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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0월 31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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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 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다독이고 달랬나이다. 제 영혼은 마치 젖 뗀 아기, 어미 품에 안긴 아기 같사옵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2022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0월 3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필리 2,1-4)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14,12-14)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0월 31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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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복음
루카 14장 12-14절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두중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10월 31일 (월)
김두중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10월 31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나와 상관없는 이들을 초대하라.

 

만일 누군가에게 맛있는 식사를 한 끼 대접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누구를 초대하고 싶은지 떠올려 봅시다. 그동안 이래저래 신세를 져 온 은인들이 아닐까요?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움을 준 형제나 친척, 업무와 관련된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직장 동료,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조언해 준 친구들이 떠오릅니다. 

한편 내가 잘 보여야 할, 또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장 상사, 영업에서 매우 중요한 고객, 존경하는 스승님, 그 밖에도 사회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지위의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이루는 관계가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상호적 관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을 받았으니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또 무엇을 받을 기대감에 먼저 주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은 그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일 뿐, 그에게 무엇을 주거나 베풀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우리식으로 바꾸어 봅시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보답이 예상되는 초대는 하지 말고, 오히려 보답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이들, 곧 ‘나와 상관없는’ 이들을 초대하라고 주문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논리에 따르면, 보답이 예상되는 초대는 그 보답을 받음으로써 끝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보답은 더 크고 유익하므로, 차라리 그것을 얻고자 현세의 보답을 포기하는 편이 훨씬 복되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이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아님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 결과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득과는 거리가 멀지만, 하느님 나라의 보상 점수는 그렇게 계속 쌓여 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 참사에 우리가 건네야 할 위로와 격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억지로 공통점을 찾는다면 위로와 격려를 받건 보답이나 상급을 받건 받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생각하다가 받는 나와 받지 않아도 되는 나 가운데 어떤 내가 더 낫고, 어떤 내가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받는다든지 도움을 받는 것과 풍족하여 돈이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필요 충족 차원에서는 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 그래서 받지 않는 편이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차원에서는 어떻습니까?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되겠습니까? 그런 관계는 사랑이 전혀 없는 관계가 아닙니까? 

이런 면에서 격려와 위로를 서로 주고받는 것은 사랑이고 격려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뭐든지 자신만만하고, 위로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복하여 ‘나는 격려와 위로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하는 것보다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상태가 오히려 더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답을 받는 것은 어떻습니까? 보답도 받는 것이 받지 않는 것보다 낫습니까? 

사랑을 역시 기준으로 할 때 보답을 바라고 뭘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이고 심지어 뇌물이며 그래서 그런 행위로는 보답을 받아도 행복하지 않고 보답을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것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철학자들이 인생의 지혜를 논하는 정도에 불과하고 인간끼리 주고받는 것을 논하는 것이니 신앙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인간끼리 주고받을 때 그 사랑을 인간적인 사랑이라고 함과 같이 위로와 격려도 인간에게서 받고자 할 때 그것은 사랑일지라도 받은 것이 인간적 사랑에 그치고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를 대신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위로와 격려는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적인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을 대신하는 거라면 그것은 받아도 충분하지 않고 어쩌면 불행입니다. 

지금 우리는 또다시 젊은이들이 떼죽음을 당한 대참사를 경험하고 있는데 이들 부모에게 우리가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표해야겠지만 우리의 인간적인 위로와 격려로는 그 부모들에게 부족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신앙인은 신앙인다운 위로와 격려를 해야 하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누는” 것으로 얘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와 위로를 받을 때 우리가 받은 그 같은 위로와 격려를 다른 사람에게 해줄 수 있을 것이고, 이번 참사자들의 부모들에게도 같은 위로와 격려를 해줄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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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팔이 있었던 29년보다 팔 없는 30년의 삶이 더 행복하다.

 

2014년 소치 동계 패럴림픽 폐회식과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에서 선포인 힘찬 크로키 퍼포먼스를 기억하십니까? 이 퍼포먼스의 주인공인 화가는 그림을 다 그린 후 발로 낙관을 찍었지요. 바로 수묵 크로키라는 자기만의 영역을 개척한 의수 화가 석창우입니다. 
 
그는 1984년 29,000볼트 고압 전류에 감전되어 두 팔을 잃었습니다. 이때의 나이는 29세. 너무 젊은 나이에 소중한 두 팔을 잃은 것입니다. 이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어느 날 4살인 자녀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졸라서 참새를 그려줬다고 합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의수 화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하늘에서 건강한 두 팔을 다시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안 받아요. 내가 양팔과 헤어진 것이 운명이라면 의수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바로 숙명입니다.” 
 
그러면서 팔이 있었던 29년보다 팔 없는 30년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해 봐야 무엇하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것에서 행복의 이유를 찾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행복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실천도 가능하게 됩니다. 
 
보답을 기대하지 말고 초대하라는 내용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사실 사회생활에서 초청받고 초청하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풍습입니다. 초상이 나면 초대하지 않았음에도 장례식장을 찾아가 문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보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어떨까요? 즉, 초청하는 이유가 초대받기 위한 것이고, 문상가는 것도 나중에 초상났을 때 문상하러 올 것을 대비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런 것은 선행의 장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보상’ 받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보상받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진정한 선행이고 자선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수한 사랑의 행위로 하느님 나라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보십시오. 혹시 이것들을 나눌 때,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감사의 마음으로 볼 수 있다면, 이를 나누는 것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보상받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선물을 가지고서 주님께서 보상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아무런 사심 없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남의 생활을 비교하지 말고 네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

- 니콜라 드 콩도르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어처구니 없는 이태원 참사로 너무 화나고 아픈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 시대가 다시 서로를 배려하는 건강한 사회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너의 불행이 곧 나의 불행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묻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초대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아낌없는 초대로 우리 존재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구분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신앙은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모두 나그네처럼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위한 삶인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관계에 너무 불충실한 우리들 삶입니다.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아픔의 소리 울음의 소리처럼 비명과 절규에 마음의 문을 닫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절망을 치유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습니다. 

삶의 중심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초대이며 보호입니다. 이태원 참사의 교훈으로 우리시대가 서로의 보호자가 되는 배려의 사회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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