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충실한 이들의 모임에서 찬양 노래 불러라.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모시고 기뻐하고, 시온의 아들들은 임금님을 모시고 즐거워하여라. 춤추며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손북 치고 비파 타며 찬미 노래 드려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에게 영광이어라.
2022년 11월 17일 (목)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묵시 5,1-10)
어린양은 살해되시고 자신의 피로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9,41-44)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기도
하느님, 복된 엘리사벳에게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공경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섬기게 하소서.
복음
루카 19장 41-44절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유재현 다니엘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7일 (목)
유재현 다니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7일 (목)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마치 사람처럼 여기시며 ‘의인화’하여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여기서 의인화된 것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자체입니다. 그안에는 그곳의 주민들, 곧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한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이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시는 이유가 다음 구절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이는 기원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파괴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로마 제국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유다교 신앙의 구심점이던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시킵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한탄하시는 장면을 서술합니다.
셋째, 예루살렘 멸망의 이유를 언급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 구세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분을 배척합니다. 임금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6-17; 2코린 6,16)이며,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입니다(1코린 6,19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가 이기심, 믿음의 부족,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에 사로잡혀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눈물을 흘리며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지난 주일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할 때 그 돌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아니, 그 파괴를 내다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이 울음의 의미는 죽음을 앞둔 부모의 울음과 비교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가 의좋기를 바라고, 의좋은 형제는 ‘의좋은 형제 비’가 있을 정도로 모두가 칭송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부모는 자녀가 이렇기를 바라는데 부모의 재산을 놓고 또는 사랑을 놓고 서로 싸운다면 부모가 어떻게 맘 놓고 세상을 뜰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죽을 때까지 그런 자식들을 보면 오늘 주님처럼 눈물을 흘릴 겁니다.
오늘 주님의 눈물도 그런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거기서 돌아가실 텐데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보람이 하나도 없게 그리고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싸움박질만 하다 망할 것을 내다보시고 흘리는 한탄의 눈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오늘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한탄하신 다음 예루살렘이 망하게 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은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실 때’가 아니라,‘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함께 하느님께서 이미 찾아오신 것을 예루살렘이 몰랐던 것이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한 것은 그들의 눈에 그것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을 시작하시며 당신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이 세상과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것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것인데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 예루살렘이 당신도 죽이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라 싸우다가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까?
당신이, 당신의 가르침이, 당신의 가르침인 복음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루살렘이 모르고 지금 우리도 모릅니다. 평화의 길을 주님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찾아오셨어도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이 여전히 이웃 국가들과 싸우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대표되는 나토와 싸우고, 미국과 중국이 싸우고, 중국과 대만이 싸우고, 우리의 남북이 싸우고, 한미일과 북중러가 신냉전의 길을 가는 것이 다 이 때문입니다.
평화의 길을 찾으려 들지 않고 싸우려고만 듭니다. 근본적으로 평화 의지가 없고 호전적입니다. 평화 의지가 있다면 그 길을 찾을 텐데.
이 평화 의지가 없고 호전적인 이 세대를 보고 우리도 오늘 주님처럼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겠습니다.,남북의 평화를 위해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무엇이 우리의 눈을 잃게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예언하시면서 우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멸망하게 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을 보호해 줄 가장 강력한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사람을 눈멀게 만드는 것은 ‘욕구’입니다. 망치를 든 이는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 욕구가 눈을 가리고 사건과 사물을 왜곡해서 보게 합니다. 돈만 아는 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재산만 노리는 사람들로 봅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대장내시경을 했습니다. 몇 년 전 대장내시경을 할 때가 기억났습니다. 변을 빼내기 위해 먹는 물과 약을 다 먹고는 9시가 넘어 피자를 먹었습니다. 워낙 입이 느끼한 상태에다가 누군가 선물해 준 피자가 눈앞에 있었습니다. 욕구가 생기니 보이는 게 없어졌습니다.
‘오늘 저녁에 먹으면 두 시간 뒤면 소화가 될 것이고 내일 아침에 세 번 더 빼면 되겠지!’
하지만 다음 날 계속 건더기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빨리 소화가 되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오전 내내 병원에서 다시 약을 먹으며 다 빼내고 오후에 대장내시경을 해야 했습니다.
욕구는 당연한 법칙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눈이 멀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눈을 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선악과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고통입니다. 나의 욕구 때문에 눈이 멀어 참 평화를 알아보지 못한 벌이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벌을 알면 욕구가 작용하지 못하기에 욕구가 지금의 단맛만을 바라보게 만들어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평화인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멸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방법이 없습니다. 욕구란 것 자체가 눈을 멀게 하여 고통을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보입니다. 제가 세속-육신-마귀를 쫓다가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제 인생을 바꿔준 책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눈에 들어왔던 것과 같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21회에는 6명의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나옵니다. ‘중2병’ 걸렸다고 말하는 금쪽이가 나옵니다. 금쪽이는 반항하고 분노 조절하지 못하고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싸움꾼이고 욕쟁이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 부모는 그것이 중2병 걸린 자녀의 탓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저희 욕심이 아이를 망친 거 같아요”라고 고백합니다.
