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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2/06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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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주님, 오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하느님, 인류를 옛 죄의 굴레에서 해방하시려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분을 간절히 기다리는 저희에게 천상 은총을 자비로이 베푸시어 저희가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2월 6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6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30,19-21.23-26)
    네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자비를 베푸시리라.

  • 오늘 복음
    (마태 9,35─10,1.6-8)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이사 30,19-21.23-26
오늘 제1독서

네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자비를 베푸시리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9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20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21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23 그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날에 너희의 가축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24 밭일을 하는 소와 나귀는 삽과 거름대로 까불러 간을 맞춘 사료를 먹으리라. 

25 큰 살육이 일어나는 날, 탑들이 무너질 때 높은 산 위마다, 솟아오른 언덕 위마다, 물이 흐르는 도랑들이 생기리라. 

26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9,35─10,1.6-8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6일
천승녕 가브리엘 신부

 

✚ 미사시작 00:06

✚ 강론시작 07:12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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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거저 받은 사랑, 이제 우리가 건넬 차례

복음서는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감정을 묘사하는데, 연민,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기적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열쇠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라는 표현은 그리스 말로 ‘창자가 움직이다.’라고 표현됩니다. ‘뱃속, 창자’는 구약의 전통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우리말에서도 ‘마음’을 뜻하지요. 창자를 뜻하는 옛말 ‘애’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가리키면서 ‘애가 탄다.’, ‘애간장이 녹는다.’ 등으로 간절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그저 상대를 가엾이 여기시는 감정에 그치시지 않고 시달리고 기가 꺾인 이들을 위하여 행동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느끼시는 연민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시작입니다. 삶 전체를 내주는 헌신으로 이어지는 연민이지요.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을 볼 때 연민을 느끼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하거나 부담스러워서 그냥 눈을 감아 버리지는 않나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듯이 우리에게도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로 성령의 힘과 권한을 주셨고, 성체성사로 당신과 일치하는 가운데 그 힘을 새롭게 하십니다. 수확을 위한 일꾼을 꼭 사제 성소자나 축성 생활 성소자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헌신하려면 지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 먼저 필요합니다. 거저 받은 주님의 연민과 사랑에 힘입어 주님의 일을 함께할 준비가 되었나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엾은 마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복음 선포 여행하시는데, 가시는 곳마다 병자와 기가 꺾인 이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전합니다. 오늘은 이런 주님을 보며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나의 가엾은 마음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성찰을 했습니다.  

저의 전 인생을 보고 수도 생활을 보면 스무 살 중반까지는 이 고통스럽고 악한 세상을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황하고 고뇌하며 답을 찾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이때까지의 저는 남의 고통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 때가 아니었고, 오히려 ‘누가 이 고통으로부터 나를 구해줄까?’ 구원자를 찾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 십 년 넘게 방황하고 고민하다가 구원자 주님을 새롭게 만난 뒤에는 가여운 사람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그들을 찾아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국내의 가난하고 병든 이들 그러니까 결핵 환자들, 쓰레기 줍는 이들, 야학으로 공부하는 이들, 공장 노동자들, 시골에서 문화 혜택이나 신앙의 돌봄 없이 사는 이들에게로, 그다음엔 북한으로 중국으로 러시아로 중앙아시아로 범위를 넓혀 찾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범위가 좁아 들어 주변 분들, 그러니까 찾아가지 않고 찾아오는 분들과 연민을 나누는 정도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외부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리된 것도 있지만 기가 꺾인 이들을 찾아가기엔 제 기운이 달려서 그리된 측면도 있고, 더 근본적으로 제 마음이 점차 ‘멀리’가 아니라 ‘가까이’로 달라졌습니다.

멀리 있는 이들의 고통이 눈에 보일 때는 가까운 이들의 고통을 보지 못했고, 심지어는 가까운 이들의 고통을 보기보다 불만스러운 것들을 더 많이 보았습니다. 이것이 가까운 사랑에 실패한 이유 곧 멀리 있는 사람은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은 미워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려면 그의 고통이 보여야 합니다. 그의 단점과 잘못과 죄와 악이 보이면, 다시 말해서 그의 단점과 잘못과 죄와 악이 가여워 보이지 않고, 불만스럽게 보이기 시작하면 사랑은 이미 저만큼 물 건너 간 것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주님처럼 이 마을 저 마을로 찾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도 고통 중에 있는 분들에게도 무척 많이 죄송하지만 사랑일지라도 욕심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가까운 고통들에 대해 가엾은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가엾은 마음,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듯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 가엾은 마음만은 사라지거나 졸아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

오늘 <말씀 전례>는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지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네.”(시 147,3)

<복음>에서는 ‘선한 목자’가 지닌 자비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것은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타인의 처지에 마음을 아파하지 않음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처지를 보고 슬퍼지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같이 지니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연민”,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 보여주듯이,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태중의 아기와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을 말합니다. 엄마의 숨으로 두 몸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곧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그러니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프게 됩니다. 우리도 그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0,7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교회를 망치는 순교자 콤플렉스

