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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0월 29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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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 영광의 초막, 하느님의 집까지, 환호와 찬미 소리 드높은 가운데, 축제의 무리와 행진하였나이다.

 

2022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0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필리 1,18ㄴ-26)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4,1.7-11)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0월 29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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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복음
루카 14장 1절, 7-11절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두중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9일 (토)
김두중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주신 멜키올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9일 (토)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이자 루카의 신학을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부자와 가난한 이’, ‘권력자와 힘없는 이’, ‘교만한 자와 겸손한 이’ 등의 대조를 자주 활용하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 기존에 형성된 가치가 완전히 역전되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사회에서 이미 충분한 보상과 위로를 누리는 부자나 권력자들보다, 변두리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그분 백성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낮아지는 것이 곧 높아지는 길’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작동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듯합니다. 현실에서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사람이 좀 더 높은 곳에 다다르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사람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다 있다고 한들, 치열한 경쟁 시대에 미련한 짓을 한다고 손가락질이나 받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현실에서 벌어질 법한 비슷한 상황을 하나 소개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윗자리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곳에 놓인 자리이고 그 잔치에서 가장 귀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앉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잔치를 연 사람이 누구를 초대하였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덥석 그 자리에 앉았다가는 망신당하기 쉽습니다. 차라리 끝자리에 앉는 것이 낫습니다. 초대한 사람이 직접 찾아와 맨 윗자리로 안내하게 될 때 다른 이들이 우러러보는 영광을 만끽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상황이 하느님 나라의 작동 원리와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원리를 가장 명확하게 실현하시고 삶으로 증명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자신을 낮추셨던 그분을 하느님께서는 만물 위에 들어 높이셨습니다(필리 2,6-11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하느님 나라의 이 원리가 유효함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두 가지 부러움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두 가지 부러움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하며 자기의 진정한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바오로 사도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럽다는 것은 나는 그러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다시 저 자신을 성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나의 바람이 아닌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저의 바람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럽고 무엇이 부러운 것입니까? 부러워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바오로 사도가 부럽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차원일 것이고, 제가 미련 없이 또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지 지금이라도 당장 떠날 수 있는지 그 차원일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과 사랑의 차이이고, 바오로 사도의 믿음과 사랑이 부러운 것입니다. 저도 지금 생각에는 주님께서 부르시면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지만 그 상황이 되면 실제로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랄까 확신이 부족한 반면 오늘 바오로 사도는 확신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사랑의 차이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면 그리고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께 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일 것이고 그래서 그 길에 두려움이나 미련은 없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면에서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데 비해 저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만큼 주님을 덜 사랑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주님 사랑에 대한 부러움이라면 또 하나의 부러움은 이웃 사랑에 대한 부러움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다른 데서도 이웃 사랑의 높은 경지를 토로한 적이 있지요.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불행, 곧 지옥에 가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말입니다. 

저도 이웃 사랑을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사랑과 결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의 불행을 감수할 정도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저는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차원,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사랑에 많이 머물면서 하느님 사랑에로 올라가려고 하는 애를 쓰는 차원이고, 그래서 이웃을 위해 고통을 좀 감수할지는 몰라도 불행을 감수할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바오로 사도로부터 자극도 받고 도전도 받는 오늘 저이고 아마 여러분도 같은 자극과 도전을 받는 오늘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과의 비교로 성장하는 겸손한 우리

 

남과의 비교를 통해 지금 삶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비교하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비교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처음 수영 배울 때가 생각납니다. 저보다 수영 잘하는 사람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제 수영 실력이 떨어지기에 수영 잘하는 사람의 모습을 계속 관찰하면서 저의 수영과 비교했습니다. 이 비교를 통해 저의 부족한 부분을 보강할 수 있었고, 제 실력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비교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비교입니다. 지금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비교,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비교, 스스로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라고 느껴지면서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비교 등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비교가 아닌, 자기를 성장시키는 비교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를 더 주의 깊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보지 않고 부러워하는 대상만을 바라보면 ‘나’를 괴롭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의 성장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선 안에서만 부러움을 갖지 않고 겸손하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라고 하면서, 당시의 식탁 예절을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당시의 식탁 예절은 아주 엄격했습니다. 특히 식탁 앉는 순서가 분명했지요. 손님들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상하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대체로 맨 나중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지위에 맞게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기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과시에 신경 썼기에 윗자리를 탐냈습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인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자기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 사람 앞에서 “내려가라”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 올라오십시오.”라는 말을 듣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낮은 자의 겸손을 간직해야 가장 높으신 하느님께서 높여주신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품위는 하느님이 높여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면서 겸손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지 말고, 남과의 비교로 성장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첫 번째로 당신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한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당신은 절대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 넬슨 만델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붉게 타오르는 단풍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내려오는 길입니다. 하늘이 내려와 땅과 하나가 되며 사람을 비춥니다. 사람의 일상 안에서 마음의 평화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입니다. 

말씀과 생활과 실천은 아래로 내려올 때 가능합니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더 낮은 곳에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삶의 중심 삶의 뿌리는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 있음을 배웁니다. 

회개도 정화도 그 뿌리는 겸손입니다. 부실하고 허약한 우리의 겸손입니다. 겸손은 끝이 없습니다. 낮추는 마음은 언제나 길을 만납니다. 우리 발 밑의 흙이 우리가 누워야 할 자리입니다. 기쁨과 기쁨을 이어주는 겸손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살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내려놓고 버리고 돌아갈 곳은 낮추는 마음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붉게 타오르고 사랑으로 내려오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그 사랑의 한가운데에 주님과 우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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