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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9/0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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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9월 9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콜로 2,6-15)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12-19)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콜로 2,6-15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6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7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8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9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10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11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15 권세와 권력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그들을 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6,12-19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9일
오세찬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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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사랑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을 뽑으신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자 하는 뚜렷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많은 지파가 소멸하고, 남은 지파도 서로 합쳐져 겨우 두 지파 정도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이라는 상징적 숫자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회복시키시어 이스라엘 구원에 관한 하느님 약속을 실현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두 제자들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사실 첫 번째 사도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적용되는 이 직분을 제자들에게도 주시면서 제자들을 당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려 주십니다. 또한 여기에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도 함께 하기를 바라시며, 이 사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열두 사도를 선택하신 것에는 큰 뜻이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시고 이 일이 하느님 뜻에 따라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열두 사도 가운데는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고, 다른 제자들도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점차 드러냅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뜻에 따른 선택이지만 우리 눈에는 완전해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그분의 개념이 다른 것은 아닐까요?

이 열두 사도의 부족함과 잘못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시거나 그들을 포기하시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이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의 완전하심이 오히려 더 드러납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점차 그 사랑을 닮아 갑니다.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사랑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신화하고 육화하는

오늘 복음은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이제 사도들과 함께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는 내용이지만 산 위에서 기도하시고, 사도들을 뽑고, 사도들도 거기로 부르신 다음 사도들과 산 위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산 위의 행위와 산 아래 평지의 행위가 나뉘어 있는 것인데 저는 이것을 신화(神化)의 행위와 육화(肉化)의 행위로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꿔서 얘기하면 매우 세속적인 우리는 산 위로 올라가 주님처럼 기도함으로써 신화되고, 신화가 된 다음에는 더 이상 산 위에 머물지 말고 땅으로 내려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바오로 사도는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데 바로 육의 할례와 그리스도의 할례와 세례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란 무엇입니까? 표피를 떼어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례란 무엇입니까?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떼어내고 무엇을 씻어내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죄를 씻어버리는 것이지만 죄를 씻어버리는 것을 조금 구체적으로 보면 옛날 말로 삼구(三仇)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삼구란 옛날 교리로 세 가지 원수를 말하는 것인데 세속, 육신, 마귀입니다.  

먼저 세속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世俗과 속세俗世는 같은 두 글자, 세와 속으로 이루어졌고 두 글자를 뒤집어놓은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세속을 끊어버리는 것과 속세를 떠나는 것은 출가(出家)하다와 가출(家出)하다의 차이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가출하는 것과 속세를 떠나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이고, 현실 도피적인 것인 데 비해 출가하는 것과 세속을 끊어버리는 것은 세상을 떠나지 않고 세상의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세상의 패배자로서 염세적이고 비관적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세상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끊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옛날에는 육신을 도매금으로, 곧 그 자체로 죄악시하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되고 편하고 감각적인 만족을 구하는 육신, 하느님께로 가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을 방해하는 육신을 말하는 거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권고에서 육신을 통하여 우리가 죄를 짓기는 하지만 우리는 육신을 다스릴 수 있기에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함께 가는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마귀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요즘 세상에 마귀가 어디 있냐고 하는 분이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세례 갱신 때 하듯이 마귀의 허례허식을 끊어버리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으로 육의 영을 몰아내고 주님의 영을 모시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뀐다.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거룩한 곳,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고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르신 이, 뽑으신 이가 누구신가? 입니다. ‘누가’ 부르시고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곧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에게 부르심 받았고 누구에게 뽑힌 이인지를 항상 기억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뽑힐만한 충분한 자격이나 조건들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혔기에 거룩해지게 된 이들’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뽑힌 사도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고, 뽑힌 후에도 그다지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도 않습니다. 모름지기, “사도”란 그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러하리라 여기면 될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들은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한 자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13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주님!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고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는 
겸손함을 주소서.  

이름 없이도 사랑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 때문에 상처받지 않는 법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많은 나라가 어딜까요? 이것도 역시 한국이 1위를 하였습니다. 외롭다는 말은 관계를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관계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상처를 많이 받는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관계에서 상처받아야 할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상처줄 수 있는 사람은 나도 사랑받기를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안 만나고 살면 되냐고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안 만나면 뱀만 만나며 살아야 합니다. 뱀은 자아이고 악의 세력들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고 만날 사람을 선택하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반석이 될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아주 이상한 점이 눈에 띕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당신의 기준으로 뽑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분은 “산으로 가시어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불러 그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이름 붙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명단에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름 하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배신자가 된 유다’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장차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을 왜 뽑으셨을까요? 이것은 신학적으로 풀 수 없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밤새워 기도하고 골몰히 생각해서 유다를 뽑으셨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기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기대하셨을 것이고 그러면 유다가 배신하였을 때 상처 입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상처 입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기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사람을 만나되 상처 입지 않는 비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누구를 뽑을까?’ 하고 깊이 고민하신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사람을 알아보게 해 주십시오.’

바로 이 마음으로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왔거나, 형제의 인도로 왔으니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는 증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어땠을까요? 아마 예수님 마음에는 전혀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뽑으신 이유는 단 하나, 밤샘 기도 중에 ‘이 사람 또한 아버지가 너에게 보낸다.’라는 확신을 얻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뽑으면 후회가 없습니다. 나중에야 ‘아, 그래서 아버지가 그를 보내셨구나!’ 하고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기도를 통해 나의 생각을 비우지 않고, 오직 나의 지식과 경험만으로 사람을 뽑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혼할 배우자를, 회사의 직원을, 그리고 우리 본당의 봉사자를 말입니다. 그 선택은 종종 후회와 실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여기, 자신의 뛰어난 안목과 생각만으로 사람을 뽑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있습니다. 바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입니다.

