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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15일 (월) 성모승천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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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8월 15일
성모승천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2년 8월 15일 (월) 성모 승천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은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의 표징을 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시어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다는 인사를 들으시고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15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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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이시며 성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하늘로 부르시어 그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셨으니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장 39-56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성모승천대축일
진효준 요셉 신부 강론

 

 

2022년 8월 15일 (월)
진효준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성모승천대축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8월 15일 (월)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현재를 영원한 것으로 믿고 살아야 할까요?

 

대형 유람선을 탄 승객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보다 그날 식단과 놀 거리에 더 관심을 보인다고 합니다. “영원성을 삭제하면 지평선은 언제나 좁게 보인다.”라는 어느 이탈리아 주교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먼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들에게는 올여름에 어디 갈 것인지,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어떤 클럽에 갈 것인지, 오늘 저녁을 먹고 나면 무엇을 할 것인지가 더 흥미로운 관심사입니다. 

이런 현상은 어른들 탓이 큽니다. 어른들의 생각과 삶 속에서 점점 ‘힘들지만 참는다’, ‘영원하다’, ‘결정적이다’ 등과 같은 말이 사라졌고, 그 영향이 젊은이들에게서 보이는 듯합니다. 우리는 점점 ‘지속’, ‘충실’, ‘인내’와 같은 낱말을 멀리하려 합니다. 

현재가 영원할까요? 현재를 영원한 것으로 믿고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한 여인을 소개합니다. 그는 한 아기를 낳은 빛나는 옷을 입은 여인입니다. 붉은 용이 이 여인을 적대시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그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하지만, 아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여인은 광야로 숨습니다. 

이 여인은 명백히 교회를 상징합니다. 또한 구세주 메시아를 바라는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용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뱀을 떠오르게 합니다. 

모든 악이 폭력을 휘두르며 아기와 교회를 반대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교회는 아기를 지켜 내고 우리는 광야로 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귀의 시련과 유혹에 시달리겠지만 그가 우리를 죽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성모님께서 광야로 피신한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하늘에 올라가셨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성모님의 위대함을 알리는 진짜 이유를 알려 줍니다. 바로 그분의 믿음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믿음은 성모님의 온 생애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가 썩을 몸으로 끝날 인생이 되지 않게 하시리라는 것을 믿으셨고, 마침내 하늘로 불려 올라가시어 우리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인생입니까? 우리가 탄 배의 종착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귀양살이하는 하와의 자손들이 슬픔의 골짜기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성모 찬송’ 참조)라는 말처럼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이 길의 끝은 성모님 생애의 끝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어머니처럼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인생이 거룩한 순례 길임을 믿으며 하늘에 오르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승천이라는 나그넷길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십니다.” 

어제와 그제는 제가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며 충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제는 모든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어제는 본래 미사 두 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어제 오후에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앞두고 경당에서 빅토리아의 아베 마리아를 연속적으로 들으며 묵상했는데 문득 마리아의 ‘예스’와 ‘노우’라는 주제가 떠올랐습니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노우’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노우’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은 미성숙하다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런데 ‘예스’라고 할 수 없는 사람도 미성숙하고 어쩌면 더 미성숙합니다. ‘예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 성숙하고 지혜롭고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노우’해야 할 것은 ‘노우’하고 ‘예스’해야 할 것은 “예스”할 줄 아는 사람이고, 무엇은 ‘예스’하고 무엇은 ‘노우’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행복입니다. 행복에 이바지하는 것은 ‘예스’하고 불행케 하는 것은 ‘노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복케 하고 무엇이 불행케 하는 것인지 또 묻게 되겠지요.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마리아가 그 신앙적인 기준을 제시해줍니다. 하느님은 ‘예스’하고 악마는 말할 것도 없고 악마적인 것은 ‘노우’합니다. 

