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찬 때 주님 품에 기대어 있던 요한, 천상 비밀을 계시받은 복된 사도, 생명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파하였네.
하느님, 복된 요한 사도를 통하여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계시하셨으니 저희에게 슬기를 주시어 생명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2024년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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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요한 1,1-4)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0,2-8)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20,5)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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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한 1,1-4
오늘 제1독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4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영광에 빛나는 사도들의 모임이 주님을 기리나이다.
요한 20,2-8
오늘 복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2월 27일
유재선 안드레아 신부
✚ 성 요한 사도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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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예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요한 13,23).
요한 사도는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의 품에 기댈 수 있을 만큼 깊은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빈 무덤을 향하여 베드로와 함께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랐지만 베드로가 올 때까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요한 사도였다면, 저는 곧바로 무덤에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 저를 그토록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없어지신 것을 가장 먼저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요한 사도는 왜 베드로를 기다렸을까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 뜻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기다렸고, 그가 빈 무덤을 확인한 첫 번째 사람이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랑을 사도들 안에서 권력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일,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려는 그분의 뜻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하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려고 하시지 않았을까?’라고 주님을 원망하거나 시기와 질투로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요한 사도가 보여 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도 배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할 줄 아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요한 20,5).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더 많이 사랑하여 더 사랑받는
어제 스테파노 축일에 이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도 주님을 바라봄 곧 관상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어제 스테파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성탄으로 주님께서 나타나심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성탄 축일 다음에 두 성인의 축일을 이어 지내고 있고 주님을 바라봄, 관상과 관련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상은 두 성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시력의 문제가 아니고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신학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관상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한은 진정 사랑꾼이고 관상가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자신에 대해 아무 주저함 없이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은 사랑하지 않고, 요한만 사랑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실 때나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나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실 때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요한만 데리고 가신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사랑을 요한이 사랑했다는 뜻일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 자기가 더 사랑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적절한 예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미 새가 먹이를 가지고 올 때 입을 더 크게 벌린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요. 그래서 새들은 어미가 왔을 때 더 크게 입을 벌리고 더 크게 소리를 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무시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마다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에 투정을 부리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조금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스펀지 빨아들이듯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 사랑에 달리 대응하기에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사랑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다 받아들이기에 결과적으로 흠뻑 사랑받고, 더 받아들이기에 안 받아들인 사람에 비해 더 많이 받은 셈이 되지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모두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는, 요한만 성모님과 여인들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더 사랑했다는 표시가 아닐까요? 주님 사랑을 더 사랑했기에 더 주님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많이 사랑하여 주님을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우리는 성탄 8부 안에서, 요한 사도의 축일을 맞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구약성경의 ‘새로운 벤야민’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곧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벤야민은 주님의 “사랑은 받는 이”(신명 33,12)였듯이,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요한 13,23;19,26;21,7;21,20)라 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이 도착하였지만, 먼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젊은 요한이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도착한다.’는 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기만 하지만, 요한은 들어가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빈 무덤’과 ‘구유’는 예수님께서 몸을 눕혔던 ‘같은 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마침’, 곧 오실 때와 가실 때에 머무른 땅의 자리입니다. 그분은 ‘구유’로 우리의 출생을 성화시키시고, ‘빈 무덤’으로 우리의 죽음을 성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탄생이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도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은 돌을 통과해서 지나가신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주간 첫날 아침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무덤은 봉인된 상태였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마태 28,2)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고 통과하셨습니다. 곧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가 구세주 ‘탄생의 표시’가 되듯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아마포 수의’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부활의 표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포’는 놓여있었고, ‘수건’은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수동태는 ‘하느님의 개입’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구세주의 ‘강생의 표시’와 ‘부활의 표시’를 동시에 봅니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덤’으로 ‘들어가고’,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세를 낮추어 더러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무덤의 돌문’을 열 듯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울고 있고 지친 이들이 있는 곳, 춥고 베고픈 이들이 있는 곳, ‘세상 속의 마구간’과 자신의 악취에 찌든 ‘우리 자신의 마음 속 마구간’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을 가져다 준 ‘구유’의 아기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빈 무덤’을 동시에 봅니다. 우리 안에 더없는 사랑으로 들어오시는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봅니다.
하오니, 주님!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듯, 목동들이 구유로 달려가듯,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리게 하소서! 무덤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비워져 나오게 하소서! 비어진 맑은 눈으로 보게 하시고, 본 바를 믿게 하소서. 아멘. .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20,8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생명과
사랑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은 자기가 믿는 하느님처럼 이웃을 만난다.
