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5/09/1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9. 10.
반응형

 

 

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9월 10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콜로 3,1-1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여러분 안에 있는 것들을 죽이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6,20-2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콜로 3,1-11
오늘 제1독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여러분 안에 있는 것들을 죽이십시오.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6 이것들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 

7 여러분도 전에 이러한 것들에 빠져 지낼 때에는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8 그러나 이제는 분노, 격분, 악의, 중상, 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십시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6,20-26
오늘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10일
최동석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3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예수님을 따르고자 선택하는 가난

오늘 복음 내용인 루카 복음서의 행복 선언은 군중을 대상으로 한 마태오 복음서의 행복 선언과(5,1-12 참조) 달리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도 가난하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가난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기로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가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내주시는 하느님, 참으로 가난하시고 그래서 행복하신 하느님을 닮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형제들에게 부족한 것을 자신들에게도 필요한 것으로 여기기에 배고픈 이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선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배부름, 곧 삶의 충만함을 알며 그것을 누리기에 행복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며 겪는 제자들의 지금 상황은 기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퍼하고 웁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흘리는 눈물이기에 위로가 따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승리로 이끄실 것이라는 희망이 그들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복음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상을 제안하고 그것을 위하여 노력할 때, 세상 사람들은 불편해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며 모욕하고 중상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박해와 미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박해받는 것은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뜻임을 깨닫고 기쁨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 안주하지 않고 추구하는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람들이 나를 좋게 얘기하면 불행하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좋게 하는 얘기를 들으면 왜 불행할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들어야지 나쁜 사람이라고 평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도 빛을 함지로 덮어두지 말고 등경 위에 놓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문제는 좋은 평과 칭찬을 사람들에게 들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하느님께는 칭찬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칭찬받으려고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은 그야말로 칭찬받아 마땅하고 더 나아가 수치를 당하려고까지 하는데도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은 성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더더욱 칭찬받아 마땅한 경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거나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하는 것은 그래서 불행하고, 같은 맥락에서 가난한 사람이나 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서 부유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난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웃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세상에서 슬퍼하기에 행복합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은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소유하려고 하는데도 다시 말해서 소유욕이 있는데도 가난한 것은 천상적 가난이 아니고 그렇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소유하려고 하지 않아 가난해야지 천상적 가난이고 그렇게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며, 이를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과 연결하면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지 않는 가난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지 마시오.”  

사실 땅에 살면서 어떻게 땅에 있는 것을 생각지 않고 저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 욕망이 죽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욕망이 절망과 허망이 되는 과정을 피할 수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땅에 있는 것을 생각지 않고 위의 것을 추구하는 빛나는 행복은, 그러므로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얻게 되는 보석입니다.  

이 말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이 있듯이 행복도 급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소유키 위해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는 행복이 최고 등급의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앞서 봤듯이 최고 등급의 보석을 얻기 위해서는 잃는 고통이 필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한 행복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행복을 욕심부릴 것은 아닙니다. 행복 욕심보다 큰 욕심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안주하지 않고 추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

오늘 <복음>은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이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특히 마지막 네 번째 불행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또한 눈치보고 비위맞추며 타인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나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좋은 인간관계나 단순히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며, 그저 오손도손 미워하지 않고 재미나고 즐겁게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 고통과 슬픔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는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20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주님!
주님 안에 고독하기를 
배우게 하시고
진리를 만나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고 
주인공이 되기보다
주님을 주님으로 
섬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과 불행? 원리는 사랑이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뒤엎는, 충격적인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아니, 어떻게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사람이 왜 불행하다는 말인가? 이것은 세상의 상식과 정반대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설적인 진실을 두 사람의 삶을 통해 똑똑히 목격하게 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세상의 모든 부와 쾌락, 명예를 손에 쥐었던 남자, 바로 플레이보이 제국의 창시자 휴 헤프너입니다. 그는 수십 개의 방이 딸린 호화로운 저택에서 수백 명의 젊은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평생을 잠옷 차림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쾌락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모든 조건을 갖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어땠을까요?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진정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깊은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렸고, 결국 자신이 누렸던 모든 쾌락의 잿더미 속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반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평생을 울며 살았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20세기 최고의 가수로 칭송받는 프랑스의 에디트 피아프입니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태어나 굶주림과 가난, 질병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과 배신, 그리고 극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가득 찬 ‘우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노래했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자신의 고통을 넘어, 상처 입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노래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

휴 헤프너와 에디트 피아프. 세상의 눈으로 보면 누가 더 행복했습니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유일한 행복의 길이지만, 대부분 길을 잃고 맙니다. 세속-육신-마귀라는 삼구(三仇)에 사로잡혀, 가장 중요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구 행려인들의 어머니셨던 ‘왕초 수녀님’, 최 소피아 수녀님의 이야기입니다.