1983년, 젊은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세운 애플을 더 큰 회사로 키우기 위해 전문 경영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 펩시콜라의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찾아갔습니다. 스컬리는 마케팅의 귀재였고, 잡스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는 스컬리에게 역사에 남을 유명한 말로 그를 유혹했습니다.

“남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와 함께 세상을 바꾸시겠습니까?”

스컬리는 잡스의 열정과 비전에 감동하여 애플의 CEO가 되었습니다. 잡스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허니문은 길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인 경영인 스컬리와 이상주의적인 예술가 잡스는 사사건건 부딪혔습니다. 잡스는 스컬리가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분노했고, 스컬리는 잡스가 회사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1985년, 존 스컬리는 이사회를 소집하여, 스티브 잡스를 그가 세운 애플에서 쫓아내는 비극을 연출합니다. 잡스는 자신의 똑똑한 머리로,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 사람을 바로 자기 손으로 뽑았던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이 일로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요? 그 이유 때문인지 그의 몸 안엔 암세포가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반면, 나의 생각을 비우고 나보다 더 뛰어난 지혜에 의탁하여 사람을 뽑았을 때,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나중에는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한창일 때, 북군의 총사령관 자리는 계속해서 패배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링컨은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은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참모가 그의 임명을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그랜트는 안 됩니다! 그는 지독한 술주정뱅이입니다. 전투 중에도 술에 취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실제로 그랜트는 알코올 중독 문제가 심각했고, 성격도 무뚝뚝했습니다. 링컨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그는 결코 마음에 드는 인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의 생각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 사실에만 집중했습니다. ‘이 사람은 계속해서 이기고 있다.’ 링컨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하느님께서 뽑으신 증거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는 반대하는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랜트가 마시는 위스키 상표가 무엇인지 알려주시오. 내가 다른 장군들에게도 한 통씩 보내주겠소.”

링컨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줄 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랜트는 남북전쟁을 북군의 승리로 이끌며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구원 사업을 위해 누구를 보내주시는지를 알아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뽑을 때, 내 생각과 내 마음에만 의지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나의 능력은 한계가 있고, 나의 이해력은 편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뽑아서 기대를 하기 때문에 상처도 받습니다. 그렇게 점점 두려워지고 고립되고 외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귀족이었던 하느님의 종 예카테리나 데 후에크 도허티(Catherine de Hueck Doherty, 1896-1985) 여사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고 캐나다로 망명했습니다. 그녀는 가난과 싸우며 살다가, 어느 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너의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라.’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녀는 캐나다의 시골 마을 컴버미어(Combermere)에 ‘마돈나 하우스’라는 작은 집을 짓고, 문을 열어두었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뽑지’ 않았습니다. 그저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손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상처 입은 젊은이, 길 잃은 영혼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생각으로 그들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들 안에서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녀의 순종은 기적을 낳았습니다. 그녀가 우연처럼 받아들였던 그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거대한 ‘마돈나 하우스’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제발 나를 믿지 맙시다. 나를 믿으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기 위해 선택의 상황 앞에서 기도합시다. 주님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모든 책임을 주님께 지웁시다. 그분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넓고 깊고 강력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폴레옹 황제,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 왕, 아니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뽑으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1위는 13세기 몽골의 칭기즈 칸입니다. 그의 영토는 중국 북부,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러시아 남부, 동유럽 일부까지 약 2,400㎢였다고 합니다.
 
이 칭기즈 칸은 자기의 가장 큰 무기를 ‘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귀가 나를 가르쳤다.”라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지요. 그는 다른 이의 말뿐 아니라, 자기 내면의 말까지도 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잘 들었기에 단일 군주로 최대 규모의 영토를 정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리석음을 뜻하는 영어의 ‘stupid’의 여러 뜻 중 하나는 ‘듣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듣지 않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가 참 많습니다. 세상의 소리, 진리의 소리, 자기 양심의 소리…. 그런데 엉뚱한 것만을 들으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말만 들으려고 하고, 자기를 반대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모든 계명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나만 사랑하라는 것으로 왜곡해서 듣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들으셨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들으셨고,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주 따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병으로 힘들어하고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낫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점이 오늘 복음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열두 사도를 뽑기 전에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십니다. 잠깐 하느님께 안부 인사드렸던 것이 아닙니다.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오랫동안 기도하시며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많은 군중이 몰려왔습니다. 복음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여기도 중요한 사실 하나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만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까요? 주님께서도 그렇게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기도하시는데, 우리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나만의 바람만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워낙 바쁘신 분이라 용건만 간단히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우리 스스로 마음으로 설정한 것들이다(나폴레온 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하느님께서 먼저 다가오셔서 열두 사도들을 뽑으시고 불러주신 참으로 고마우신 은총입니다.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기도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열두 사도의 선택은 은총의 부르심이자, 공동체적 삶이며, 세상 속 파견이고, 다양성 안의 일치를 살아내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이 초대는 특권이 아닌 봉사이며, 모든 봉사는 기도로 뿌리내릴 때 참된 열매를 맺습니다.

열둘은 개별적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공동체였습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며, 예수님의 선택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새 계약 공동체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선택은 삶의 방향을 새롭게 열어가는 구체적인 삶의 길이 됩니다. 우리의 삶도 선택과 응답을 통해 새로워지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진정한 자유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데 있습니다.

부르심은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세상으로 향하는 파견의 사명입니다.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모여서 신앙인의 길을 만들어 갑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그 부르심을 증언하며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선택은 은총이며, 사명은 사랑입니다.

 

 

 

콜로새서 2장 6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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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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