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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1/0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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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1월 6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6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14,7-12)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5,1-10)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로마 14,7-12
오늘 제1독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7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10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11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12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5,1-10
오늘 복음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6일
양두승 미카엘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0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한결같은 사랑의 길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로마 14,7-8).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느껴서 이렇게 고백할까요? 오늘 복음을 읽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려 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리며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고 또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친밀함의 표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지혜 11,24)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비록 사람들 눈에는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해 보일지라도 창조주이신 아버지의 눈에는 모두 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당신의 자녀요 피조물입니다. 그들을 내치는 이들을 얼마나 못마땅해하셨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로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선하신 마음을 설명해 주십니다. 착한 목자의 선택은 사랑의 논리를 따릅니다. 그러나 경제 논리와 합리적 사고만을 따르는 이들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체험이 없다면, 이런 종류의 기쁨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의 기쁨을 불편해하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불편과 분노를 가라앉히시려고 당신 사랑의 걸음을 멈추시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한결같은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하나쯤이 아니다. 너도!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를 잃으면 그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매고 그래서 마침내 찾게 되면 기뻐하지 않겠냐고 당연한 듯 말씀하시는데 누구나 다 그렇게 할까요? 그 ‘어떤 사람’이 나라면 나도 그렇게 양을 찾아 헤매고 기뻐할까요?

저의 수도 생활 경험으로 볼 때 성소에 대해서 누가 고민 가운데 있으면 그가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할 수 있지만 이미 떠나기로 결심하고 나면은 거의 모두 아무리 설득해도 떠나고 맙니다. 이런 경험들 때문에 오늘 주님께서 잃은 양을 마땅히 찾아가야 함을 말씀하셔도 마땅히 찾아가지 않고 지레 포기하거나 한번 찾아가 얘기하고 난 뒤 포기합니다.

그리고 떠나고 나면 애석하고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그렇게 내가 애썼는데도 사랑을 무시하고 떠났다고 탓을 그에게 돌리고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내가 또는 우리가 잃은 양이 아니라 그놈이 길을 잃은 것이라고, 더 심하게 얘기하면 그놈이 우리 무리를 제멋대로 이탈한 것이라고, 그러니 찾을 필요가 없다고 또는 찾아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성숙은 이런 데서 드러납니다. 미성숙한 사람이나 공동체는 문제가 있으면 그 탓을 자기가 아니라 남에게 돌리고, 나나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고 그가 사랑받기 부족한 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탓이라고 하지 않고 그의 탓 또는 남 탓이라고 할 때 이미 그와 우리는 갈라선 것이고 거의 포기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이 미성숙하고 잘못 생각하여 공동체를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양이 한두 마리라면 개인의 탓이고 일탈일 수 있지만 여럿이라면 나와 우리 공동체의 사랑과 성숙이 이 정도이기에 성소를 잃게 만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한 자식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한번 사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하나쯤으로 여기는 공동체는 나머지 양을 다 잃을 것입니다. 한두 번 애쓴 다음 할 만큼 했다고 하는 공동체, 곧 사랑의 부족을 반성하지 않는 공동체도 나머지 양을 다 잃고 말 것입니다.

사랑 없는 부부가 같이 살 이유가 없듯이 사랑 없는 공동체에 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쯤이 아닙니다. 너도 하나쯤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의 사랑과 성숙은 어느 정돈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는 죄인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한 죄인 하나를 두고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 속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여인 역시 ‘잃은 드락메’를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이는 잃은 것을 찾으시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과 또한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잃은 것을 되찾은 후에,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라고 말씀하심은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되찾은 후에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베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고, 은전 한 드락메를 잃어버린 슬픔이 마치 열 드락메를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슬펐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백 마리의 양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고, 은전 한 드락메를 되찾은 기쁨이 마치 열 드락메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들을 맡기신 아버지께 대한 ‘충실함’이요, 드락메를 결혼의 징표로 주신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한 ‘신의’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안에서의 전부인 사랑’, ‘전부 안에서의 하나인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전 인류를 구원하신 전부인 사랑입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당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쁨이요, 재회의 기쁨이요,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요한복음 사가가 말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요한 15,2)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9,10)는 당신 자신의 소명과 행위를 옹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찾고 계시는 음성, 곧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6) 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목숨까지 바치신 당신의 외아들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었던 양을 되찾기 위해 광야를 쫓아다니며, 잃었던 은전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목자의 사명도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도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신 이 큰 기쁨을 형제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5,6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주님!
오늘도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애타게 찾으시고 
끝내는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십니다.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저의 오롯한 기쁨이오니
제가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는 부모가 집착하는 것을 집착한다.

