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23,1-4.19; 24,1-8.62-67)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 이로써 이사악은 어머니를 여읜 뒤에 위로를 받게 되었다. - 오늘 복음
(마태 9,9-13)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창세 23,1-4.19; 24,1-8.62-67
오늘 제1독서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 이로써 이사악은 어머니를 여읜 뒤에 위로를 받게 되었다.
1 사라는 백이십칠 년을 살았다. 이것이 사라가 산 햇수이다.
2 사라는 가나안 땅 키르얏 아르바 곧 헤브론에서 죽었다. 아브라함은 빈소에 들어가 사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피 울었다.
3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 앞에서 물러 나와 히타이트 사람들에게 가서 말하였다.
4 “나는 이방인이며 거류민으로 여러분 곁에 살고 있습니다. 죽은 내 아내를 내어다 안장할 수 있게, 여러분 곁에 있는 묘지를 양도해 주십시오.”
19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마므레, 곧 헤브론 맞은쪽 막펠라 밭에 있는 동굴에 자기 아내 사라를 안장하였다.
24,1 아브라함은 이제 늙고 나이가 무척 많았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2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아보는, 집안의 가장 늙은 종에게 말하였다. “네 손을 내 샅에 넣어라.
3 나는 네가 하늘의 하느님이시며 땅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겠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가나안족의 딸들 가운데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지 않고,
4 내 고향, 내 친족에게 가서 내 아들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하여라.”
5 그 종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그 여자가 저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드님을 나리께서 떠나오신 그 땅으로 데려가야 합니까?”
6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너는 내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7 하늘의 하느님이신 주님, 곧 나를 아버지의 집과 내 본고장에서 데려오시고, ‘내가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맹세하신 그분께서 당신 천사를 네 앞에 보내시어, 네가 그곳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올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다.
8 그 여자가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너는 나에게 한 맹세에서 풀리게 된다. 다만 내 아들만은 그곳으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 세월이 흘러
62 이사악은 브에르 라하이 로이를 떠나, 네겝 땅에 살고 있었다.
63 저녁 무렵 이사악이 들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눈을 들어 보니, 낙타 떼가 오고 있었다.
64 레베카도 눈을 들어 이사악을 보고서는 얼른 낙타에서 내려,
65 그 종에게 물었다. “들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는 저 남자는 누구입니까?” 그 종이 “그분은 나의 주인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레베카는 너울을 꺼내어 얼굴을 가렸다.
66 그 종은 이사악에게 자기가 한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다.
67 이사악은 레베카를 자기 어머니 사라의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 이로써 이사악은 어머니를 여읜 뒤에 위로를 받게 되었다.
마태 9,9-13
오늘 복음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4일
최현식 라우렌시오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9:13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3).
구약 성경에서 전하는 희생 제사는 제물을 봉헌하는 이가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으로 시작하여 사제가 그 짐승을 잡아 피 뿌리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이 예식은 죄 때문에 단절된 하느님과의 생명의 친교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제사의 성격에 따라 희생 제물의 전부 또는 일부를 불사르는데, 전부를 불사르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흠숭을 뜻합니다. 일부를 불사르는 것은,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며 친교를 회복하고, 불사르지 않는 부분을 사제와 봉헌자들이 나누어 먹으며 그들 사이의 친교를 다지는 것을 뜻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희생 제사의 목적은 이러한 친교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거룩함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친교와 어긋나는 분리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희생 제사의 근본 목적인 친교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분의 활동 전체를 요약한다면 자비와 사랑, 그리고 이를 통한 친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친교의 가장 큰 걸림돌인 죄를 없애시고, 다시 사람들을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살도록 회복하시고자 당신 목숨까지 바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당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누구도 제외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냉대받던 세리와 죄인들과도 식사의 친교를 기꺼이 나누셨고, 당신의 적대자처럼 행동하는 바리사이들에게도 “……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라고 그들이 자주 쓰는 말로, 그들의 처지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자주 배제합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님을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같이 나아가는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요즘 많이 나아졌지만 저는 아직도 형제를 죄인으로 만드는 데 명수입니다. 이 말은 죄인이 아닌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그는 물론 죄인입니다. 그리고 저도 물론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죄인으로 만드는 데 명수라고 할 때 뜻하는 것은 저나 그나 다 같이 죄인인데 저의 교만 때문에 저는 죄인이 아니고 제 맘에 들지 않는 그는 죄인이라고 여기며, 꼴 보기 싫어하거나 나아가서 미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죄인으로 만들고는 이해하려고 또 용서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저는 얼마나 멍청한지 모릅니다. 이성적으로 저를 보고 그를 보면, 신앙적으로 저를 보고 그를 보면 주님 앞에서 다 같이 죄인이고 다 같이 죄인으로 주님께 나아가 구원받아야 할 죄인인데, 그래서 저만 겸손해지면 되는데 교만 때문에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는 겁니다.
