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2024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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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페 3,14-21)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2,49-53)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오늘 말씀 카드
(필리 3,8-9)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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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 3,14-21
오늘 제1독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형제 여러분,
14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20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21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
루카 12,49-53
오늘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0월 24일
신주환 안셀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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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하느님의 충만함을 구하는 삶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여러 가지를 청합니다. 여기서 청하는 것들은 사람들이 흔히 기도하며 청하는 것들과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평화로운 삶이나 건강, 가정의 화목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기를,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사시기를,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러한 것을 하느님께 청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기초로 하여서 살기를 바라고 그것을 하느님께 청합니까? 그렇게 하는 삶은 어떠하리라고 생각합니까?
그 삶은 마냥 평온할 수만은 없을 것이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미친 사람으로 여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서 마귀가 들렸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에페 3,19) 것이라면, 그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이 여느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의 삶은 뒤집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나는 성인이 아니라고, 나는 하느님이 아니라고 말하며 사랑의 요구 앞에서 물러납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3,19) 청합니다. 그런 삶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에페소서를 읽으면서, 이러한 청원을 하느님께 드린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땅만 쳐다보고 땅에 달라붙어서 그저 삶의 사소한 것들을 청하는 것을 넘어,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하여 드높은 은총의 삶을 청하여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3,20)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뿌리내리기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저는 요즘 ‘바비’의 삶을 삽니다. ‘바라고 비는’ 삶을 사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분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까지 한다는 말입니다.
제 생각에 바라기만 하는 사람은 욕심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사람은 욕심 때문에 바라기만 하지 않고 빌기까지 합니다. 아시다시피 바라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욕심 때문에 바라는 것이 있고 진정 좋은 사람 되기를 바라는, 사랑 때문에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바람에도 급이 있습니다. 급이 낮은 사랑과 바람은 세속적으로 잘 되기를, 예를 들어서 세속적으로 승승장구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바오로는 영적으로 차원 높게 사랑합니다. 그래서 바라는 것도 세속적인 것이 하나도 없고 영적입니다. 그는 첫째로 에페소인들의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기를 바라는데 자기들의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굳세어지게 해달라고 빕니다.
둘째로 그는 에페소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모셔 들여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되기를 바라고 빕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우리 신앙인에게 실질적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도 사랑하고픈 사람입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죽지 않고 싱싱하고, 그렇지 못한 나무는 메말라 가고 마침내 죽어버리듯이 우리의 사랑이 점차 메말라 가고 마침내 죽어버리게 되는 것은 우리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 없는 우리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조금밖에 충전되지 않은 건전지의 사랑과 비슷합니다. 조금 쓰고 나면 금세 바닥이 나버리는 건전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래서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이 그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라고 빕니다. 관건은 어떻게 그 사랑을 알게 되느냐,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게 되느냐입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알게 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사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 사랑할 것이고, 사랑하다가 실패도 할 것이고, 실패하기에 또 기도할 것이고, 그러면서 점차 그리스도의 사랑에 조금씩 뿌리가 내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뿌리 내리기는 전 생애적인 것이고, 기도도 사랑도 중단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세상에 “불”을 지르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파괴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을 지르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죄를 불살라 태워버리는 십자가의 세례를 통해 이루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이 ‘불’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으로 빛을 짓누르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어둠이 들통 나는 것을 막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의와 거짓은 물러가기보다 오히려 불을 꺼버리려 온갖 술수를 부리기 일수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의 세례’로 지상에서의 전도활동을 완성하시고, 성령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할 이 ‘성령의 불’과 ‘피의 세례’는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거짓된 자신과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거짓을 맞서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그런데 친히 ‘평화’를 주신 분(루카 24,36)이 어찌하여 분열을 일으키실까? 그것은 세상이 거짓 평화에 물들어 있고, 그 속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 분열’은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이요, 어둠으로부터 오는 분열이 아니라 빛으로부터 오는 분열입니다.
그렇습니다.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서 빛과 어둠을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그렇습니다. 분열이 없는 것이 평화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신 당신께서는 오늘도 “말씀의 쌍날칼”을 주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칼’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세례’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분열시킵니다. 다름 아닌,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참 평화로 이끄는 이 불꽃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2,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주님!
당신은 제게 사랑의 불을 지르십니다.
제 속의 어둠을 태워
새로운 살이 돋게 하시고
이기심을 태우고 자비가 돋게 하소서.
무관심을 태우고 사랑이 돋게 하시고
사랑의 분열을 일으키소서.
제 살을 가르고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소서.
제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당신 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령의 불이 붙은 리더: 내외적으로 적을 만든다.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해야 할 일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목적은 오로지 보수에만 있기에 일에서 흥미를 찾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고위직에 앉으면 그 회사나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로마 황제 네로(서기 37~68년)를 꼽고 싶습니다. 바티칸 박물관에 가서 보면 그의 목욕 욕조가 엄청나게 큰 붉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보다는 사치와 시, 연기 등에 더 관심을 가졌고 로마의 대화재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랬다고 뒤집어씌워 박해와 같은 수단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무에 대한 충실성이 부족하고 제국의 통치를 소홀히 하여 광범위한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황제를 목숨 걸고 수호해야 하는 근위대까지도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원로원도 네로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자신의 체포와 잔혹한 처형이 불가피하다는 소문을 들은 네로는 처형이라는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기로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대단한 예술가를 잃고 있는가!”
