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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21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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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8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1주일 -

 

 

2022년 8월 21일 연중 제21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겠다고 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며 시련을 견디어 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시며,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21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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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3장 22-30절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대중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8월 21일 (일)
김대중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주신 멜키올 신부 강론

 

 

2022년 8월 21일 (일)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여간해서는 지나갈 수 없는 좁은 문

 

보통 마태오 복음은 엄격하고, 루카 복음은 부드럽고 따뜻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루카 복음도 엄중하고 강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여간해서는 지나갈 수 없는 좁은 문이 나옵니다. 심지어 그 문은 닫힐 것이라고 합니다. 닫힌 문 앞에서 사람들이 집주인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외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에 숫자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많은 유사 종교와 사이비 종교가 숫자 놀음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부단히 애써야 한다고 하십니다. 

구원받기 위한 첫째 조건은 ‘싸우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가끔 등장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싸웁니다]”(1코린 9,25).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애써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내면과 외면의 힘겨운 싸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그릇된 논리와 유혹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인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는 치열한 싸움입니다. 둘째 조건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낮아지고 작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춘 사람은 자신이 약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호소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스스로 구원을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를 받고 교리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꾸준히 미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을 보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 자기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는 항변에도 주인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면서도, 자신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과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좁지만 열려 있는 문

 

“주님,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구원 받을 사람이 적은지 주님께 여쭙는데 주님께서는 많은지 적은지 단순하게 답하지 않으시고 그 문이 좁다고 하시며,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아리송한 말씀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보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까? 많은 사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도 주님께서 많다 또는 적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단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구원에 대해 얘기할 때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일부 이단처럼 묵시록의 십사만 사천 명을 들먹이며 우리 교회를 믿으면 그 안에 들어갈 거라고 얘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은 이 구절을 들어 자기 교를 믿어야 이 십사만 사천 명 가운데 들 수 있다고 하였다가 자기들 신자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을 넘으니 딴소리했는데 그래서는 안 되지요. 

오히려 이 숫자의 의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두에서 오는 사람들과 열두 사도로 대표되는 신약의 모든 민족들에게서 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오늘 이사야서도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라고 얘기합니다. 

이렇든 구원의 문은 모든 종교와 모든 민족과 모든 문화에 열려있습니다. 우리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얘기하고 싶겠지만, 그래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렇게 얘기하는 종교를 통해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문이 좁다는 주님의 말씀이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 땅 만드신 그님한테서”라는 시편 말씀처럼 구원은 사람에게서 오거나 지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한테서 오는 것임을 믿어야 하는데 그것을 진심으로 또 확고히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할 자는 역설적으로 자기의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자신만만한 사람이고, 구원 교만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구원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겸손해야 합니다. 

구원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행위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 있는 것임을 아는 겸손이고, 그래서 나의 구원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고 자신하지도 않는 겸손 말입니다. 

다음으로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할 자는 구원 무관심일 것입니다. 이것도 구원 교만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난 목요일 복음에서 임금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밭 갈러 가고 장사하러 간 사람처럼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구원받기 위해서는 지난 수요일 복음에서처럼 오후 다섯 시에라도 주님 포도밭에 일하러 가야겠습니다. 늦게 오더라도 구원의 좁은 문을 열어 주시는 주님임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구원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하지 않고 겸손해야지만 하느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지 문을 닫아걸고 안 열어 주시는 분이 아니며, 구원의 문은 좁지만 열려있는 문임을 우리고 알고 또 믿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좁은 문 : “오늘 어떻게 살까?”, 아니 “어떻게 죽을까!”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1992) 줄거리입니다. 매들린은 아주 잘 나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입니다. 하지만 세월은 속일 수 없는 법. 매들린은 늘어가는 주름이 걱정입니다. 이때 어릴 적 친구 헬렌이 남자친구 멘빌 박사를 소개하겠다고 옵니다. 멘빌은 유망한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매들린은 헬렌의 남자친구에게 치근댑니다. 멘빌도 매들린이 싫지 않습니다. 헬렌은 매들린이 항상 자기 남자친구를 빼앗았다며 당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멘빌은 그렇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매들린과 결혼해버립니다. 헬렌은 상심한 나머지 폭식하여 살이 찌고 정신병원에 갇힐 정도로 피폐해집니다. 

몇 년이 지난 후 헬렌이 파티를 한다고 매들린과 멘빌을 초대합니다. 매들린은 헬렌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보려고 갔지만 헬렌은 훨씬 젊어 있고 아름다워져 있었습니다. 이번엔 헬렌이 멘빌을 다시 꼬십니다. 멘빌도 자신을 자기 주름보다 못하게 여기는 매들린이 지겹습니다. 그래서 매들린을 죽이기로 합니다. 

계단에서 밀어서 매들린을 떨어뜨린 멘빌은 헬렌에게 전화합니다. 그런데 매들린이 목이 꺾인 채로 멘빌에게 다가옵니다. 멘빌은 기겁합니다. 매들린은 헬렌에게 질 수 없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약을 먹은 것입니다. 그 약을 먹으면 몸은 좀 망가져도 죽지는 않습니다. 누가 좀 고쳐주면 됩니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 모습을 보고 기겁하고 심지어 심장마비로 죽기까지 합니다. 