그런데 하느님도 알고 악마도 알겠는데, 악마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잉태해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묵상하고 관상해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출산하고 전파해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고, 오늘 축일과 연결하면 하느님께 가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로 가시고 우리도 같은 길을 가야 하는데 마리아는 길잡이시라고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 곧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 저 세상에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자주 얘기하는데 완성될 주님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의 교회는 베드로를 반석 삼아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세우셨지만 그 완성은 이 세상이 끝나고 하늘나라에서인데 마리아는 그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이라고 얘기하고 있고 우리도 그 나그넷길을 가는 존재라고 오늘 감사송은 노래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 나그넷길을 마리아처럼 그리고 마리아와 함께 잘 가서 하늘나라에서 모두 모이면 그것이 완성된 주님 교회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은 떠나가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고, 주님과 마리아를 따라 가면 되겠습니다. 

나이 든 사람이라면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다 알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넷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이 노래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하숙생이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승천이라는 나그넷길을 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정처가 없고 하느님 나라가 정처가 되어야 하는데 이 세상에 정과 미련을 두게 하는 것은 ‘노우’하고 떠나게 하는 것은 ‘예스’하는 것을 마리아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은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다.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천재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마지막 작품이고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힙니다.

그는 1600년경에 귀족들의 그림을 도맡아 그리던 가장 유명하고 실력도 완벽한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술만 취하면 욕설과 폭행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돈을 대어 그를 빼내 주고는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간 횟수가 열다섯 번이나 됩니다. 

자기 실력을 믿고 그렇게 자만하던 중, 1606년 5월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가 다시 후원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번엔 모두 등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탈옥에 성공하여 이태리 가장 남쪽의 섬 몰타로 도주하여 거기서 숨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지긋지긋한 나머지 유일한 사면권이 있었던 교황을 설득해보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1610년 세계 처음으로 조명을 사람에게 직접 비추는 기법을 이용해 어린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들어 올리는 그림을 완성해냅니다. 

이 그림은 교황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그림 속의 다윗은 어렸을 때의 순수하고 겸손했던 자기 모습을 의미하고 목이 잘린 흉측한 골리앗의 머리는 지금의 자신을 상징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성직자들의 말에 불순종하여 끊임없이 범죄를 저질러왔던 자기 자신을 죽였음을 의미하는 회개의 증거품이었던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그 완성품을 들고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오릅니다. 중간에서 경찰들이 카라바조를 연행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를 도둑으로 오인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만 그림을 배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경찰들은 카라바조가 도둑이 아닌 것을 알고 놓아줍니다. 그러나 그림을 가지지 않고서는 교황에게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배를 쫓아 걷고 또 걷습니다. 그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길거리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카라바조는 왜 그 그림에 그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그 그림이 아니면 교황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그림 안에 자기 뜻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넣기 위해 피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니 소중한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를 사랑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점점 커감에 따라 부모의 뜻이 아기 안에 더 들어갑니다. 아이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부모의 뜻을 아이를 통해 실현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주시는 부모에게 감사해서 그분들 뜻을 따라줍니다. 그렇게 두 발로 걷고 말도하고 공부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부모는 그 아이 안에서 자기 살과 피로 넣어준 그 뜻, 그 보석을 보며 아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피 흘리고 고생한 자녀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 아니실까요? 인간이라고 해서 다 천국에서 살게 하실 수 있을까요? 그러면 가리옷 유다도 지옥으로 보내면 안 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리옷 유다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넣어주시기는 하였지만, 자신을 죽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 뜻이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불이 났을 때 내가 들고나오는 것이 내 피가 가장 많이 섞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체를 영해도 그분 뜻을 실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께 귀하게 쓰일 수 없습니다. 

‘시몬과 페로’라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나이 든 시몬은 감옥에 갇혀 젊은 여인의 가슴에서 젖을 먹는 음란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젊은 여인은 시몬의 딸 페로입니다. 페로는 아사형을 받은 아버지를 위해 아기에게 주어야 하는 젖을 아버지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성모님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성모님을 육체적으로 칭송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모님께서 칭송받으셔야 할 더 큰 의미를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님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잉태하실 때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서약한 것입니다. 그렇게 페로처럼 비난받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런 분에게 영광이 주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있습니다. 수수한 옷차림에 커다란 귀걸이를 한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 영화에서는 이 소녀가 가정부로 묘사됩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젊은 나이에 남의 가정부로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것은 가난한 화가뿐입니다. 그 화가도 능력이 부족하여 아내 집에 얹혀삽니다. 아내와 딸, 장모님은 화가가 그 여자와 빠지지 않도록 빈틈없이 감시합니다. 소녀는 그들에게 지쳐갑니다.

