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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14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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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0주일

 

 

2022년 8월 14일 연중 제20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치드키야 임금은 대신들의 말을 듣고 예레미야 예언자를 저수 동굴에 가두었다가, 악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에벳 멜렉의 말을 듣고 그를 꺼내도록 합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14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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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2장 49-53절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유경촌 티모테오 신부 강론

 

 

2022년 8월 14일 (일)
유경촌 티모테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8월 14일 (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께서 지피신 불이 잘 타고 있습니까?

 

“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378번, 신약 성경에서 71번이나 나옵니다. 불은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불은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냅니다(창세 15,17; 탈출 3,2 참조). 또한 불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예레 20,9 참조). 모세는 하느님을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만나고,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불과 같아서 원수들을 태워 버리고 죄악을 정화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불, 예수님께서 세상에 지르신 불은 무엇입니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비추어지고 타오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그분의 빛이시고 불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인 성령도 불의 강림으로 표현됩니다(사도 2,3 참조). 

이 불이 세상을 밝힙니다. 불이 빛이 되어 어둠을 물리칩니다. 우리를 인도하는 불입니다. 동물적 본능이나 욕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불, 예수님의 빛이 불처럼 우리를 이끕니다. 그래서 복음은 세상에 불을 지핍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비인간화된 구조와 차별과 돈에 대한 탐욕과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불사르려 합니다. 여기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은 폭력까지 휘두르며 이 불을 끄려 합니다. 

복음서는 헤로데가 무죄한 아이들을 살육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마태 2,16-18 참조). 예수님조차 복음의 불을 끄려는 사람들에게 넘겨지시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신앙인에게 미움과 폭력과 교만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스르고 악을 지키려는 술책에 대하여 신자들은 분열을 감수해야 합니다. 거짓 평화와 부정으로 이룬 일치는 세상을 더 악으로 물들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께서 지피신 불이 잘 타고 있습니까? 가족들 사이에 복음의 정신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불이 우리 마음속의 이기심과 어두운 욕망을 태워 정화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젖은 짚단까지 태우는 사랑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하시며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시는데 주님 바람대로 제가 타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전에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불이 꺼져가는 것 같습니다. 점점 더 타올라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도 한때 불이 활활 타오르고 마른 짚단, 젖은 짚단 가리지 않고 불사르던 때가 있었는데 점점 사그라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그 분기점이 바로 관구 봉사자 때였습니다. 그전까지는 형제들에게 악역을 담당하고 갈등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견디어내는 힘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감수하고 감당할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구 봉사자를 끝내고 나니 진이 다 빠진 것처럼 더 이상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6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관구 봉사자 후보가 되었을 때 형제들께 이젠 형제들을 미워하거나 갈등하면서까지 사랑할 힘이 없는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고는 저를 뽑지 말아 달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다음에도 본원 원장에다 수련장에다 여러 큰 책임을 맡았는데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쓴소리하고 갈등을 감수하는 사랑은 싫고 그저 좋은 말, 격려의 말만 하고 힘들 때 힘이 되어주는 정도의 사랑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젖은 짚단은 피하고 마른 짚단만 불태우려고 하였습니다. 젖은 짚단을 태우려다가는 제 불마저 꺼질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제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고 활활 타오르는 불이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한 젖은 짚단을 태우다가는 잘 타고 있던 나의 불도 꺼질 것입니다. 불은 서로 불을 붙이며 타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자주 느끼는 것이 이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나를 바쳤는데 주변에서 냉담하면 그 열정이 사그라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쓸데없이 바친 것에 대해 후회하고, 공동체를 원망하고, 공동체에 정나미가 떨어지고, 마침내 더 이상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공동체를 떠나는데 우리는 여기서 공동체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잘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고 내 사랑의 불이 타오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사랑의 불이 너에게도 불을 붙여 같이 불타오르는 보람이랄까 기쁨이나 사랑의 충만을 주는 ‘마른 짚단의 너’이고 동동체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른 짚단이 아니고 젖은 짚단들입니다. 너만 나에게 젖은 짚단이 아니고 나도 너에게 젖은 짚단이라는 뜻입니다. 

젖은 짚단을 태우다 보면 연기가 나고 눈물을 흘려야 하며, 젖은 짚이 마를 때까지 인내의 시간이 있어야 하고 그런데도 계속 불이 꺼지지 않고 타는 불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불이 그런 불이 아닌 것이 문제이고, 나에게 알 불이 없는 것이 문제이고 알 불을 잘 간수치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알 불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의 불이 내 안에 있어야 내 불이 꺼지지 않고 젖은 짚단까지 불태웁니다. 