무능한 리더는 내부에서만 적을 만듭니다.
그다음은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도 리더의 자격이 없습니다.
코닥 필름을 이끌었던 CEO 케이 위트모어(Kay Whitmore, 1990~1993)가 그러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재임 동안 수익성을 유지하고 사진 필름 시장에서 지배력을 유지했습니다. 회사는 표면적으로 여전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고, 그는 특별히 무능하다고 인식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코닥의 리더십은 디지털 혁명을 충분히 일찍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수익성이 높은 필름 사업에 너무 집중하여 디지털 사진에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위트모어는 업계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는지 예측할 수 있는 비전과 사진의 미래를 향해 회사를 전환하려는 결단력이 부족했습니다.
코닥의 디지털 기술 전환 지연으로 인해 경쟁업체가 디지털카메라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고 결국 코닥은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코닥이 마침내 따라잡으려고 시도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고 회사는 2012년에 파산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지금 삼성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열심히는 일하지만, 그래서 겉으로 수익이 나서 나무라는 사람이 없지만, 이런 사람도 결국 한 나라나 회사, 가정을 말아먹게 됩니다.
할 일만 하는 리더는 내외부에서 다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사명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리더로 적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이브러햄 링컨’의 사례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직 내내 극심한 반대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도덕적 신념, 비전, 결단력 측면에서 그에게 기대했던 것 이상을 보여준 탁월한 지도자의 모델입니다. 그는 노예해방까지 주장하며 남북이 전쟁하게도 했습니다. 사실 노예제도 해방 문제로 전쟁을 해야 할 때 적들에게만 반대를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내부에서도 반대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기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신문에 희화화되었고, 정치적 경쟁자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심지어 자신이 속한 당의 일부 구성원들로부터 멸시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가를 위한 장기적인 비전에 계속 집중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조국을 보존하고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을 실천한 지도자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링컨이 오늘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감히 행했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인 우려를 뛰어넘고, 반대를 견디며, 더 큰 이익을 위해 용감한 결정을 내리는 그의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든 리더에게 강력한 모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도 불이 붙었고, 그 불의 열정은 자신을 짓누릅니다. 또 분열을 일으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자기 할 일에만 충실한 사람은 큰 분열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이 붙은 사람은 내부와 외부에서 다 큰 분열을 일으키지만, 결국 한 가정이나 회사, 나라를 부흥시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모델이 고 김수환 추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단체의 리더를 뽑을 때 성령의 열정으로 분열을 초래하는 사람을 뽑는다면 그 단체의 장래는 밝을 수밖에 없지만, 안정만 추구한다면 그 장래는 밝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신부님! 저 진짜 열심히 살았습니다. 3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안 될까요? 세상은 정말 불공평합니다. 이렇게 노력했는데 되는 것은 없고…. 하느님께서는 왜 저에게 이러실까요?”
몇 년 전, 어떤 형제님께서 식당을 3년 동안 했지만 결국 장사를 접고 제가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함에 대한 한탄이었지요. 그런데 이분께서는 재기에 성공해서 저를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당시에 저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냥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노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노력하는 중이야’라는 기분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노력한다고 성당에도 나가지 않았거든요. 제 마음을 다스리며 기쁘게 살아야 사람들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쉬지 않고 일하는 것만 노력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진짜 노력은 하지 않고, 자기만족만을 가져다주는 가짜 노력을 했다는 말씀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많은 이가 이런 착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가짜 노력으로는 힘만 들고 성과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는 삶만이 진짜 노력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 함께 살 수가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는 돈을 비롯한 물질적인 것이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이를 얻기 위한 노력에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질적인 풍요를 얻어야지만 행복과 평화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 반해 주님을 따르는 삶, 사랑의 삶에서는 이런 물질적인 풍요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삶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하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가치들에 맞서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합니다. 남들은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무시하며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런 비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는 사람에게 그런 비난의 소리와 행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이런 식으로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질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갈라지더라도 어떤 행복을 좇아야 할까요? 사랑을 통한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풍요보다, 주님 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기억 속 가장 깊고도 아름다운 자리에 누군가를 둔다. 비록 끝났어도 불완전하지 않고, 떠나갔어도 꿈에서든, 서로의 마음에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존재를.
- 하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관계의 안일함으로 비롯된 개인적 이기와 집단의 무지를 평화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 꾸짖으십니다. 포용과 이해와 지혜가 필요한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우리의 분열을 비추어 줍니다.
주님의 평화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평화를 가로막는 우리자신을 반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것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상대를 탓하지 않는 평화이며 지배하지 않는 평화이며 올바른 관계를 실천하는 평화입니다.
증오와 갈등 맹목적인 믿음은 예수님의 평화가 아닙니다. 인간 소외와 공동체의 무자비한 분열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믿음과 함께 걸어가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집이 필요한 공동체의 간절한 평화입니다.
억압과 속박을 멈출 때 존중과 배려라는 평화가 따라옵니다. 마음의 평화는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평화입니다. 모든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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