찬미 예수님,

아이는 부모와의 감정 교류를 통해 성장합니다. 무엇을 할 때 부모가 기뻐하는지, 무엇을 할 때 마음 아파하는지를 알아갑니다. 만일 부모가 오직 '세속-육신-마귀'적인 것, 즉 돈, 성공, 쾌락에만 '집착'하고 영적인 가치에는 무관심하다면, 자녀 또한 '세속적 가치'에만 집착하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존재, 즉 영적 소시오패스가 됩니다. 이것이 어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읽고, 똑같이 집착해야 할 하느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1887년, 14살의 소녀였던, 나중에 작은 꽃이라 불릴, 데레사 성녀는 신문 기사 하나를 읽고 충격에 빠집니다. '프란치니(Henri Pranzini)'라는 남자가 파리에서 한 여성과 그 자녀 둘을 끔찍하게 살해한 죄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신문은 그가 조금의 뉘우침도 없이, 무신론자로서 모든 회개를 거부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99%의 사람들은 그를 '심판'하며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14살의 데레사는 달랐습니다. 그그녀는 아버지께서 '집착'하시는 이 '잃어버린 1%'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지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이 살인자 프란치니를 '자신의 첫 번째 자녀'로 입양하기로 합니다. 그녀는 자서전 『한 영혼의 이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그가 지옥에 가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 한 방울이라도 헛되이 흘리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데레사는 프란치니를 위해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고, 극심한 고행을 바쳤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께 "표징"을 구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토록 집착하시는 이 영혼이 돌아왔다는 '작은 표시'만이라도 보여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마침내 프란치니의 사형 집행일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완고했습니다. 그는 사제가 내미는 십자가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두대에 목을 내밀기 직전,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사제의 손에 들린 십자가를 '붙잡아', 그 상처에 '세 번' 입을 맞추었습니다.

며칠 뒤,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을 읽은 14살의 데레사는 기쁨의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집착'을 읽었고, 그분께 '잃어버린 1%'를 되찾아 드렸습니다.

이 14살 소녀가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아버지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해 집착하게 된 것은 그녀가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함께 음식을 먹는다."(루카 15,2)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자녀는 부모가 집착하는 것을 집착합니다. 이것이 내가 누구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그 어린 나이에도 남들이 심판하는 한 범죄자도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손가락과 같은 자녀임을 알고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은 열 명의 형들에게서 팔려 이집트로 갔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유일한 친혈육인 베냐민을 붙잡아 놓으려고 합니다. 이때 유다가 나섭니다. 아버지가 요셉을 잃었는데, 베냐민까지 잃으면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유다는 베냐민 대신 자신이 감옥에 갇히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요셉은 유다와 형제들을 다시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같은 아버지를 가졌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베냐민을 위해 자신이 대신 벌을 받겠다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다시 형제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그리스도와 아버지께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LA의 그렉 보일 신부님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착'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잃어버린 1%', 즉 갱단원들에게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99%의 사람들이 그들을 '심판'할 때, 보일 신부는 오늘 예수님처럼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수색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잔치에 갈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잔치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할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머물 자격은 우리의 의로움(99%)에 있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형제(1%)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집착'을 내가 똑같이 '집착'하고 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사람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요? 누구는 머리라고 말하고, 또 누구는 가슴이라고 말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어느 책을 보니, 몸의 중심은 아픈 곳이라고 말합니다. 발가락이 아프면 계속 발가락만 생각하게 되지요. 발가락이 중심인 것입니다. 손가락이 아프면 손가락이 중심이고, 가슴이 아프면 가슴이 중심이 됩니다. 치통이 있으면 몸의 중심은 어디로 갈까요? 그때도 머리이고 가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몸의 중심은 치아가 됩니다. 
 
이렇게 몸의 중심은 늘 아픈 곳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에 우리가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그 힘듦이 바로 나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중심이 되는 이 아픔을 남에게는 제대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뭐가 힘드냐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남의 중심을 흔들어 놓는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중심을 제대로 보십니다. 그들의 아픔을 또 고통과 시련을 보십니다. 그래서 자주 측은하게 바라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그 어려움으로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불평합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세리와 죄인들은 당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거룩하신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런 부정적인 자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을 보시고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들에게 더 큰 관심이 있음을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은전의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보면, 분명 아흔아홉이 하나보다 큰 숫자입니다. 세상은 아흔아홉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광야에 남겨진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하기에,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라고 말씀하십니다. 
 
은전의 비유에서는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루카 15,8)라고 하시면서, 잃어버린 우리들을 찾기 위한 세심한 보살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만큼 중심을 잃고 힘들어하는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중심을 잃어버린 우리를 향해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남의 아픔을 간단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주님처럼 측은한 시선으로 그들의 아픔에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하면서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낸다(루크레티우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애타게 찾으십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자비를 행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며, 끝까지 찾고 기다리는 자비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회개가 단지 개인의 결심이 아니라, 자비로 일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죄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관계가 다시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는 한 사람의 회개가 천상의 축제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회개는 심판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은총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이들보다 길 잃은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회개는 따라서 도덕적 보상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영혼의 치유와 관계적 복원의 여정입니다. 회개는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우리의 회개이고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우리가 돌아설 수 있는 힘은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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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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