그 소녀를 노리는 사람이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 화가에게 돈을 대는 부자입니다. 그는 그 소녀를 그리면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소녀를 그리는데 화가는 아내의 진주 목걸이를 귀에 걸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어찌 될지 뻔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연인도 그 집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그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임신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녀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하는 행동으로 그 화가만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인간적으로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그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기로 합니다. 화가는 그 그림으로 매우 유명해집니다. 덕분에 소녀는 쫓겨나고 연인과도 사이가 안 좋아집니다. 몇 년 뒤 화가의 하녀가 그 소녀에게 선물을 전해옵니다. 그 진주 목걸이입니다. 화가는 자신의 영광을 그 소녀에게 돌린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이런 희생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뜻이 성모님 태중에 잉태되시고 그분의 피 흘림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진주 목걸이의 영광을 받아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성모님께서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갑시다. 그 피 흘림이 영원한 승천과 영광의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무엇에 집중하고 있나요?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네이버 뉴스 기사에 올라온 댓글로 사람들의 추천을 많이 받아 ‘베스트 댓글’이 되었다고 합니다. 과연 얼마나 잘 쓴 댓글일까요? 
 
“빌 게이츠? 그저 운이 좋아 프로그램 하나 만들고 억만장자가 된 사람이잖아.” 
 
“사실 아이폰을 만든 건 스티브 잡스가 아니지. 잡스는 진짜 천재인 워즈니악한테 빨대 꽂은 인간이지.” 
 
“왜 다들 워런 버핏을 현자니, 뭐니 치켜세우는지 이해가 안 돼. 그 사람 그냥 주식으로 해서 돈 번 사람 아닌가? 개미들 피 빨아먹는 투기꾼일 뿐이야.” 
 
어떻습니까? 진짜 공감이 가는 댓글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남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가짜 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감할 필요도 없고, 공감할수록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부족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족한 사람의 평가가 완전할 리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많음을 스스로 깨달으며 자기편을 만들어 갑니다. 이 세상에서 할 새로운 일도 더불어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어머니 성모님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아직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분명 기뻐할 일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기뻐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간음죄로 공개적으로 처형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느님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세상의 시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엘리사벳 역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했던 두 사람은 우리 구원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을 낳게 되었습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시선에 집중하고 있나요? 세상의 시선에 집중할수록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며, 자신을 저버리지 말라.

- 크리스토퍼 리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루카 1, 52)

 

하느님을 믿으셨던 성모님의 삶이다. 하늘은 하늘의 마음이 있고 하늘의 삶이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 지를 묻게되는 은총의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여정의 끝은 새로운 하늘의 시작이다. 견디어 낸 하늘이며 하나되는 사랑이다. 하늘은 사랑을 만들고 땅은 사람을 키운다. 하늘과 땅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시는 성모님의 여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사랑의 신비이다. 성모님은 십자가를 끌어안으며 하늘로 오르신다. 

십자가도 사랑으로 품으면 하늘이 된다. 이와같이 사랑이 목적이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목적이다. 하느님을 통하여 인생을 가르쳐주시는 어머니이시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 

성모 승천은 성모님의 여정을 품고 있다. 성모 승천은 사람과 하늘이 하나되는 기쁨의 길을 보여주신다. 성모 승천은 참 신앙인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느님 사랑은 한계와 절망까지 뛰어넘으며 우리를 구원하신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의 힘이다. 

승천은 말씀과 실천 안에 온전히 존재하는 하느님의 구원이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먼저 하느님을 진실로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 빛과 사랑 안에서 성모님이 하늘로 오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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