어제 외국에 있는 큰형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형은 오랜 냉담 끝에 성당에 다시 나가기로 했는데 고해 때 그 사제가 또 냉담할 걸 뭐 하러 고해하러 왔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에게 하는 행동도 마치 깡패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더 죄짓지 않기 위해 다시 냉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본당신부가 바뀌어서 귀국하면 다시 나가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자비이시고 사랑인데, 왜 어떤 신앙인들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까요? 한 마디로 실제로는 하느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도 성 요한의 축일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친밀하게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주님, 주님 한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누구든 내가 창조자를 만나는 방식으로 이웃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영향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은 내가 영향을 받아 성장할 때와 같습니다. 사람은 본 것만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두 발로 걷는 존재를 하나도 보지 못한 아기는 절대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승들에게 키워진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것들을 흉내 내지 두 발로 걷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자신이 사랑이 없는 부모에게 길러졌고,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힘들었다고 해서 자녀를 키울 때 그것과 다르게 키울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그래서 엄한 부모에게 자란 자녀는 엄한 부모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불안한 감정과 억압된 감정을 가지면서도 지금처럼 자랐기에 다른 사람들도 성장하기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영향을 받을 때 느꼈던 감정을 타인에게도 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자 한다면 선한 창조자를 만나야 합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퀘이커교가 있습니다. 이단입니다. 세례도 없고 성체성사도 없고 성직자도 없습니다. 그런 종교적 형식 없이도 자기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체험한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존 울먼(John Woolman)과 루크레샤 모트(Lucretia Mott)와 같은 인물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주요 인물들이었습니다. 자신 안에서 만난 하느님은 자유였기 때문입니다. 또 미국친우봉사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와 같은 여러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단체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들이 만난 하느님은 평화였습니다.
엘리자베스 프라이(Elizabeth Fry)는 교도소 개혁을 한 여성입니다. 영국 지폐에까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1800년대 여성이 인권운동을 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못했습니다. 초기의 엘리자베스는 사교 모임을 좋아하고 외적인 삶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으며, 자신이 가진 부와 특권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눌지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퀘이커 설교자인 윌리엄 세이버리를 만난 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798년, 세이버리의 설교를 들은 엘리자베스는 깊은 영적 각성을 경험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만남 이후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계시며, 그분은 그분의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진실하게 그분을 찾으면 그분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체험은 엘리자베스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1813년, 엘리자베스는 처음으로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본 장면은 그녀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감옥은 과밀하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여성과 아이들은 비참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사회는 그들을 완전히 잊은 듯했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동정을 넘어, 이들이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달았고, 그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녀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설립하고, 기본적인 위생과 의류를 제공하며, 여성 죄수들에게 재봉과 뜨개질 같은 기술을 가르쳐 출소 후 삶을 준비하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죄수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영적 지침을 제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의회 앞에서 감옥 개혁을 주장하며, 영국 전역의 감옥 환경 개선을 목표로 한 1823년 감옥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으로서 매우 대담하고 특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단도 진짜 하느님을 만나면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자유롭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사랑을 해 줍니다. 만약 정상 종교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들보다 못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다면 개인적 체험이 중요하고 세례와 성체성사, 고해성사 등은 다 필요 없다는 말일까요? 그들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의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하느님을 만나기 더 쉽습니다. 씨앗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열매를 찾기는 쉽습니다.
장 발장은 자신에게 촛대까지 내어주는 주교의 사랑에 감동하여 억울한 도둑에서 선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쫓던 경관은 여전히 도둑은 착해질 수 없다고 믿었고 장 발장에게서 도움을 받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합니다.
종교는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구원을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가장 하느님을 만나기 좋은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지닌 가톨릭 신자라도 예식에 치중하여 진심으로 가슴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타인에게 안 좋은 영향만 끼치고 맙니다. 반면 하느님을 사랑으로 만난 사람은 오늘 요한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사제 모임이 있을 때, 책 한 권을 들고 갔습니다. 제 옆에 앉은 신부님은 제가 들고 간 책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책 이해가 돼? 나는 도대체 무슨 말 하는 줄 모르겠더라.”
이 신부님은 저보다 훨씬 똑똑하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이 책을 읽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렵기는 했지만 다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더 똑똑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제가 더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두 이해한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공부를 왜 할까요? 모든 것을 알고 또 이해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있고 또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에 계속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앎을 갖게 되었다면서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종 주님을 도대체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주님 믿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요? 모르기 때문에 알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노력을 통해 조금씩의 ‘앎’이 자기에게 다가옵니다. 그 앎으로 기쁨과 함께 주님과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중요한 사건에 늘 요한 사도가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에 놀라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인 요한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빈 무덤을 보고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다른 곳에 옮겼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직접 평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새겨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앎을 키워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우리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온전히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알기 위해 노력하면서 조금씩 알게 됩니다. 이 앎을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주님과 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노력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 노력을 하였습니다.
- 스티븐 코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지치지 않는 요한 사도의 열정을 만납니다. 아름다운 열정은 향기롭습니다. 열정을 비추는 성탄의 빛이 있습니다. 성탄의 빛은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줍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우리들에게 사랑을 가르쳐 줍니다. 사랑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결핍을 채우는 복음의 빛이 있습니다. 관계의 벽을 무너뜨리는 빛입니다.
성 요한 사도는 빛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빛이 걸어간 발자국이 바로 복음의 발자국입니다. 복음의 맥박이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가 됩니다.
성 요한 사도의 복음을 묵상하며 진짜 하느님 나라는 기꺼이 하느님께로 뛰어가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드러내어도 부끄럽지 않은 사랑의 복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진실로 믿는 사랑의 나날들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사랑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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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5 (수) 성탄절 낮미사 생중계 (0) | 202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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