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5/12/23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2. 23.
반응형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나 용맹한 하느님이라 불리리니,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으리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강생하실 날이 가까웠으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이 되신 말씀 저희와 함께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부당한 종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2월 23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23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말라 3,1-4.23-24)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 오늘 복음
    (루카 1,57-66)
    세례자 요한의 탄생

 

 

 

말라 3,1-4.23-24
오늘 제1독서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57-66
오늘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23일
유성현 베드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59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 우리는 준비되어 있는가

성탄의 신비가 깊어지는 오늘 전례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름이 운명이다.”라는 라틴 말 표현처럼,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 1,78)를 드러낼 아기의 이름 ‘요한’은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장차 ‘말씀’이신 분께 ‘소리’를 내어 드리게 될 아기는 이 이름을 받으면서 아버지에게 말을 되찾아 줍니다.

주님께서는 세 가지 방식으로 오십니다. 첫 번째로 역사 안에서 태어나시고, 두 번째로는 역사의 종말에 오십니다. 세 번째로 날마다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당신 교회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늘 깨어 그분을 기다립니까? 아니면 문에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써 붙여 놓지는 않았나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는 바야흐로 코앞에 다가온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우리의 설렘을 더욱 커지게 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출산을 앞둔 성모님의 심정이 어떠셨을지를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는 없지만 분명 설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엄마가 된다는 기쁨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1,32)을 낳는다는 떨림으로 보낼 이 시간을 성모님과 함께하며,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노화의 시간은 정련의 시간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태생 소경이나 벙어리가 아니라 지금 와서 제가 귀머거리와 벙어리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뭣을 선택할까? 뭣을 선택해야 할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를 위해서라면 오늘 즈카르야처럼 벙어리가 되는 것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쓸데없는 나쁜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이 제겐 큰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제가 진실한 그리스도교인이라면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그런 입은 열려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즈카르야가 바로 이렇게 된 분입니다. 그의 입에서 불신의 말이 나오니 말문이 막혔고, 불신이 정화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자 말문이 열립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정화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늙어 가는 기간이 바로 이 기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천사가 나타났을 때 즈카르야가 “저는 늙은이”라고 하였는데 이때 그는 얼마나 나이를 먹었을까요? 어쩌면 이때 즈카르야의 나이가 지금 제 나이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독서 말라키서는 주님께서 당신에 앞서 당신 사자를 보내시는데 그 사자가 정련사로서 레위의 자손을 깨끗하게 할 거라고 예언하지요. 그런데 다시 올 엘리야 곧 세례자자 요한이 바로 그 사자이고, 세례자 요한이 주님에 앞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는 존재라면 그의 아버지인 즈카르야는 다른 누구보다 더 깨끗하게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늙어 가는 것이 정련의 세월이 되어야 하는 것은 즈카르야뿐이 아닙니다. 즈카르야는 저나 세월이 갈수록 정련된 곧 깨끗하게 된 존재여야 하고 그래서 나이 먹을수록 그 입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말이 아니라면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 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익어갈 뿐 아니라 깨끗해져 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하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복음의 기쁨] 273항 )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66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
정녕 당신께서는 
당신 손길로 저를 보살피셨습니다.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아오셨고
알아보지 못하여도 늘 함께 하셨습니다.

제가 응답하지 않아도 돌보아주셨고
배척할 때도 떠나지 않고 
늘 품고서 기다리셨습니다.

고통과 상처를 눈물로 씻어주시고
좌절과 실망에 빠졌을 때는 
바닥이 되어 떠받치셨습니다. 

침묵으로 견디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제 심장에 들어와 
당신 손길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제가 당신의 손길이 되어 
맡겨진 이들을 보살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은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이의 본성을 받게 됩니다.

찬미 예수님.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호칭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뿌리'와 '본성'을 지키는 투쟁입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이자 드라마인 『뿌리(Roots)』에 아주 처절한 장면이 나옵니다. 아프리카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던 주인공 쿤타 킨테는 노예상인에게 잡혀 미국으로 끌려옵니다. 백인 주인은 그에게 '토비'라는 노예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채찍질을 하며 강요합니다.

"네 이름은 뭐야?" 

"쿤타 킨테!" 

채찍이 살점을 뜯어내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아프리카 이름을 외칩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은 단어 몇 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 이름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이름을 버리는 순간 자신의 뿌리(아프리카 전사)와 영혼을 잃고 백인의 소유물(노예 본성)이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키는 것은 나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지키는 싸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가 한 행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아기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습이자 혈통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즈카르야는 서판에 단호하게 씁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즈카르야는 처음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아들을 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벙어리가 되어 침묵하는 동안 깨달았습니다.