아이 여섯을 키우다 보니 부모는 강력한 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법이 아니라 부모를 위한 법입니다. 중학생 아이가 7시 통금 한 시간 늦었다고 일주일 외출을 금지합니다. 불시에 소변검사를 통해 니코틴 검사를 합니다. 서열정리가 확실해야 해서 위 형제에게 덤비면 무조건 혼이 납니다. 금쪽이는 자기 가족 중 자기 편이 아무도 없다고 느낍니다. 이것에 반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욕구는 뜻입니다. 뜻은 법입니다. 가정에 부모의 법이 너무 지나치다는 말은 자녀들의 욕구를 볼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자녀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러면 자녀들은 그 가정에서 존재 가치를 잃습니다. 다시 말해 자존감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존감 없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여러 솔루션이 도입되었는데 저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권투를 배우는 중2 금쪽이와 아버지가 권투 스파링해 준 것입니다. 처음에 아빠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가진 금쪽이는 아빠를 사정없이 때립니다. 하지만 아빠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맞아주기만 하는 것을 보고 힘을 줄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힘이 빠진 아버지의 헤드셋과 글러브를 손수 벗겨줍니다.
아버지도 놀랍니다. 이것이 아마도 자기 뜻을 강요하지 않을 때 보이는 아이의 따듯한 마음일 것입니다. 내 뜻이 죽어야 상대의 뜻이 보입니다. 나의 눈을 가리는 것은 나의 뜻입니다. 상대의 뜻에 나의 뜻이 죽을 때 상대의 마음이 보입니다.
내 욕구는 다른 욕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사랑과 반대의 욕구를 지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본능과 반대되는 본성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분의 뜻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은 우리 뜻을 불사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니 예수님이 구원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뜻을 봉헌하는 것이 성령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성령으로 우리 눈의 비늘이 떨어지게 됩니다.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라고 경비병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경비병들은 감히 예수님을 잡지 못했습니다. 지도자들보다는 자기 뜻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구약성경에도 나옵니다. 바로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있는 다윗을 잡기 위해 세 번이나 전령들을 보냈지만, 성령에 사로잡혀 예언자들이 되어버린 예입니다(1사무 19,18-24).
눈이 열려야 구원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이 세속-육신-마귀보다는 성령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주님과 가까이 머무는 이를 가까이 는 것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책이 될 수 있고 강의가 될 수 있으며 미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분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우리 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 사랑의 욕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경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분의 뜻으로 내 뜻을 살라버립시다. 그래야 예루살렘 성전처럼 멸망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생각이란 말과 행동의 첫 번째 단계이다.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생각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키 작은 자기 모습에 늘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키가 작고, 친척들도 키 큰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키 큰 것이 정상일까요? 키 작은 것이 정상일까요?
‘왜 키가 크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이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스스로 변화될 수 있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미래의 자기 모습을 희망하며 지금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생각이란 말과 행동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제가 입고 있는 수단에는 많은 단추가 있습니다. 총 22개의 단추를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단추를 잘못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맨 마지막에 하나가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채웠던 단추를 모두 풀어서 다시 처음부터 잘 채워야 합니다.
생각 역시 말과 행동을 하기 전이 첫 번째 단추를 채우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잘한 생각일까요?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이 아닌, 제대로 된 특히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단순히 성전의 웅장한 규모에 감탄하셔서 우신 것일까요? 아니면 슬픔을 가져다주는 어떤 특별한 상황이 있었던 것일까요? 성전이 아닌 당신을 향한 유다인의 모습을 보시고 우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구원의 왕이고 평화를 가져다줄 임금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인은 이런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구원의 때를 알아보지 못하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들의 왕을 배척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된 것입니다. 이런 도시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잘못된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는 자녀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쉬웠던 것입니다.
말과 행동의 첫 번째 단추인 ‘생각’을 제대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도록 쓸데없는 생각이 아닌, 제대로 된 생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더는 주님께 슬픔을 드리는 우리가 아닌, 이제는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는 사랑과 감사에 굶주린 사람이 빵에 굶주린 사람보다 더 많습니다.
- 마더 데레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평화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평화는 사람으로 시작되고 사람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우리는 어떤 평화의 사람인지를 묻게 됩니다. 평화를 잃어버린 곳에서 뜨겁게 우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평화는 하느님을 닮은 우리의 인격입니다. 인격으로 살아가는 그 길이 우리의 평화입니다.
평화는 인격의 각오와 실천이 필요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십니다. 인격이 무너지면 평화도 무너집니다. 무너진 사람과 내동댕이쳐진 사람과의 관계를 십자가로 이어주시는 예수님의 평화입니다.
평화는 마음을 이어주는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의 평화입니다. 화려하게 빛나는 평화가 아니라 다시 소중한 마음을 되찾는 평화입니다. 평화는 우리 삶으로 내려왔습니다. 실천하고 기억하고 나누고 기뻐하는 참된 평화로 쪼개어 집니다.
나도 너도 평화를 간절히 바라지만 참된 평화는 멀게만 느껴집니다. 평화의 시작은 먼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평화의 예수님께 우리의 무너지 마음 무너진 관계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평화는 어떠하십니까? 오늘 평화의 원천이신 예수님과 함께 무너진 벽돌을 치우고 다시 사랑의 벽돌을 다시 쌓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무너진 관계에서 평화를 다시 시작하는 마음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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