7세기 이전, 북아프리카 교회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키프리아노 같은 위대한 교부들을 배출한 가톨릭 신학의 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곳의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모스크만 남았습니다. 왜 그 찬란했던 교회는 멸망했을까요? 치명적인 실수는 바로 '독점'이었습니다. 당시 교회 지도층은 로마에서 온 라틴어 사용자들끼리만 사제직을 독점했고, 현지인인 베르베르족을 사제로 키우는 데 인색했습니다. "저들은 무식해서 안 돼"라는 엘리트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슬람 군대가 쳐들어와 라틴 사제들을 추방하자, 목자를 잃은 양들은 순식간에 이슬람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반면 토착민 사제를 열심히 키웠던 이집트 콥트 교회는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 엘리트주의는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이러한 비극은 세속 역사에서도 반복됩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은 33세에 요절하며 "제국을 누구에게 물려주겠느냐?"는 질문에 "가장 강한 자에게"라는 무책임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정복자였을지 몰라도, 백성을 책임지는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권력을 나눌 2인자를 키우지 않았기에, 제국은 그의 죽음과 동시에 장군들의 내전으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점욕은 결국 자신이 쌓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흔히 "본당에 봉사자가 없다,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순교자 콤플렉스(Martyr Complex)'라는 용어를 씁니다. 입으로는 "나만 고생한다, 힘들어 죽겠다"고 불평하지만, 막상 누군가 도와주려 하면 "당신은 이 일을 몰라"라며 거절하고 일을 움켜쥐는 심리입니다. 이들은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나 없으면 조직이 안 돌아간다'는 그 비장미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그 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시지만 혼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당신이 가진 '마귀를 쫓고 병을 고치는 권한'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나만 할 수 있어"가 아니라 "너희도 가서 하라"며 파견하셨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넘어서기를 바라고, 참된 목자는 양 떼 속에서 또 다른 목자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 내 자리를 대신할까 봐 두려워하거나 후배 양성에 소홀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 경쟁자를 죽였던 헤로데의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는 기술자가 아니었지만 당대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기, 자신보다 더 우수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이 눕다." 그는 일꾼을 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이 자신보다 뛰어난 것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 해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고 더 나은 일꾼을 세울 때, 하느님의 사업은 더욱 번창합니다.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도 한때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는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불평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열정이 아니라 영웅주의적 고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아직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이 있다. 가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세워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해결책은 엘리야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짐을 나누어 질 후계자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짊어지고 가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중세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의사들이 다 죽거나 도망쳐 치료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일반인들도 임종을 지키고 고해를 들을 수 있도록 파격적으로 허락했습니다. 밭이 썩어가고 영혼들이 죽어가는데 "자격증이 있느냐"를 따지며 기득권을 지킬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성소자 가뭄이라는 흑사병을 앓고 있습니다. "사제가 없다, 수녀가 없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성소 발굴을 위해 뛰고 평신도 리더들을 키워내야 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주님께서는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일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나 혼자 영광을 독점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진심으로 내 짐을 나누어 질 형제를 보내 달라고 기도합시다. 후계자가 끊긴 제단에는 잡초만 자랄 뿐이지만, 일꾼을 키우는 교회에는 영원한 생명이 자라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제자들을 뽑으셨던 예수님의 모습대로 자신의 일을 이일 일꾼을 만드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정혜윤 작가의 ‘책을 덮고 삶을 열다’라는 책에 소개된 울산에 사는 경비원 이야기가 감동적입니다. 이분은 경비 일을 하면서 수십 년간 꾸준히 기부했고, 국무총리상까지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부를 오랫동안 하게 된 것은 장모님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는데,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 승낙을 위해 이 여자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사랑하는 여자의 어머니께서 다리 저는 자기 모습을 보고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가? 내가 이제부터 자네의 어머니가 되겠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때부터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사랑을 나누기로 마음먹어서 정기적으로 기부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리를 전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모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받을 사랑만 생각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하나 먼저 받아야 나도 하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나를 주면 상대도 당연히 하나 이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나의 사랑이 전달되어 비록 내게 되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커질 때 진짜 사랑이 됩니다. 그때 사랑이 넘쳐나는 곳, 그래야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갑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다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은 단순히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아닌 깊은 아픔과 연민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지 못함에 대한 아픔과 연민입니다. 그래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에 우리 모두 들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6)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신 것은 구원을 위한 어떤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십니다. 
 
길 잃은 양들과 같이 소외되고 아픔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해 ‘가엾은 마음’을 느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따른다면,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가엾은 마음’을 느끼고 그들을 향한 우리의 손길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모든 이의 구원보다 나만의 구원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면서, 기도하고 동시에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 사이의 신뢰는 쉽게 깨질 수 있지만, 충직한 동물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콘라드 로렌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정서가 바로 연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우리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연민의 마음은 하느님의 가장 빛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의 길로 되돌려 놓으시는 구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있음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연민은 생명에 대한 공감이며 함께하는 돌봄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품어 살리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 외로움과 두려움을 알아보십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아픔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연민은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랑으로 다가가 치유하는 적극적인 힘입니다. 연민은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존재방식입니다. 그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살리고, 세상은 조금 더 성탄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이사야서 30장 21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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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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