성경에서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는 장면이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야곱은 에사우를 속이고 장자의 권리를 빼앗은 후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고된 삶을 살며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에사우의 은총을 빼앗은 것에 대한 부채를 갚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하며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후 야곱은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을 에사우에게 돌려주기 위해 수많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야뽁 강가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 씨름하며 축복을 구했습니다(창세 32,24-31).
야곱은 이러한 겸손한 태도로 자신을 낮추고 에사우에게 나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에사우는 야곱을 용서하며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여기서 에사우는 그리스도의 상징이고, 야곱은 우리 자신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의 은총을 자신의 힘으로 얻으려 하지만, 결국 겸손하게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자비를 구해야만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에사우가 야곱에게 준 용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막상 그분을 만나는 상황이 되면 ‘양심’상 우리는 그분을 만나는 게 지옥처럼 느껴지기에 진짜 지옥을 향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역시 성사와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 거룩한 계약입니다. 그러나 이 계약을 지키지 못하면, 양심은 평화를 잃고 만남은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은 양심의 무게로 인해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 없다.”
야곱과 에사우의 만남은 단순히 형제간의 화해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양심을 깨끗이 하고 평화를 되찾는 여정을 상징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모든 것을 에사우 덕분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낮췄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모든 은총을 감사히 여기고, 겸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매년 1월 1일에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들을 모시고 미사를 드리며 떡국을 대접합니다. 하지만 매년 그날이 다가오면 부담을 느낍니다. 주교님은 저에게 유학의 기회를 주셨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저를 보호해 주신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그 은혜에 충분히 보답하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그러한 마음이 오히려 불안과 긴장을 낳아 실수하게 만듭니다.
올해가 지난해보다 조금 덜 부담스러웠던 이유는 본당에서 1년 동안 좋은 성과를 내고 그 결과를 주교님께 보여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깨닫습니다. 주교님을 맞이할 준비는 그날 하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요. 이는 하느님을 만나는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언젠가 나아가야 할 빚진 자들입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그 빚을 갚아나가려고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날을 맞이한다면,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돌이키게 할 것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그분의 빛 앞에서 어둠이 된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며 매일 충실히 살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오늘부터 하느님의 은혜를 갚아나가는 삶을 시작합시다. 이는 하느님을 만나는 날, 그 만남이 지옥이 아니라 기쁨이 되게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작년 8월, 동창 신부들과 은경축을 맞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사제 생활 25년을 피정하는 마음으로 함께하자고 해서 결코 빠질 수 없었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성지순례 기간 중의 본당 미사를 다른 신부들에게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월요일 새벽(새벽 출발 비행기였습니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출국 수속 중인데 본당 수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미사에 오시기로 했던 신부님께서 새벽 미사에 아직 도착하시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얼른 그 신부에게 전화하니, 죄송하다면서 곧 도착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날 오후에 부고를 받았습니다. 새벽 미사에 늦은 신부의 아버지께서 선종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벽,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미사 때문에 그 곁을 떠나 성당에 온 것이었습니다. 약간 늦었지만 말이지요. 그 신부에게 미안하기도(미사 부탁해서), 또 동시에 감사했습니다.
사제에게 미사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때로는 급한 일, 불가피한 일이 생겨도 미사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자리이고 힘든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 안에서 위로와 힘을 받지만, 세상 기준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요즘 사제 부족으로 참 어렵습니다. 신학교 지원자도 줄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중간에 그만두는 학생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교구장 주교님께서 “지금 보좌신부가 부족한 것을 넘어서, 이제 나이 70을 넘어도 2~3개 본당을 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제가 없으면 주님의 큰 은총을 얻는 미사도 없지요. 세상 끝까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면 당연히 사제가 필요합니다.
사제 부족은 우리의 신앙심과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자기를 기다리는 목자가 있으니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과로로 돌아가셨습니다. 신자들이 열심히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때, 열심한 사제도 늘어나고 사제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많아질 것입니다.
이 모든 부족을 하느님께 채워달라고만 기도해야 할까요? 물론 하느님의 힘으로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제자들의 물음에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모든 것을 알려주고, 해결해 주시면 우리로서는 너무나 편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먼저 직접 마음을 먹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면서, 모든 것을 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특별히 시급한 사제 부족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심에 대해 다시금 묵상할 수 있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견소왈명(見小曰明) 작은 것의 의미를 볼 줄 알면 밝아진다
- 노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와서 보아라.
우리의 삶이란 체험의 장이며 은총이 가득 펼쳐지는 거룩한 자리가 됩니다. 우리가 어떤 체험들을 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 우리를 "와서 보아라." 말씀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좋은 초대 좋은 체험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체험이 우리의 삶을 이끄는 중심입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먼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구원의 원천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의 생활입니다.
차오르는 기쁨을 주님 안에서 찾고 만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만이 있을 뿐입니다. 초대는 만남이 되고 만남은 우리의 확신이 됩니다. 주님을 믿는 확신은 새로운 생활이 됩니다. 새로운 기쁨 새로운 생활로 주님을 다시 만나는 새로운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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