첫째, 수녀님은 ‘세속’, 즉 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셨습니다. ‘요셉의 집’을 운영하며 수백 명의 행려인들을 돌볼 때, 후원금이 들어오면 그날로 필요한 것을 모두 사서 나누어주고 통장을 텅 비워버리셨습니다. 어느 날, 한 방송국 PD가 인터뷰 중에 “수녀님, 내일은 당장 쌀이 없는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고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느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예. 오늘 필요한 만큼 주셨으니, 오늘 감사하며 쓰면 됩니다.”

그녀에게 돈은 쌓아두는 재산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흘려보내는 강물과 같았습니다.

둘째, 수녀님은 ‘육신’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KBS의 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수녀님이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는 알코올 중독자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남자는 욕을 하며 거칠게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수녀님의 얼굴은 할퀴어져 피가 흘렀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야단을 치며 그를 씻기고 먹였습니다. 그녀에게 자신의 몸은 아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셋째, 수녀님은 ‘마귀’, 즉 세상의 인정과 명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셨습니다. 한번은 조계사의 한 스님이 수녀님의 헌신적인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아, 불교 방송을 통해 수녀님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후원금을 모아 전달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수녀님은 스님을 찾아가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합니다.

“스님! 왜 제 허락도 없이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제가 하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 아시면 됩니다.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세상의 칭찬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시선 앞에서만 살았던 분입니다. 이처럼 삼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기에, 그녀는 비로소 온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그녀는 진짜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녀는 행려인들에게 욕을 하고, 때로는 매를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야단과 매질 속에, 뼈 속까지 시린 진짜 ‘사랑’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철강 재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평생을 써도 다 못 쓸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세상이 말하는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사람’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직후, 그 전 재산을 익명으로 형제들과 예술가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 수도원의 정원사, 병원의 잡역부로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가난하고 이름 없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그를 돌보던 부인에게 그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에게 내가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주시오.”

그는 세상의 모든 부를 버렸지만, 그 대신 진리와 양심에 따라 살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만족과 평화를 얻었던 것입니다. 행복합니다. 삼구를 사랑을 위해 포기할 줄 아는 사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저의 손톱을 무심코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꽤 기네. 깎을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 일주일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자란 것입니다. 제 몸의 일부인 손톱인데 말입니다. 
 
아이들 크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2년 전, 우리 본당에 부임해서 처음 만났던 복사 아이들은 분명히 저보다 작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중학교 올라가면서 지금은 저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나의 몸도 또 남의 몸도 잘 모릅니다. 이것만 모를까요? 그 밖에도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착각 안에 살 때가 참 많습니다. 세상 안에 살고 있으니 세상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에 하느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물질적인 풍요와 만족만 있으면 그만이고 그것이 행복이라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겸손 안에서 자기를 낮추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야 착각에서 벗어나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범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행복 선언은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우는 이, 박해받는 이에게 주어지는 약속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는 것이고, 불행 선언은 부유한 이, 배부른 이, 웃는 이,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이에게 내려지는 “불행하다”라는 경고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반대로 이야기하시지요. 세상의 질서를 뒤집으시는 하느님의 정의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약한 이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세상의 눈으로 불행해 보이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세상에서만 즐거움과 위로를 찾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돌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의 명언

천하의 모든 물건 중에는 내 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몸은 부모가 주신 것이다(율곡 이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느님 자신이 가난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체험하는 삶입니다. 새로운 가치와 희망이 주어졌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이들이 복된 존재입니다. 세상적 성공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고난과 충실함이 하느님 앞에서의 참된 행복입니다. 행복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소유와 성공이 아니라, 관계의 진실성 속에서 경험하는 하느님 체험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세상이 불행이라 여기는 순간에도,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발견하는 능력이 바로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행복입니다.

가난은 자기중심적 자아를 허물고, 비움과 열림의 관계로 향하는 문입니다.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공간이며, 그 공간 안에서 하느님과 만나 살아가는 삶입니다. 채우려는 욕망이 아니라, 비움 속에서 오는 자유를 사는 것입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과 성공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하느님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살아내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 안에 있습니다. 참행복은 참행복이신 하느님과의 참된 관계입니다.

 

 

 

콜로새서 3장 1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250910_오늘성경구절이미지.jpg
0.55MB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