이런 저를 두고 주님께서 비유를 드신 적이 있지요. 이 비유에서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세리는 멀찍이 서서 눈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각기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비유를 드신 주님은 바리사이도 세리처럼 하느님 앞에서 나오길 바라시고, 다른 세리들도 이 비유의 세리처럼 당신 앞에 나오길 바라시는데 현실을 보면 저 같은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교만하게 하느님 앞에 나아가고, 저 같은 사람들의 죄인 취급에 주눅 든 이들은 하느님 앞에 아예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오늘 주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죄인은 부르지 않아도 나와 주님 앞에 꼿꼿이 설 수 있으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되지만 주눅 든 죄인들은 주님께서 불러주셔야지만 나올 수 있으니 부르시겠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도 세리도 같이 당신께 나오길 바라십니다. 교만한 바리사이는 회개하고 겸손해져 당신께 나오고, 주눅 든 세리는 용기 내어 당신께 나오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둘이 서로 끌어주며 나오는 것을 무엇보다 기뻐하실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태 9,10 참조)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그렇다. 진정 당신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넘어,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필립 3,10),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하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그 놀라운 사랑으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9,13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제 행실을 희생 제물로
바치게 하시고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당은 ‘자비’라는 근육을 키우는 헬스장입니다.
저는 성당 옆에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물론 언제나 부족하기는 하지만, 일단 어머니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다 해드렸다고 믿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저를 위해 성당을 내려다보며 매일 기도하고 혹시 무슨 일이나 없을까, 매일 걱정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제가 좋아할 줄 아십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마련해 놓은 새집에서 운동도 하셔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어 미사도 나오고 신자들과도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제가 집을 마련하여 모신 이유를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감사나 제물은 그분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이웃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그렇습니다. 이 성당이라는 영적 헬스장에서 우리가 진짜 키워야 할 근육은 ‘자비’라는 근육입니다. 우리의 기도, 미사, 희생은 모두 그 ‘자비의 근육’을 키우기 위한 운동 기구일 뿐입니다.
영화 ‘밀양’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신애는 교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고 오랜 기도 끝에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갑니다. 그런데 살인범은 너무나 해맑은 얼굴로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습니다.”
그 순간 신애는 무너져 내립니다. 아직 그만큼 자비로울 수 있는 근육을 단련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2023년 5월, 인천의 한 아파트 상가 주차장에서 전직 보디빌더인 30대 남성 A씨가 자신의 차량 앞을 막은 차량의 여성 운전자 B씨와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었습니다. A씨는 말다툼 중 B씨를 주먹과 발로 무차별 폭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B씨에게 침을 뱉는 등 모욕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당시 A씨의 아내 역시 폭행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폭행으로 피해자 B씨는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전치 6주의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회적 파장 및 결과: 이 사건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언론을 통해 '주차장 보디빌더 갑질 폭행'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A씨의 우람한 체격과 피해 여성의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이 대비되면서, "그 힘을 고작 연약한 여성을 때리는 데 썼나"라는 대중의 엄청난 분노를 샀습니다. A씨는 재판에 넘겨져 2024년 5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습니다.
운동을 열심히는 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수련은 전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거울만 보는 ‘영적 헬스 중독자’가 성당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자주 우리 힘을 측정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헬스장이 아닌 밖에서입니다. 매일 헬스를 다니면서 정작 어머니가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계셔도 “지금 운동 갈 시간이라서요”라며 지나치고, 친구들이 이사를 도와달라고 해도 “오늘은 가슴 운동을 쉬면 안 되는 날이야”라며 거절한다면 헬스 중독자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 나의 힘을 측정하는 장소는 항상 헬스장 밖이어야 합니다. 카를로 아쿠티스나 조르조 프라사티 복자들의 경우, 그들은 매일 새벽미사와 성체조배를 통해 아쿠티스는 성체기적을 전하기 위한 홈페이지를 제작했고, 프라사티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거기서 얻은 힘을 썼습니다. 이렇게 나타나지 않는 기도는 그저 영적 헬스 중독일 뿐입니다.