성령의 불이 있어야 하느님 나라의 정의에 대한 열망이 꺼지지 않고, 불의에 대하여 분노하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며, 성령의 불이 있어야 너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다 견딜 수 있고, 성령의 불이 있어야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을 계속할 수 있으며, 성령의 불이 있어야 고독 가운데서도 사랑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화로에 알 불을 잘 간수하듯 알 불 곧 성령을 잘 간수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일을 하든 학문을 하든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내 안에 모셔 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성령의 불이 내 안에서 꺼지지 않도록 기도 생활을 잘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울타리가 느슨하고 모호한 공동체는 매력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매년 5만 명에 이릅니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500만 명이 ​흡연으로 사망합니다. 흡연하고 장소를 옮기더라도 흡연자의 옷이나 머리카락 등에 여러 가지 유해 성분이 묻어와 주변 사람에게 건강 문제를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금연 20분 후에는 혈압과 맥박이 정상화되며, 12시간 후에는 혈액 속 산소량이 정상화됩니다. 2주가 지나면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폐 기능이 회복됩니다. 이후에는 여러 질병의 위험이 감소하며, 5~15년부터는 질병 위험이 정상인과 비슷해집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금연을 불가능한 과제로 여깁니다. 혼자 힘으로는 끊지 못해 금연보조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약으로도 1년 금연 성공률이 20% 전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희소식이 있습니다. 담배를 정말 끊고 싶다면 이곳으로 가면 됩니다. 한 나라인데 앞으로 담배 없는 나라가 될 것 같습니다. 담배를 마약과 같은 것으로 규정해 2009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앞으로 담배를 죽을 때까지 살 수 없게 되며, 담배를 파는 가게도 찾기 어려워질 전망입니다. 이런 법을 만들려는 나라가 뉴질랜드입니다. 수십 년 후 뉴질랜드 자체가 금연할 수밖에 없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금연하고 싶은 사람들, 혹은 담배 연기가 싫은 사람들에게 천국은 어디가 될까요? 바로 뉴질랜드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천국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세속-육신-마귀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것들을 끊고 사랑의 법만으로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사탄과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이들은 그냥 교회 안에만 머물면 됩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처음에 가진 재산을 다 팔아 봉헌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법이 얼마나 엄했는지, 재산의 반만 바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벌을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 사람을 많이 늘려주신 이유는 돈 걱정하며 살 필요가 없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매력을 풍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가톨릭교회는 그런 매력을 풍기고 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가 신자가 얼마냐고 물으면 한국에 한 500만 정도가 된다고 말합니다. 세례만 받으면 공동체 일원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예수님께서 처음에 계획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배울 수 없습니다. 

한 나라가 담배를 팔지 않아야 ‘금연하려면 무조건 뉴질랜드로!’라는 말이 성립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금연하고 싶은 사람에게 매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범위를 좁힌 것이 3년에 한 번 고해성사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무금을 많이 내고 단체에 속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바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신앙생활 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매력을 잃고 또 그 안에서 성장도 할 수 없습니다. 

강형욱의 ‘개는 훌륭하다’에서는 주인의 법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개들이 많이 나옵니다. 개들이 곧 법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개들에게 자비롭고 개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물고 자기들끼리 서로 물고 싸우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지옥이 되어갑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그건 개들을 방치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개를 키우거나 더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에덴동산의 법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가 바쳐졌습니다. 교회의 일원이면 당연히 교무금을 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의미도 있고, 본당과 교구가 유지되게 하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그다음은 아담과 하와의 친교였습니다. 그 친교 안에서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법이 실현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세례만 받으면, 혹은 3년에 한 번 고해성사만 보면 신자로 인정하겠다는 태도 자체가 어쩌면 자비롭게 보일 수는 있지만 교회 전체 이미지에는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놓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세례를 통해 세상에 뿌려지는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성령의 불이 붙여진 사람과 붙여지지 않은 사람, 두 부류밖에는 없습니다. 선이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불을 붙여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어디로 와야 하는지 명확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께서 세우신 성령의 법이 실현되는 더 선이 명확한 공동체가 되도록 쇄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일과 삶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행복할 수 있다.

 

일과 삶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하루 8시간 일을 마치자마자 삶 안에서 또 다른 행복을 만날 수가 있을까요? 일하는 8시간이 분명 적지 않은 시간입니다. 예전과 비교하면서 요즘 사람은 너무 놀고먹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과 삶의 조화를 이루겠다면 일하는 시간은 분명히 줄어야 할 것입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일에 대한 보수라고 하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일의 강도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과 삶의 균형과 조화는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을 좋아해서 그 안에 푹 빠져서 살고 있다면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연 만족스러운 삶이 될까요? 유튜브, 게임 등은 어떨까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만족스러운 삶은 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줄 삶을 만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는 것도 있고 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자기 취미 활동에 집중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영역에 대한 만족도를 높여야 지금 내가 하는 일과 삶의 균형과 조화도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악을 실천할 때 얻을 수 있을까요? 반대인 선을 실천할 때 얻게 될까요? 주님께서는 악이 아닌, 선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당신의 삶을 통해서 계속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시작하는 예수님 말씀은 평화가 아닌 불화를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을 것입니다. 특히 부자간, 모녀간, 고부간의 반대를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가족 안에서 일치가 아닌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선 자체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분열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옳을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도 악은 있을 수 있고, 가족을 위해 악이 합리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면서 악을 합리화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악보다 선을 실천하면서 삶의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선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선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다시 한번 힘내서 진리를 향해 갑시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 12,1).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모르는 것보다는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이 더 문제다.

- 마크 트웨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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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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