"이 아이는 내 핏줄을 이어받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어받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가 하느님이 지어주신 이름 '요한(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을 아들에게 부여하는 순간, 아기의 본성은 '인간 즈카르야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예언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름을 주는 대상이 자신의 '본성'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이 관계의 신비를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요한아", "마리아야" 하고 불러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죄인이라는 몸짓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당신의 본성을 담은 이름을 주셨을 때, 우리는 그분에게로 가서 '꽃',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책임지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기 자신과 동등한 본성이 되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맹세입니다.

하지만 형제자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름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이름값을 하며 사느냐'입니다. 개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고 해서 개가 사람이 됩니까? 우리는 개를 사람 대하듯 할 수 있지만, 개가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으면(짖거나 문다면) 결국 개일뿐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이름을 잊게 만들려고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셨습니까? 마녀 유바바는 온천장에서 일하게 된 주인공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아 버리고 '센'이라는 가명을 줍니다. 이름을 뺏긴다는 것은 곧 부모님과의 기억, 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근원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주술이었습니다. 치히로는 자신의 본명을 잊어버릴 뻔하다가, 하쿠의 도움으로 진짜 이름을 기억해 냄으로써 마녀의 지배에서 벗어나 부모님을 구하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곧 나의 근원인 부모님과 연결되는 생명줄임을 보여줍니다.

역사 속에 전해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은 전쟁터에서 겁에 질려 도망치다 잡혀 온 병사를 만났습니다. 대왕이 이름을 묻자 병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제 이름도 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러자 대왕은 병사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습니다.

"네 이름을 바꾸던지, 아니면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라!"

대왕은 자신의 이름이 용기와 정복을 상징한다고 믿었습니다. 같은 이름을 쓴다면 그 본성도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우리 본성도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창세기 32장의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즉 속이는 자였습니다. 그는 이름대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야보크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한 끝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뜻은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자'입니다.

이 거창한 이름을 받고 나서 야곱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는 절뚝거리며 형 에사우에게 나아가 일곱 번 절하고 화해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형을 두려워하여 뒤에 숨는 비겁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이긴 사람답게 당당하고 겸손하게 문제와 직면했습니다.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받고 하느님을 이긴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형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겸손으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즈카르야는 아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줌으로써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에게 해야 할 가장 큰 일도 이것입니다. 세례명을 주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만으로는 인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우리 세례명에 걸맞게 행동합시다. 프란치스코라면 가난을 사랑하고, 요셉이라면 의롭게 행동하며, 마리아라면 순종하십시오. 이름대로 행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본성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십니다. 거룩한 이름을 지닌 우리는, 하느님처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례자 요한의 탄생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신 새로운 시간이 매번 내게로 옵니다. 이 시간을 사용하기에도 벅찬데, 과거의 시간까지 안고 있으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얼마 전, 이해인 수녀님의 새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사소한 것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지금밖에 없다’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지금이라는 시간을 제대로 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이라는 시간은 또다시 찾아올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더 많이 담아내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병으로 투병 중이신 선배 신부님을 찾아뵈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정말로 존경하는 분, 호탕한 성격으로 많은 분의 사랑을 받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암 투병으로 생의 마지막을 힘들게 보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후회 없이 살았다. 이제 미련도 없다.”
 
일주일 뒤, 신부님께서는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후회 없음은 그만큼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았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부님을 떠올리며, 나는 과연 후회 없이 지금을 잘 살고 있는지를 떠올려 봅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이웃과 친척들이 함께 기뻐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8일째 되는 날 할례식에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 사람들은 관습대로 아버지의 이름인 ‘즈카르야’를 따르려 하고,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천사의 지시대로 ‘요한’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대 유다 사회에서 장남의 이름은 가문의 정체성을 잇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아버지나 조상의 이름을 따르는 것은 가문의 명맥을 잇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관습과 달리 ‘요한’이라는 이름을 주장합니다. 관습을 깨는 엄청난 용기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습보다 하느님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행위는 단순한 작명이 아니라, 천사의 예고를 이제 온전히 믿고 순종하겠다는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순종의 순간, 닫혔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관습을 깨는 용기, 그리고 하느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정말 후회 없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너의 길을 가라.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라(단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요한의 탄생은 메시아를 향합니다. 요한의 탄생은 하느님의 때가 왔다는 첫 신호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미 시작하신 하느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탄생하지만 결코 중심에 서지 않습니다. 

요한의 탄생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요한의 삶은 메시아가 아니라 길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빛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기다리고 존중하라는 구원의 초대입니다. 해산은 서두를 수도, 미룰 수도 없습니다. 때가 차야 일어납니다.

이렇듯 한 생명의 탄생은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바꾸고 공동체의 역사를 움직입니다. 또한 우리 삶에는 조급함으로 앞당길 수 없는 하느님의 시간이 있습니다. 요한의 탄생은 말로 앞서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준비하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목적이 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라고 요한의 탄생은 말합니다.

 

 

 

루카복음 1장 66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251223_오늘성경구절이미지.jpg
0.29MB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