오늘은 성 주세페 모스카티(1880-1927)를 소개해드립니다. 그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의사이자 의과 대학 교수였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진단 의학의 권위자였으며, 그의 과학적 연구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모스카티의 하루는 연구실이나 강의실이 아닌, 제대 앞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미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모셨고, 기도로써 자신의 모든 의술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평신도 사제직’으로 여겼습니다.
환자를 진찰하기 전에는 항상 기도했으며, 동료 의사들에게 “고통받는 환자의 육신뿐 아니라, 그들의 신음하는 영혼도 기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매일의 기도와 성체 신심은, 고된 의사의 삶 속에서 자비의 힘을 길러내는 그만의 ‘영적 헬스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단련된 ‘자비의 근육’은 그의 진료실에서 놀라운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진료실에는 “가진 사람은 내고, 없는 사람은 가져가시오”라고 쓰인 바구니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을 뿐 아니라, 처방전을 써준 뒤 몰래 주머니에 진료비와 약값을 넉넉히 넣어주곤 했습니다. 그의 흰 의사 가운은 기도로 단련되고, 이웃을 향한 자비로 얼룩진 가장 거룩한 제의(祭衣)였습니다.
일단 헬스장에 오면 운동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당에 오면 기도와 제물을 바칩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거울로만 바라본다면 영적 헬스 중독자입니다. 내가 어떤 힘이 생겼는지, 밖에 나가서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전재용 선장은 96명의 보트 피플이 그날 하루만 25척의 배로부터 외면당한 상태로 자신을 바라볼 때 그들을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끌어올렸습니다. 그가 평소에 얼마나 신앙 안에서 근육을 단련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자비를 주님은 바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어렸을 때, 제 위의 형, 누나가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바로 안경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저의 시력이 너무 좋았기에 안경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달리 형과 누나들은 모두 안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형, 누나의 안경을 몰래 써보기도 했습니다. 잘 보였을까요? 남의 안경이 제게 맞을 리가 없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계속 몰래 쓰다가 저의 시력도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남의 안경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경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안경을 쓰면 자기에게 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남처럼 사는 것 그리고 남을 부러워하는 삶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나답게 사는 것, 자기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존재가 제대로 드러나게 되며, 이것이 하느님의 창조 목적을 제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라 생각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기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다르게 창조하셨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사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자기 삶을 사십니까?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세리는 로마 제국에 세금을 대신 거두어 주는 직업으로, 동족에게는 착취자로 여겨졌고, 종교적으로는 부정한 자 또는 죄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런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실 이름난 스승이 있으면 사람들이 찾아가서 그의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를 보시고 직접 부르신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마태오의 자격이나 준비 여부와 상관없이 주님의 선택과 부르심이 먼저인 것을 보여줍니다.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그분을 따릅니다. 이는 회심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마태오의 삶이 새롭게 살아난 것을 암시합니다. 그는 남들의 자기를 향한 손가락질이나 죄인 취급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남들의 생각처럼 죄인으로 사는 것보다, 주님께서 원하는 자기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마태오처럼 사회적으로 배척받던 이조차 주님의 부르심 대상이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바리사이의 모습을 쫓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방해하면서, 자기들만 맞다고 자기들 생각이 하느님 뜻인 것처럼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피하지 않고 찾아오시는데, 우리는 죄인을 거부하고 주님께 다가오는 것을 막아서기까지 합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보다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이다 (레프 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희망이듯 상처 입은 우리에게 주님은 구원입니다. 우리는 모두 치유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십니다.
'병들었다'는 고백은 약함의 인정이자 하느님의 치유를 받아들이는 치유의 첫걸음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은 은총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피하지 않고 직접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간 삶은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부르심은 자격이 아니라 사랑으로 주어집니다.
사랑으로 주어진 부르심은 망설임 없는 결단과 즉각적인 순종으로 현실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뜨겁게 만납니다. 치유자이신 하느님만이 참된 회복의 길이십니다. 상처는 끝내 치유되고 죄는 용서받아 하나되는 구원에 이릅니다.
마태오복음 9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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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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