이때 매들린이 죽은 줄 알고 헬렌이 들어옵니다. 매들린은 자기를 죽이려 했다며 헬렌을 총으로 쏴서 배를 뚫어버립니다. 하지만 헬렌도 죽지 않습니다. 헬렌도 그 약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둘이 죽도로 싸우다가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원히 살려면 자기 몸들을 고쳐 줄 의사가 있어야 하는데 멘빌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 화해하고 멘빌에게도 영생의 약을 먹도록 권합니다. 멘빌은 괴물이 되어 버린 두 여자를 두고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영생의 약을 버립니다. 그는 죽기를 택한 것입니다. 

37년 뒤 멘빌의 장례식이 열립니다. 멘빌은 다시 결혼하여 자녀도 많이 낳고 모험도 즐기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슬퍼합니다. 하지만 뒤에서 두 명의 여인은 비웃습니다. 바로 매들린과 헬렌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으면 뭐 하냐, 살아있는 게 낫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눈은 슬픕니다. 아무 의미 없는 하루를 또 살기 위해 나갑니다. 그들의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습니다. 아무도 고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화가 끝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하십니다. 좁은 문은 한 마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삶을 택하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비록 미사에 와서 강론을 듣고 성체를 영하더라도 이 길을 통해 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아침에 일어나 우리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어떻게 살지?”

이것은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으로 사는 사람의 질문입니다. 매들린과 헬렌이 영생의 약을 먹고는 매일 아침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택한 멘빌 박사는 다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어차피 죽는 인생, 어떻게 잘 죽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어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느냐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그는 죽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나의 죽음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실제로 혼자서 330척과 대적해 싸웠습니다. 이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머지 11척도 죽자고 덤벼서 결국엔 말도 안 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의미 있게 죽으려고 하는 삶,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영원히 살게 되면 더 완전한 모습으로 살려고 더 욕심을 부립니다. 하지만 죽으려 하면 생명 유지를 위해 간직한 아주 작은 것까지 이웃을 위해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내 힘으로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자신을 맡김은 하느님의 자녀됨으로 하느님처럼 됨입니다. 우리에겐 이 두 길밖에 없습니다. 

우린 지금 살아있습니다. 죽으려 하며 이웃을 살리는 사람이 될 것인지, 살려고 하며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 될 것인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예수님은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 죽으려는 삶으로 나아가보라고 권하십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도 하루를 어떻게 죽을 것인지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더 의미 있는 죽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 가슴에 희망을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죽으려 하기보다는 어떻게 살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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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이 제품은 콜라젠을 주성분으로 한 건데요. 열심히 드시면 피부에 탄력이 생기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어느 자매님께서 건강보조제를 주시며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저 역시 피부 노화를 많이 느끼고 있었기에 열심히 먹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피부가 좋아지는 느낌이었고, 저를 향해 피부가 좋아졌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시중에서는 먹거나 얼굴에 바르면 피부에 탄력이 생겨 주름이 없어지고 더욱 젊어 보인다며 콜라젠을 판다. 하지만 아무리 비싼 콜라젠이라도 먹거나 발라서 얼굴 피부에 탄력을 줄 수는 없다. 콜라젠은 매우 큰 분자라 발라도 피부에 흡수되지 못한다. 먹으면 위와 장을 거치는 동안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온몸으로 운반되므로 얼굴로 고스란히 가지 않는다.” 
 
제가 느낀 피부 탄력은 그냥 느낌뿐이었을까요? 어쩌면 좋아지고 있다는 마음이 실제로 좋아지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짜 양이 명약이 될 수도 있다는 플라세보 효과도 있지 않습니까? 결국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마음도 중요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당연히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며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좁은 문’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우시는 하느님 나라는 시련과 유혹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가치 있는 길이기에 어려워도 이 길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생명에 이르는 이 문은 좁고 또 그 길은 험해서 그리고 찾아드는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대부분 멸망하지 않을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주님 말씀은 ‘옳은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옳은 길을 통해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크고 넓은 길이라고 불리는 쉽고 안일한 생활이 더 눈에 뜨일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했던 사람이 선민의 자부심이 있었던 유다인들이었고,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안락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인고의 노력이 필요하며,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어렵고 힘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은 오직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으로 충분하며 완전하다.

- 칼릴 지브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루카 13, 24)

 

먼저 좁은 문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방식이 아닌 좁은 문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를 살리는 좁은 문이다. 좁은 문은 너무 커져버린 우리 자아를 대변해 주고 있다. 

좁은 문은 작아짐으로 풀어야 한다. 구원은 우리 자아가 작아지는 참된 기쁨이다. 작아지면 못 빠져 나갈 문이 없다. 작아지면 이 모든 것은 편안해진다. 자기를 버리면 하느님과 하나되어 빠져나갈 좁은 문도 사라진다. 

불의를 멈추고 올바른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의 참된 길이다. 개울물 또한 쉼없이 흘러 바다와 하나된다. 흐르는 물에 삶을 맡긴다. 다시 길을 만드시는 구원의 하느님이시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게되는 좁은 문의 크옵신 사랑이다.

머무르지 않는 살아있는 실천이란 우리의 자아가 점점 작아지는 작아짐의 실천이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는 이들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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