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내 손가락에 싸움을, 내 손에 전쟁을 가르치셨네.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민족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 하느님, 당신께 새로운 노래 부르오리다.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당신은 임금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종 다윗을 구하시나이다.
2022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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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묵시 11,4-12)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20,27-40)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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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복음
루카 20장 27-40절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송영욱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9일 (토)
송영욱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주신 멜키올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9일 (토)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복음은 부활 논쟁 장면을 소개합니다. 등장인물은 사두가이 몇 사람, 율법 학자 몇 사람, 예수님이며, 구성은 ‘액자형 구조’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 안에 다른 이야기들이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라는 모세의 율법 일부를 근거로 일곱 형제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였다면, 부활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예시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시려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사두가이들이 모세의 율법 일부를 근거로 논쟁을 시작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떨기나무 발현 이야기를 끌어오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이름까지 알려 주신 구약 성경의 가장 탁월한 계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여러 성조의 하느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시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심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부활을 받아들였던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동조하는 것으로 전체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복음 내용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해 봅니다. 나의 옳음과 정당함을 주장하려고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다 사용하는 사두가이들의 모습과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경쟁 상대를 끌어내리려고 그분께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율법 학자들의 모습 가운데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류 역사상 인간이 이렇게 오래 살아본 적이 없다.
최근 통계청 ‘생명표’(2021) 발표를 보니, 한국 평균 기대수명(평균 생존 연수)이 남자는 80.5세, 여자는 86.5세였습니다. 1950년대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은 51.1세, 여자는 53.7세였습니다. 100년도 되지 않았는데 평균 수명이 는 것입니다. OECD 국가 중에서도 기대수명 순위가 2위라고 하니 전 세계적으로 ‘장수 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이렇게 오래 살아본 적이 없다.’
문제는 나이를 먹을수록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 들면 고집만 세진다고 하면서 특히 성격이 괴팍한 노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힘이 점점 없어져서 일할 기회 역시 사라지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외로움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내몰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우선 인정해야 합니다. 고독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고독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힘든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 있음의 장점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영성적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후손에게 지혜를 넘겨줘야 할 때입니다. 이 지혜는 계속된 생각으로 깊어지는데, 계속해서 자기 처지를 부정하며 고집만 부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연스럽게 사람들한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를 간직하는 삶이 먼 미래에도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만이 고독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두가이파와 함께 부활 논쟁을 하십니다. 사두가이는 솔로몬 왕 때의 대제관 사독의 후예를 자처하는 유다의 귀족 계급이며, 에제키엘서에서는 경건한 레위족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마카베오 시대에 바리사이가 세력을 증대함에 따라 예수님 시대에는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침략군 로마와 가까웠고, 종교적으로는 모세와 율법을 신봉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불멸성, 육신의 부활,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현실을 존중하는 현세주의자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라는 자부심이 있던 사두가이는 사실 편협되게 성경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편적으로 한 곳만 떼어 읽으면서 자기 뜻이 하느님의 뜻인 양 했습니다.
또한 결혼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삶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기에 산 자의 하느님이지 죽은 자의 하느님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편협된 성경 이해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게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는 삶, 지식이 아닌 지혜를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물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다스려라.
- 에픽테토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가장 소중한 순간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나간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오늘의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나간 어제가 아닌 오늘을 더더욱 기쁘게 나누게 하시는 살아계신 오늘의 하느님이십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오늘의 새로운 날입니다. 지나간 것은 맡겨드리고 오늘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 오지 않는 내일(來日)이 아닌 오늘 함께 기뻐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고 미움은 미움을 부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 미움과 아픔을 봉헌합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주시는 소중한 새 마음입니다. 새 마음과 새 땅은 하느님으로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을 이사악을 야곱을 끝내 하느님의 생명으로 이끄시는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가장 좋은 오늘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어제의 사랑을 되살리는 오늘이며 오늘은 내일의 사랑을 향하게 하는 오늘의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 참된 생명의 살아계신 하느님의 빛나는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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