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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20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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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2022년 8월 20일 (토)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천사에게 이끌려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며,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 이르시고,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20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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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복된 베르나르도 아빠스가 하느님 집을 향한 열정으로 타올라 교회에 빛을 비추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도 불타는 열정으로 언제나 빛의 자녀답게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23장 1-12절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준혁 엘리야 신부 강론

 

 

2022년 8월 20일 (토)
오준혁 엘리야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주신 멜키올 신부 강론

 

 

2022년 8월 20일 (토)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스스로 낮출 줄 아는 사람

 

복음서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적대자로, 대개 이른바 ‘나쁜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바로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가정에 충실한 이들이었고, 자기 일에 매우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유혹에 직면하고, 많은 이가 교만해집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겠습니까? 영예로운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복음서의 모든 구절이 교회를 위한 말씀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결국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그들이 있음을 인식하도록 오늘 복음은 우리를 겨냥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고 하느님 말씀을 내세우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우선 순위로 두고 앞에 내세우고 싶은가, 이것이 오늘 복음의 중심 주제입니다.

죄는 하느님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죄를 부끄러워해야 하지만, 우리의 약점이나 결점에 대하여 지나치게 괴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그것이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면, 그 또한 은총입니다. 

우리가 정말 스스로 낮출 줄 아는 사람이 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그분의 자비와 연민을 지금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보이기 위한 삶을 사는 불행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하는 일은 다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그러니 그들이 하는 말은 실천하되 닮지는 말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보이기 위해 사는 삶의 불행에 대해서 성찰하고 반성코자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무엇을 하는 이유는 말장난 같지만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고 칭찬받기 위해서고 더 나아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사람은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첫째는 그런 칭찬과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설사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람과 그런 행복은 남에게 의존하는 인생이고 남에게 좌우되는 행복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칭찬과 사랑과 존경을 받기 위해 보이는 행동을 하지만 실제로는 받지 못하는 불행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됨됨이가 그렇지 못한데 잘 보이려고 할 경우, 우리는 대번에 그것을 알아봅니다. 우리가 흔히 ‘못된 놈’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되지 못한 놈이라는 뜻이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되다 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못난 놈’은 더 심한 경우입니다. 태어나기를 제대로 태어나지 못했기에 됨됨이가 부실하다는 뜻입니다. 태어나기를 작은 키로 태어났는데 멋있게 보이기 위해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다 해도 그것을 멋있게 보지 않지요. 키 작은 열등감의 표시밖에 되지 않으니 오히려 안쓰럽습니다. 

더 멋있는 것은 키 작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당당함이고, 나폴레옹처럼 비록 키가 작아도 다른 면에서 뛰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잘 보이기 위해 겉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은 됨됨이가 제대로 난 놈이든지 된 놈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됨됨이를 바꿀 기회를 놓치게 할 뿐입니다. 

다음으로 그렇게 하여 칭찬과 사랑과 존경을 받을지라도 불행한 경우입니다. 칭찬과 사랑과 존경을 남에게 받아야 행복한 사람은 그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칭찬과 사랑과 존경에 좌우되는 사람입니다. 

많은 경우,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 불행한 것을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되려는 것이요, 자존감은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되려는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자중자애하라고 할 때의 그 자중자애, 곧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것보다 더 행복의 길입니다. 

그런데 더 나은 행복의 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기에 내가 나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자기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여 사람의 사랑이나 받으려고 하고, 또 그래서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죄는 아닐지 몰라도 그에게는 불행이고 가여움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필요한 것만을 찾다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류시화 시인이 쓴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보면 성지순례를 가고 싶어 하는 유다인에 대한 영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지순례를 가고 싶어 하는 유다인은 매번 성지순례를 가려고 할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려면 멋진 구두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성지순례를 가려면 기타가 있어야 노래 부르며 가지.’ 
 
성지순례를 가려고 할 때마다 계속 필요한 무언가가 떠올라서 그것을 준비하느라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유다인들은 학살당하게 됩니다. 수용소로 끌려가던 이 유다인은 말했습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냥 노래 부르며 갔으면 됐을걸.” 
 
필요한 것만을 찾다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을 찾는 것보다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최후의 목적지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필요한 것만을 찾으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지금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인정받을 행동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라는 최종 목적지에 들어갈 유일한 준비물이었습니다. 이 준비물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 율법을 준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모세가 준 율법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지요. 특히 이집트에 민족 전체가 포로로 잡혀갔다 나온 후 이 율법 하나에 의지해서 삶을 지탱했고, 율법을 잘 지키느냐에 따라 하느님을 잘 섬기고 못 섬기는 표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 학자가 민중의 지도자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이 바로 바리사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지요. 그래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말하는 것은 모두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은 말로만 가르치고 가르치는 것을 정작 본인이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위세를 떨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만 합니다. 바로 위선의 표였습니다. 위선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는 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낮추는 삶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승리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행운이라 부른다. 패배는 미리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불운이라 부른다.

- 로알 아문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마태 23, 3)

 

그 자리가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하진 않는다. 올바른 삶 올바른 행실로 돌아가야 할 올바름의 시간이다. 올바른 삶이란 무겁고 힘겨운 짐을 피하지 않고 자신이 지는 것이다. 보이기 위한 쇼맨십을 멈추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섬기는 것이 올바른 실행이다. 섬기는 실행에 조건이 있을 리 없다. 섬기고 낮아지는 것이 회개의 삶이다. 섬기고 낮아지는 삶이 깨끗하여지는 삶이다. 

더 낮은 곳으로 뿌리를 내리는 자연처럼 튼튼한 중심은 아래에 있다. 부실하고 허약한 우리모습을 보게된다.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를 따지다 정작 아무 것도 실행하지 않는 우리들이다. 

낮아지는 실행은 욕심을 비워내는 은총이 된다. 낮아지기에 내맡길 수 있다. 잠자는 믿음을 깨우는 낮아지고 낮추는 믿음이다. 믿음은 이와같이 놓아버리는 것이다. 놓아버리면 거짓에서 벗어나는 은총이 된다. 

진실한 삶이 바로 섬기고 낮아지고 낮추는 삶임을 예수님 삶으로 보여주신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는 예수님의 실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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